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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는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劍) 혹은 간단히 사인검(四寅劍)이라고 불리우는 양날의 칼이 왕실에서 제작되었다. 이 칼은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제작된 것으로서 순양(純陽)의 성질을 지녔기 때문에 음(陰)한 사귀(邪鬼)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어졌다. 사가(私家)에서도 일부 제작된 흔적이 있으나 사인검의 대부분은 왕실에서 제작하여 궁중에 보관하거나 혹은 종친(宗親)과 총신(寵臣)들에게 하사되었다. 미신을 배격하는 조선의 유학자들은 사인검 제작 풍습을 좌도(左道)라고 비난하고 중단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내내 사인검의 제작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사인검은 대부분이 주조(鑄造)에 의하여 제작되었고 단조(鍛造)로 만들어진 경우에도 재질이 연철(軟鐵)이었기 때문에 실전적인 의미에서는 칼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벽사용(僻邪用)의 부적(符籍)에 가까운 물건이다. 하지만 개화기에 우리나라를 찾았던 외국인들은 다른 칼은 다 제쳐 놓고 이 사인검에만 집중적인 관심을 보였으며 현재도 해외의 도검 관련 사이트에서 가끔씩이나마 이야기 되는 조선의 칼은 이 사인검 뿐이다. 사인검은 그 형태가 일본, 중국의 도검과 확연히 구별되며 온갖 기이한 주문과 기호, 다양한 별자리가 칼 전체에 걸쳐서 금과 은으로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에 조형적으로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동양적 신비감이 느껴진다. 현대에 와서 이미 사인검 제작의 전통은 단절되었으나 사인검의 전통 공예적인 가치와 그 안에 담긴 전통 신앙의 의미는 여전하며 이를 복원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
2. 사인검의 형태와 종류
1) 사인검 유물 현황
벽사(?邪)를 목적으로 특정한 날에 제작되는 참사검(斬邪劍)에는 사인검(四寅劍)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삼인검(三寅劍), 사진검(四辰劍), 삼진검(三辰劍) 등이 있다. 따라서 이들 모두는 참사검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겠으나 현재 전해지는 유물 중에는 삼진검이나 사진검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미 사인검이라는 이름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참사검 대신 사인검이라는 명칭으로 벽사용 도검을 통칭하고자 한다. 한편, 삼인검은 사인검을 만들 때 함께 만들어지며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제작된 인검(寅劍) 중에서 인시(寅時)에 만들어진 것을 사인검이라고 하고 그 이외의 시간에 만들어진 것을 삼인검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그 의미나 제작 과정은 동일하다.
현존하는 사인검 유물은 약 30여점 정도로 알려져있는데 원래 사인검 자체가 주로 궁중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상당수는 경복궁에 소장되었다가 나중에 궁중유물전시관과 육군박물관 등에 소장되었다. 그밖에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종중 및 개인 수집가에게 여러점이 소장되어있으나 그 실상은 파악되지 않는다.
2) 사인검의 분류 - 칼자루의 형식
현존하는 사인검 유물을 칼자루의 형식에 따라서 나누어 보면 대략 다음의 세가지 종류가 있다.
- 삼엽환두(三葉環頭) 양식
삼엽환두(三葉環頭) 양식은 칼머리가 삼국시대의 삼엽(三葉) 환두대도(環頭大刀)와 삼루(三壘) 환두대도(環頭大刀)를 합쳐놓은 듯한 모습이다. 삼엽문은 세잎고리 양식이라고도 하고 삼루문은 세고리 양식이라고도 하는데 이 둘 모두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걸쳐서 환두대도의 병두에 자주 나타나던 양식이다. 환두 대도와 삼엽환두양식의 사인검간에 계통적인 상관관계는 분명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조형적인 감각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상관 관계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병두와 칼자루는 모두 검신과 별도로 주조하여 조립하였으며 재질은 검신과 같다. 또한 삼엽환두양식의 사인검에는 검신과는 별도로 주조한 황동제 코등이가 부착되어있는데 이 코등이는 여러겹으로 겹쳐진 연꽃잎의 모양이며 칼날 쪽에 수직으로 뻗어있다.
