어린 시절 나는 친할머니를 따라 심인당이라는 곳을 매주 일요일마다 갔다.
원래 절은 산 속에 있는데 어린 시절 내가 다닌 심인당은 대구 중심 어딘가에 있었다.
나중에서야 심인당은 대한 불교진각종 사찰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매 주일(다시 말하면 일요일) 할머니를 따라 가면, 법당에서 '옴마니반메훔'을 외우고, 또 그곳에 나처럼 따라 온 아이들과 절터에서 재미있게 놀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아들 손주 둘을 늘 끼고 다니셨고, 금지옥엽으로 소중히 여기셨다.
하지만 며느리인 어머니와의 관계는 좋지 않으셨기에 고부관계는 어려웠다.
내 본적은 대구 남구 봉덕동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의 상태에 따라 이리 저리 이사를 했었다.
대구 시내 한 복판 대구백화점 옆에서 '반도장식'이라는 장식업도 하시고, 또 기억으로는 동성로에서 '한밭식당'이라고 하는 곰탕 집도 운영 하셨다. 하지만 하는 사업이 다 어려움을 겪게 되고, 우리는 시내가 아닌 서구 중리동에 있는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때 쯤에 어머니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로, 우리 세 자녀들을 모두 교회에 데리고 가기로 결단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족 구원에 대한 사명과 소명을 주신 것이다.
철저한 불교 가정에 가족을 버리고 홀홀단신 시집와서, 시어머니와 남편 밑에서 살던 어머니가 회심함으로서 우리 가정에는 이전과 다른 거대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영적인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신자인 며느리와 불신자의 시어머니와 남편...
당시 중리동에서는 만민교회라는 예장통합측 교회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교회에 출석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고 교회의 일꾼이 되셨다. 교회의 모든 예배 모임에 참석하시고, 또 나와 형, 여동생 셋 모두를 주일학교에 보내셨다.
그때가 국민학교 2~3학년이 된 것 같은데, 심인당을 가던 내가 갑자기 교회 주일학교로 전향을 해 버린 것이다.
물론 내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하지만 나의 전향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할머니는 주일에 심인당에 갈때마다 교회에 와 있는 나를 찾아오셔 데리고 가시려고 했고, 또 어머니는 내가 심인당에 가지 않고 교회에서 예배 드기릭 원하셨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여서 애지중지 해 주신 할머니 눈치와 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이 영적 전쟁이 끝날 때를 어중간히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