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때 보훈처 “윗집 오더다”… 호국영웅을 반민족 친일파로 낙인
백선엽 등 12人, 어떻게 폄훼됐나
정부는 고(故) 백선엽 장군 등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일부 호국 영웅, 국가유공자들의 안장 기록에서 문재인 정부 때 삽입된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 문구를 삭제하기로 했다. 유가족이 삭제 신청을 할 경우 등 여러 사항을 고려할 방침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정부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파 1005명’을 선정하는 과정이 적절했는지도 들여다볼 것으로 알려졌다. 현충원 안장 유공자들에게 ‘친일파’ 꼬리표를 붙인 근거가 이 친일 규명위 선정 명단인데, 당시 규명위 구성과 평가 잣대가 편파적이었다는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현충원 홈페이지에서 열람할 수 있는 안장 기록란에 ‘친일파’ 문구가 표시된 국가유공자 등은 총 12명이다. 국군 첫 육군 대장인 백 장군을 비롯해 김백일 미군정 국방경비대(국군 전신) 3연대장, 김석범 2대 해병대사령관, 김홍준 국방경비대 4연대 창설 중대장, 백낙준 초대 연세대 총장, 백홍석 초대 육군 특별부대사령관, 송석하 전 국방연구원장, 신응균 초대 국방과학연구소장, 신태영 4대 국방부 장관, 신현준 초대 해병대사령관, 이응준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8대 국방부 장관 등이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9년 3월 보훈처는 이들이 친일파 명단에 있다는 이유로 안장 기록에 ‘친일파’ 문구를 명시하기로 결정했다. 별도의 사회적 공론화나 법적 절차 없이 임의로 이뤄진 조치였다. 본지 취재에 따르면, 피우진 당시 처장 등 일부 고위 간부가 주도해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당시 내부에서 ‘사자(死者) 명예훼손’ 소지가 있다는 지적까지 나왔지만, 일부 간부들이 “‘윗집(청와대 추정)’ ‘여의도(여당)’ 오더”라며 밀어붙인 것으로 전해졌다. 백 장군이 2020년 별세했을 때도 이 결정을 근거로 고인의 안장 정보에 ‘친일파’ 문구가 삽입됐다.
당시 관련 법규나 규정 없이 ‘친일파’ 문구를 삽입했기 때문에, 현 보훈부에서는 이를 삭제하는 것 또한 별다른 법규 개정 조치 없이 임의로 조처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보훈부 한 관계자는 “유족 신청 여부 등 각종 절차를 거쳐 조만간 문구를 삭제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보다 근본적으로 친일 규명위의 ‘친일파’ 규정 절차와 방식에 대한 적절성 여부도 들여다볼 방침이다. 정부 관계자는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면서도 “친일 규명위의 명단이 과연 공신력 있는 것이냐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친일 규명위는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특별법을 통해 대통령 직속으로 만든 기구다. 1948~1949년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을 위원장으로 하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통해 친일파를 색출했지만, 70여 년이 지나 다시 친일파를 선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규명위는 위원장 포함 위원 11명이 대통령 추천 4명, 대법원장 추천 3명, 국회 4명으로 구성돼 편향성 논란을 받으며 시작됐다. 당시 친일파 지정 표결 대부분이 9대2, 8대3 정도로 결정됐다고 한다.
‘6·25 영웅’ 백선엽 장군, 73년 만에 다부동에 우뚝 서다
규명위가 조사 4년 반 만인 2009년 친일파 1005명 명단을 발표했을 때도 불공정, 편파 시비가 붙었다. 과거 반민특위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인사들에게 일제 전시체제에서 일본군·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이력을 근거로 친일파 낙인을 찍었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백선엽 장군 등 이후 6·25 때 나라를 지킨 호국 영웅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 권유에 강제 동원됐거나 관변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로 광복 후 정부와 교육계·종교계·문화계에서 대한민국을 세우고 이끈 백낙준 초대 연세대 총장 등과 같은 인물들도 포함됐다.
반면 일제에 충성을 다짐하는 전향서를 쓰고,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을 받은 행적이 당시 신문과 문서에 기록된 여운형 같은 좌파 인사는 빠졌다. 홍난파는 친일파 명단에 올랐다가 행정 소송이 제기됐다는 이유로 최종 명단에서는 빠지기도 했다.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출신인 남정옥 박사는 “백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다는 사실은 1980년대 자서전을 통해 스스로 밝히면서 알려진 것이다. 본인이 떳떳했기 때문에 공개한 것”이라면서 “일제 전시체제에서 간도특설대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친일로 모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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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식 "백선엽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 삭제 검토"
윤석열 정부가 한국 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끈 백선엽(1920~2020년) 장군에게 붙여진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꼬리표 삭제에 나선다.
‘백선엽 장군 서거 3주기 추모식’이 열리는 5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국가보훈부와 국립 현충원 홈페이지에서 백 장군의 안장 기록을 검색하면 비고란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문구가 같이 뜬다”며 “백 장군을 비롯한 12명의 현충원 영령이 그런 수모를 겪고 있다. 보훈부 차원에서 문구를 삭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곧 결론을 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 장관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세운 사람이라면, 백 장군은 국가 수립 이후 최대의 위기였던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낸 존재”라며 “그런 분이 진영 갈등 탓에 역사의 험지에 남는 것을 그대로 둘 순 없다. 백 장군의 공적을 제대로 알려야 하는 게 보훈부의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박 장관이 삭제를 검토하겠다는 기록은 문재인 정부 시절 등재됐다. 2019년 3월 보훈처(당시 처장 피우진)는 보훈처ㆍ현충원 홈페이지의 안장자 기록에 ‘친일파’ 문구를 넣기로 결정했다. 친일파 여부는 노무현 정부 대통령 직속 기구로 설립된 ‘친일반민족 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가 정한 명단을 기준으로 삼았다.
백 장군의 안장 정보에 친일 기록이 등재된 건 안장식(2020년 7월 15일) 바로 다음 날부터였다. 보훈처는 백 장군 기록에 생년월일ㆍ묘역 위치 등 기본 정보와 함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다는 정보를 올렸다. 백 장군은 과거 반민규명위로부터 “1941년부터 1945년 만주국군 장교로서 침략 전쟁에 협력했다” 등의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혔다.
이를 근거로 당시 더불어민주당에선 “친일파 묘는 파묘(破墓)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파묘법까지 발의했다. 권칠승ㆍ김홍걸 의원 등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금지하고, 유골이나 시신을 다른 장소로 이장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냈다. 이들은 파묘법 공청회를 열어 “묘지법 개정이 나라를 나라다운 나라로 만드는 과정”(송영길 의원)이라고 주장했다.
여권 일각에선 차제에 “반민규명위가 정한 친일 명단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현재 백 장군의 사례처럼 국립묘지인 현충원에 안장돼 있으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공인된 인물은 총 12명이다. 일본군 출신의 이응준 전 체신부 장관, 신태영 전 국방부 장관, 만주군 출신의 신현준 전 해병대 사령관 및 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 등이다. 여권 고위관계자는 “보훈부의 기록 삭제와 별개로 노무현 정부 직속 기구가 판단했던 친일 딱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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