- 여의두(如意頭) 양식
여의두(如意頭) 양식의 사인검은 칼자루 끝에 넓고 평평한 여의두 형태의 병두가 달려있고 그 가운데에 연잎문양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구멍이 있다. 여의(如意)란 원래 당(唐) 현종(玄宗)이 등을 긁는 "효자손"을 두고 여인지의(如人之意)라고 한데서 비롯되었으나 나중에는 그 자체가 길상(吉祥)의 상징이 되어 상아, 옥, 산호 등 진귀한 재료로 만들어 집안에 두었으며 불가에서는 승려들이 법문을 할 때 이를 사용하였다. 여의주(如意珠)나 여의봉(如意棒)이라는 말도 다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여의두문은 그 자체로서 만사의 형통을 의미한다.
이 여의두 양식의 사인검은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의(五禮儀)》에 그려진 금장도(金粧刀), 은장도(銀粧刀)와 거의 유사한 모습이며 조선시대의 무인석에서도 이러한 양식의 검을 짚고 서있는 것들이 발견된다. 여의두 양식의 사인검 코등이는 환도의 코등이와 유사한 형태이며 꽃잎 모양의 코등이 위에는 범어 주문이 새겨져있다.
- 당검(唐劍) 양식
당검 양식의 사인검은 칼의 전체적인 형태가 당검(唐劍), 혹은 송검(宋劍) 양식과 유사하다. 다만 일반적인 중국검과 달리 병두에 비교적 큰 고리가 달려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는 중국 도교의 칠성검 양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남조(南朝) 때 편찬된 《동현령보도학과의(洞玄靈寶道學科儀)》의 「작신검법품(作神劍法品) 에는 도교의 제의용 검의 제작 방법이 설명되어있는데 여기에 칼자루에 고리를 달고 이 고리에 주문을 담는다고 하였다. 당검 양식의 사인검 코등이에는 중국 검에서 흔히 나타나는 치우문양이 새겨져있다.
중국 명나라 시대의 양날검 중에는 위에 나타난 세가지 종류의 사인검과 상당히 유사한 것이 존재한다. 물론 시기적인 선후 관계를 분명히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사인검의 제작 자체가 중국 도교의 영향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칼의 형태 또한 중국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3) 사인검(四寅劍)의 제작과정
사인검(四寅劍)의 제작과정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실물 유물을 검토해보면 그 제작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 사인검 제작은 조정(朝廷)에서 국가적인 행사로 실시된 것이 아니라 왕실(王室)에서 환관(宦官)들이 주도 하고 내수사(內需司)의 재물을 동원하여 이루어졌다. 숙종(肅宗) 때에 사인검 제작을 위해 선혜청(宣惠廳)이 내수사(內需司)에 재물을 지원한 적이 있으나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일에 해당하며 원칙적으로는 왕실 재정만으로 충당하였다. 이는 사인검 제작이 국가적 안위를 비는 것이 아니라 왕실의 안녕을 비는 행사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사인검 제작은 궁궐(宮闕) 안이나 적어도 궁궐 부근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 때 궁궐 안에서 사인검을 제작한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인검은 제작 과정 자체도 하나의 벽사(僻邪) 행위였으므로 다른 시대에도 궁궐 안에서 사인검 제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 사인검 제작에는 공사(公私)의 장인(匠人)들과 잡역을 맡은 군사들이 동원되었는데 숙종조의 기록을 보면 이들 장인들은 번갈아가면서 하루나 이틀씩 노역을 했다.
- 사인검의 제작기간은 적어도 1개월 이상에서 수개월이 소요되었다. 사인검 제작에 사용되는 철은 기왕의 무쇠나 시우쇠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산역(山役)을 통하여 쇳물을 녹여 만들기 때문에 이 산역에만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일단 칼날이 형태가 잡힌 이후에도 입사(入絲)와 연마(硏磨)등 후속 공정에 상당 기간이 소요되었다.
- 사인검 제작에는 주조(鑄造) 방식과 타조(打造) 방식이 모두 이용되었다. 사인검 제작이 가능한 시간은 두시간으로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일반 도검을 제작할 때와 같이 단조(鍛造)작업만으로 칼을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이며 사인검의 대부분은 주조 작업만으로, 혹은 주조로 가단주철(可鍛鑄鐵)을 만든 뒤 이를 단타(鍛打)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사인검에 관한 기록
1)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사인검(四寅劍)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사인검(四寅劍)이나 삼인검(三寅劒)과 관련된 기록은 성종(成宗) 재위시 1건, 연산군(燕山君) 3건, 중종(中宗) 4건, 숙종(肅宗) 1건 등 모두 아홉번 나온다. 사인검 제작은 조정에서 국고(國庫)를 사용하여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王室)에서 내수사(內需司)의 재물을 사용하여 제작하는 것이므로 조정에서 이에 관한 논의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인검 관련 실록 기사의 대부분은 사인검 제작의 폐단을 문제삼아 이의 혁파를 주장하는 신하들의 간언과, 사인검 제작이 조종조로부터 계속되온 관습임을 들어 이를 거부하는 임금의 비답들이다. 이들 논의 내용 중에는 사인검의 의미와 제작 방법에 대한 단서들이 포함되어있다.
가) 성종(成宗)
성종 9년 종친인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이 고읍지라는 여인을 환도로 죽인 사건에 대한 치죄에서 창원군(昌原君)은 “집안에 다만 삼인검(三寅劒)과 삼진검(三辰劒)이 각각 한 자루씩 있을 뿐이고, 또 환도(環刀)는 없습니다”(성종 9년03/11(계유)) 라고 아뢰었다. 이로 보건대 당시에 삼인검(三寅劒)과 삼진검(三辰劒)은 무기로 사용될 여지가 없는 기물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인검류(寅劒類)는 칼날을 예리하게 세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칼 끝이 뭉툭해서 찌르기에 적합하지 않다.
나) 연산군(燕山君)
연산군은 귀신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행차할 길에 먼저 방상씨(方相氏)를 지나가게 할 정도로 미신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불교(佛敎)는 싫어한 반면 도교(道敎)에 관심이 있어서, 소격서(昭格署)가 이미 혁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관청에서 초제(醮祭)를 베풀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산군의 성향은 사인검의 제작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쳐 연산 12년에는 무려 200 자루의 사인검을 제작하도록 명하였다(연산 12년 01/12(임진)). 삼인검은 그나마 하루 내내 제작이 가능하지만 사인검(四寅劍)은 겨우 두시간 이내에 만들어 내야만 하므로 이를 대량으로 제작하자면 엄청난 재물과 사역이 필요하였다. 대사헌 성현(成俔) 등의 상소 내용을 보면 이 때의 사인검 제작은 궁중 내에서 이루어졌고 동원된 군사만도 수백명에 달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사인검 제작에 필요한 잡물을 거두기 위해서 시중의 상인들을 잡아 가두기도 하였다(연산12년 05/08(정해)).
다) 중종(中宗)
연산군을 반정으로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 또한 도교(道敎)에 관심이 많아서 중종 2년에는 소격서를 속히 수리하라는 하교를 내렸고(중종 2년 10/02) 이후 수년에 걸쳐서 신하들이 소격서의 혁파를 상소하였지만 중종 13년에 잠시 혁파하였을 뿐 1525년에 복설(復設)하였다.
중종은 두번씩이나 사인검 제작을 시도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두 번 다 중단을 했는데, 중종 24년에는 시작도 못하였고(중종 24년 12/17) 다시 삼인일(三寅日)이 돌아온 중종 37년에는 사인검 제작이 상당히 진척된 상태에서 흉년과 환관(宦官)의 작폐로 인하여 다시 중단하게 된다(중종 37년 04/18). 이 과정에서 사헌부는 사인검 제작이“다만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것으로 좌도(左道)에 관계되니, 참으로 쓸 데 없는 물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중종 때에는 사인검을 제작하는데 실패하였으나 조정의 논의 중에는 사인검의 제작 과정에 대한 약간의 단서를 남기고 있다.
“사인검(四寅劒)을 만들 때는 반드시 미리 산역(山役)을 하고 사장(私匠)을 모아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개월 간 산역을 하자면 민폐(民弊)가 적지 않을 것은 물론, 사장 1인이 1일씩 역사하는 것이 심한 폐해가 되지는 않는 것이지만 수괄(搜括)하는 폐단이 어찌 작겠습니까?”
라) 숙종(肅宗)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인검 제작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숙종 12년의 기사인데, 숙종은 삼인검을 타조하는데 내수사(內需司)의 자금만으로는 어려우므로 선혜청의 재물을 내어주도록 명한다. 이 때 선혜청(宣惠廳)이 내수사에 지원한 재물은 “쌀 30석(石)과 돈 2백 냥(兩) 및 호조·병조의 면포(綿布) 각 2백 필(匹)”이다(숙종 12년 01/13).
한편 위의 기사의 말미에는 삼인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삼인검(三寅劍)이란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타조(打造)하는 것을 말함인데, 사귀(邪鬼)를 물리칠 수 있다.”
즉, 삼인검은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의 삼인일에 제작하는 벽사의 수단이며 사인검은 삼인일 중에서도 특히 양기(陽氣)가 강한 인시(寅時)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 신흠(申欽)의 사인도가(四寅刀歌)
신흠(申欽)이 지은 《상촌집(象村集)》 제7권에는 사인도가(四寅刀歌)라는 칠언고시(七言古詩)가 실려있다. 선조(宣祖)의 부마였던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신흠에게 인년(寅年)ㆍ인월(寅月)ㆍ인일(寅日)ㆍ인시(寅時)에 주조한 사인검(四寅劍)을 선물하자 그 기쁨을 노래한 것이다. 이 내용을 보면 사인검이 우리 조상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사인도가(四寅刀歌)
林有魈兮山有夔 숲에는 이매(魑魅)가 있고 산에는 도깨비가 있고
陸有虎兮水有螭 땅에는 호랑이가 있고 물에는 이무기가 있어
夜而行兮晝而伏 밤이면 돌아다니고 낮이면 숨어버리며
攬余裾兮嚙余足 나의 옷깃을 끌어당기고 내 발을 깨무네.
橫中途兮不可制 길에서 횡행하니 제어할 길이 없고
爲民害兮勢漸猘 백성에게 해가되니 그 기세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我有刀兮名四寅 나에게 칼이 있으니 그 이름을 사인(四寅)이라 하네.
讋地祇兮通天神 지신(地神)을 두렵게 만들고 천신(天神)과 통한다.
白銀粧兮沈香飾 백은(白銀)으로 단장하고 침향(沈香)으로 꾸몄으며
光潑潑兮霜花色 빛이 번쩍이며 뿜어지니 마치 서릿꽃과 같다.
防余身兮奚所懼 내 몸을 보호하니 어찌 두려워할 바가 있으리
邪自辟兮罔余迕 삿된 것은 저절로 피하니 나를 얽어매지 못하리.
精爲龍兮氣爲虹 정(精)은 용(龍)이 되고 기(氣)는 무지개가 되어
橫北斗兮亘紫宮 북두성(北斗星)을 가로질러 자미원(紫微垣) 까지 퍼지네.
行與藏兮惟余同 길을 다닐 때 몸에 감추어 함께하니 내 몸과 한가지로 생각하네.
歲將暮兮倚空同 장차 늙어지면 함게 공동(空同)으로 돌아가리라.
이상의 내용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사인검이 천신(天神)과 통하고 지신(地神)을 두렵게 만드는 신물(神物)이며 이 신물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어떤 귀신이나 요물도 자신에게 범접하지 못하리라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시에서 사인검을 통해 제어하고자 하는 대상은 이매(誾魅), 기(夔), 호랑이, 이무기등으로 나타난다. 이매는 숲속의 정령으로서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몸을 하고 다리가 넷인데 요물이며 기(夔)는 외발 달린 도깨비인데 이 둘 모두 사람을 홀리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 밖에도 망량과 허주, 독각귀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는 사람이 죽어서 생기는 귀신과는 다르며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의하면 산과 바다의 풀, 나무, 흙, 돌, 물 등의 정기가 모여서 된 것이라고 한다. 그 밖에 호랑이와 이무기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는 산과 물에 실제로 존재하는 영험한 짐승이었다. 따라서 사인검이 목적하는 주요 구축(驅逐) 대상은 죽은 자의 귀신이 아니라 만물의 음기가 뭉쳐서 이루어진 도깨비와 위험한 영물(靈物)이었다고 생각된다. 인(寅)의 순양(純陽)한 기운을 받고 칠성과 28수의 천상 기운을 내려 받은 사인검은 음기(陰氣)로 이루어진 요물을 쫓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가 큰 것이다.
4. 사인검의 상징 체계
사인검에는 다양한 상징과 주술적인 수단이 담겨있다. 우선 사인검 자체가 칼의 형태를 지닌 부적이고 또한 인(寅)이 들어간 시간에 제작하여 하늘의 양기를 칼에 담고자 했다. 검신과 검파에는 입사(入絲)와 상감(象嵌)으로 칠성문(七星紋), 28 성수문(星宿紋), 한문주문(漢文呪文), 부적(符籍), 범어진언(梵語眞言), 길상문(吉祥紋)등을 금은으로 새겨 검의 신비한 힘을 더하였다. 하지만 모든 사인검에 이들 상징이 고루 나타나는 것이 아닌 점을 감안할 때 사인검의 상징은 다음과 같이 핵심적인 상징과 보완적인 상징, 장식적인 상징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 핵심적인 상징 : 검(劍), 인(寅), 성수문(星宿紋)
- 보완적인 상징 : 한문주문(漢文呪文), 범어진언(梵語眞言), 부적(符籍)
- 장식적인 상징 : 길상문(吉祥紋)
핵심적인 상징이란 사인검이 신령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상징이며 보완적 상징은 필수적 요소는 아니지만 보완적으로 추가되어 검의 신령한 힘을 더하게 하는 상징이다. 장식적인 상징은 길조(吉兆)를 의미하는 장식적인 문양과 조각으로서 그 자체가 적극적인 파사(破邪)의 기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상징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검(劍)
사인검을 부적의 일종이라고 볼 때 이 부적의 가장 큰 특징은 검(劍)의 형태로 철을 부어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칼로써 사악한 요귀를 쫒는다는 믿음은 도교의 전통 속에 널리 자리잡고 있다. 도교의 천신과 신선이 요귀를 물리치는데 검을 사용한 예로는 현천상제(玄天上帝)의 칠성검(七星劍), 장릉의 참사검(斬邪劍), 여동빈의 순양검(純陽劍) 이 대표적이며 현재에도 도교의 도사들은 목검을 써서 귀신을 물리친다.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에서도 죽은 사람은 칼을 쓴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장군거리에 사용하는 장군칼, 칠성거리에 사용하는 칠성칼등이 굿거리에 등장하며 무당은 자신의 영험을 실은 대신칼을 사용한다.
2) 인(寅), 진(辰) : 하늘의 양기(陽氣)
사인검 제작에 담긴 가장 또 하나의 중요한 상징은 바로 인(寅)이 들어간 날에 극양의 기운을 받아 만든다는 점이다. 조선의 사인검은 반드시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를 기다려 12년마다 한 번씩 만들어졌으며 이 때문에 사인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인년 인월에는 인일(寅日)이 몇차례 있지만 양기가 가장 왕성하다는 첫 번째 인일(寅日), 상인일(上寅日) 에만 사인검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굳이 참사검은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만드는 것일까? 사실 조선의 참사검은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만들어진 삼인검(三寅劍)도 존재하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삼진검(三辰劍)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는 진년(辰年), 진월(辰月), 진일(辰日), 진시(辰時)에 만들어진 사진검(四辰劍)도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인(寅)과 진(辰)은 모두 음양 오행상 양(陽)에 해당되며 특히 인(寅)은 양(陽)중에서도 씨앗 속의 양기가 밖으로 막 빠져나오는 순간의 양(陽)이며 진(辰)은 밖으로 빠져나온 양기가 활발히 일어서기 시작하는 시기의 양(陽)이다. 주역에 따르면 모든 기운은 가득차면 이내 기울기 때문에 인(寅)이나 진(辰)처럼 처음 생성되는 시기의 양(陽)이야 말로 가장 순수한 진양(眞陽)이며 양(陽)으로서의 기운도 강한 것이다. 참사검이 음기(陰氣)로 이루어진 요귀를 물리치려면 순양(純陽)의 기운을 가져야 하며 따라서 양이 가장 강한 이 날에 참사검을 만드는 것이다. 인일(寅日)에 양의 기운이 강해진다는 믿음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서 《포박자(抱朴子)》 등섭편(登涉篇)에는 부적을 만들 때 양의 기운이 강한 인일(寅日)을 택하여 양(陽)의 기운을 상징하는 붉은 색 글씨로 쓴다고 하였다. 또한 중국와 우리나라에서는 인불제사(寅不祭祀)라 하여 인일(寅日)에 제사를 지내거나 귀신에게 빌지도 않았는데 이는 인일(寅日)에 양의 기운이 강하여 귀신이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성수문(星宿紋)
사인검에는 대부분 북두칠성이나 동양의 고대 별자리중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28 성수(星宿)가 새겨져 있으며 이는 사인검의 핵심 상징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북두칠성은 북극성의 바로 옆에 국자 모양으로 늘어서있는 일곱개의 별이고 28성수(星宿)는 적도대(赤道帶)를 28구역으로 나누어 각각을 하나의 별자리로 구성한 것이다.
북두칠성과 28수를 새기는 것은 모두 칠성신앙의 표현이며 결국 같은 의미를 지닌다. 고대로부터 북극성(北極星)은 북극의 하늘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으면서 수억개의 별을 지배하는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원시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도교에서는 원시천존(元始天尊),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이 북극성에 머물러 천계(天界)를 지배한다고 보았다. 북극성과 그 자리에 머물러있는 천신(天神)은 북두칠성을 다스리며 이 북두칠성을 통하여 28수 300의 성좌와 1,460개의 별 모두를 다스린다. 따라서 북두칠성을 새기거나 28수를 새기는 것은 모두 천제의 힘과 지배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늘과 별의 정기를 칼에 받아서 신령스러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나타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김유신 편을 보면 김유신은 처음 태어날 때 등에 칠성문(七星紋)이 있었는데 그것은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은 표시라고 하였다. 또한 그가 열박산(咽薄山)에 들어갔을 때 천관신(天官神)은 허숙(虛宿)과 각숙(角宿) 두개의 별에서 빛을 내리어 그의 검에 신령한 힘을 불어넣어주었다고 한다.
위의 사인검에 새겨진 28수의 별자리 이름은 각각 다음과 같다.
<東方七宿>
각(角) 항(亢) 저(?) 방(房) 심(心) 미(尾) 기(箕)
<西方七宿>
두(斗) 우(牛) 여(女) 허(虛) 위(危) 실(室) 벽(壁)
<南方七宿>
규(奎) 루(婁) 위(胃) 묘(昴) 필(畢) 자(?) 삼(參)
<北方七宿>
정(井) 귀(鬼) 류(柳) 성(星) 장(張) 익(翼) 진(軫)
4) 주문(呪文)
사인검에는 칼에 신령한 기운을 불어 넣기 위해서 한문으로 주문이 새겨넣는 경우가 있는데 검의 명칭을 제외하고 총 24자의 한자가 전서체로 입사(入絲)되어 있다.
한 사인검에 들어간 내용을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四寅 斬邪劍
사인 참사검
乾降精 坤援靈 日月象 岡?形 ?雷電
하늘은 정(精)을 내리시고 땅은 영(靈)을 도우시니 해와 달이 모양을 갖추고 산천이 형태 이루며 번개가 몰아치는도다.
運玄坐 推山惡 玄斬貞
현좌(玄坐)를 움직여 산천(山川)의 악한 것을 물리치고 현묘(玄妙)한 도리로서 베어 바르게 하라.
위의 문장은 명문에 두 부분으로 나뉘어 적혀있는데 앞 부분의 15자는 음양 오행의 이치를 설파하는 부분이며 뒤의 9자는 직접적인 벽사(僻邪)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앞부분을 살펴보면 이는 《주역(周易)》의 8괘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양(全陽)에 해당하는 건(乾)은 곧 하늘을 나타내며 전음(全陰)에 해당하는 곤(坤)은 곧 땅을 의미한다. 건(乾)과 곤(坤)은 각각 일월의 정(精)과 산천의 영(靈)을 낸다. 그리고 아버지에 해당하는 건(乾)과 어머니에 해당하는 곤(坤)이 만나면 ‘맏아들’에 해당하는 뇌(雷)가 가장 먼저 태어나는 것이다. 앞부분의 15자는 이렇듯이 《주역(周易)》의 8괘중 건, 곤, 뇌의 세가지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사인검이 구축(驅逐)하고자 하는 산천의 삿된 요귀들이 모두 곤(坤)으로부터 비롯된 음기(陰氣)임을 밝히고 하늘의 양기(陽氣)로써 이를 물리치는 도리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의 9자중 첫머리에 나오는 현좌(玄坐)란 원시천존(元始天尊), 옥황상제(玉皇上帝) 혹은 현무대제(玄武大帝)가 머무는 북방의 하늘을 의미하며 현좌를 움직인다는 것은 사인검으로 이들 천신을 마음을 움직여 힘을 빌린다는 의미이다. 다음 구절의 퇴산악(推山惡)은 ‘산과 같은 악을 물리친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사인검이 구축(驅逐)하고자 하는 대상이 산과 같이 어마어마한 악령이 아니라 숲속의 풀과 돌 등 미물의 음기(陰氣)가 뭉쳐서 생성되는 요귀(妖鬼)들인 만큼 산(山)과 같은 악(惡)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조금 어색하다. 그보다는 사인검의 제작 목적을 고려하여‘산천(山川)의 악한 것들을 물리친다’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지막 구절의 현참정(玄斬貞)은 현(玄)으로 악한 것들을 베어 바르게 한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현(玄)이란 음(陰)도 아니고 양(陽)도 아닌 것으로서 깊고도 깊으며 현묘한 도리, 즉 도(道)를 의미한다. 정(貞)은 단순히 바르다는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주역(周易)》에서는 정(貞)을 건(乾)이 갖는 네가지 덕중의 하나로 설명한다.
양(陽) - 음(陰)
건(乾) - 곤(坤)
하늘 - 땅
정(精) - 령(靈)
일월(日月) - 강전(岡?)
현좌(玄坐) - 산악(山惡)
사인검(四寅劍) - 요귀(妖鬼)
결국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사인검의 명문은 《주역(周易)》과 도교(道敎)의 우주관을 담고 있으며 음양(陰陽)의 원리를 따라서 산천(山川)의 음기(陰氣)가 뭉쳐서 생성되는 요귀(妖鬼)를 하늘의 양기(陽氣)가 담긴 사인검으로 제거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져있다.
5) 부적(符籍)
사인검의 칼자루 중에는 도교의 부적이 새겨진 것이 일부 존재한다.
《설문》에 부(符)는 곧 [信也。漢制以竹,長六寸,分而相合]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군주가 장수에게 보내는 대나무로 만든 신표이다. 이 부적이 귀신을 쫓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후한 시대이며 특히 장각의 태평교(太平敎)와 장릉(張陵)의 오두미도(五斗米道)에서 이 부적으로 백성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사인검에 그려진 부적의 구성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면, 참(斬)자는 벽사부(?邪符), 제마사부(除魔邪符), 진살령부(鎭殺靈符) 등에 쓰이는 전자(纏字)로서 삿된 것을 베어 없앤다는 의미이며 정(正)자는 원래 북두성의 다른 이름인 강(?)자의 변형이다. 일(日)자는 해와 양(陽)을 상징하기도 하고 불을 다스리는 조왕(?王)을 상징하기도 한다. 출(出)자는 요귀에게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이다. 부적 아랫 부분의 받침은 좌우봉명(左右奉命) 이라고 하여 부적의 명을 받들어 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사인검에 새겨진 부적은 퇴마(退魔)와 제사(除邪)를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범어진언(梵語眞言)
일부 검신에는 범어 혹은 티벳 문자로 불교의 진언이 새겨져있다.
대표적인 것이 '옴마니반메훔(Om mani padme hum)'인데 이는 불교의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다. 이 진언은 반드시 불교에서만 사용되는 진언은 아니며 고대의 인도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육자진언은 '온 우주(Om)에 충만하여 있는 지혜(mani)와 자비(padme)가 지상의 모든 존재(hum)에게 그대로 실현될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되지만 그보다는 그 자체가 우주의 울림이며 진동이다. 불교의 진언은 도교에서도 수용되어 범음(梵音)이라고 불리웠으므로 이를 직접적인 불교적 주술 수단의 이용으로 보기는 어렵다.
7) 기타 문양
사인검에는 연화문, 화염보주문, 여의두문, 길상초문등으로 해석되는 다양한 불교 계통의 문양이 새겨져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양들을 반드시 불교적인 상징으로만 이해하기는 곤란하며 불교에서 비롯되었으나 조선에서 토착화된 길상 문양으로서 사인검을 장식하는데 이용되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옳겠다.
5. 사인검의 기원
1) 도교와 사인검
종합적으로 볼 때 사인검 제작의 전통은 도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검(劍)은 도교의 제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도교의 전설 속에는 현천상제(玄天上帝)의 칠성검(七星劍), 장릉의 참사검(斬邪劍)등 사인검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신령한 검이 등장한다. 도교의 전설상에 나타나는 벽사용 검을 살펴보면 사인검의 유래와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가) 현천상제(玄天上帝)의 칠성검(七星劍)
동양에서는 하늘의 북쪽 끝 북극성이 있는 자리에 자미원이라는 곳이 있고 그 곳에 옥황상제가 살고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옥황상제는 도교에서 그리 오래된 신이 아니다. 원래 도교의 최고신은 인격성이 그리 강하지 않은 원시천존(元始天尊) 이었으며 옥황상제는 송나라 이후에야 최고신으로 등장한다. 현재 도교에서 옥황상제가 살고있다고 믿는 북극성에는 원래 당나라 시대 까지만 해도 현천상제(玄天上帝), 현무 대제(玄武大帝), 진무대제(眞武大帝), 혹은 북극진무현천상제(北極眞武玄天上帝)라고 불리우는 신이 살고 있었다. 현천상제(玄天上帝)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무당산(武當山)에서 수도를 하여 깨우친 후 북극성에 올라 신이 되었는데 칠성검(七星劍)을 들고 북두칠성을 다스리며 인간의 죽음을 주관한다. 하늘의 사방에는 각각 별도의 천신이 존재하였지만 역시 북극성이 하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네명의 천신 중에도 현천상제(玄天上帝)의 힘이 가장 강력하다고 믿어졌고 지금까지도 중국에서는 현천상제(玄天上帝)를 널리 모시고 있다. 이 현천상제(玄天上帝)의 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일설에는 현천상제가 여동빈에게서 빌린 칠성검(七星劍)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 칠성검의 본명은 구성벽마참사검(九星?魔斬邪劍)으로 원래 아홉개의 별이 달려 있었으나 현천상제가 칼을 뽑는 과정에서 두개의 별이 떨어져 나가서 칠성검(七星劍)이 되었다고 한다. 현천상제의 칠성검은 북두칠성을 검으로 상징화한 것으로서 이 북두칠성을 통하여 28수 300의 성좌와 1,460개의 별을 다스리는 신비한 힘이 나타나는 것이다. 조선의 사인참사검은 그 이름이 현천상제(玄天上帝)의 칠성벽마참사검(七星?魔斬邪劍)에서 유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검의 표면에 북두칠성과 28수를 새김으로서 그 의미와 상징성까지 같아지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나) 장릉(張陵)의 참사검(斬邪劍)
현천상제의 참사검이 전설상의 검이라면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최초의 참사검은 도교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장릉(張陵)이 옥황상제로부터 받았다는 참사검(斬邪劍)이다. 장릉(張陵)은 장도릉(張道陵), 장천사(張天師)라고도 불리며 후한(後漢)말에 사천(泗川)에서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창시한 도교의 개조(開祖)이다. 그는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의 오의(奧義)를 깨우치고 백성들의 병마를 치유하여 교세를 모았으며 그의 손자 장로(張魯)에 이르러서는 독립적인 종교국가를 세웠다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듯이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항복하였다. 도교의 전설에는 이 장릉(張陵)이 사천성에 있을 때 옥황상제가 그에게 옥책(玉冊)을 내려주었고 이에 그가 하늘로 날아올라가 옥황상제에게 감사를 표시하자 옥황상제는 다시 그에게 참사검(斬邪劍) 두자루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송나라 이후에 원시천존 대신 최고의 신으로 등극한 옥황상제는 북극성이 있는 자미원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원래 그자리에 있던 현무대제의 특성을 상당 부분 이어 받았다. 따라서 옥황상제가 장릉(張陵)에게 준 참사검은 현무대제가 사용하던 칠성검과 같은 성격의 검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장릉(張陵)은 이 칼을 그의 아들 장형(張衡)에게 주어 마귀와 요괴를 쫓고 백성을 구하도록 하였으며 이로 인해 장형(張衡)이 아버지를 이어 교주가 된다. 따라서 장릉의 참사검 또한 하늘의 힘을 빌어 요귀를 처단하는 신령한 검이며 이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초월적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장릉의 아들 장형(張衡)은 교주 승계의 표시로 참사검이라는 이름의 검을 아버지로부터 실제 이어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속선전(續仙傳)》에 따르면 장릉(張陵)은 나중에 등거사(鄧去奢)에게도 나타나 두자루의 참사검을 주었다고 한다.
다) 현대 도교의 법검(法劍)
현천상제의 칠성검에서 비롯되어 장릉의 참사검으로 이어진 벽사용 신검의 전통은 그 이후로도 도교의 전통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국 남조(南朝) 때 편찬된 《동현령보도학과의(洞玄靈寶道學科儀)》의 「작신검법품(作神劍法品) 에는 제사용 검의 제작 방법이 나오는데 여기에도 [在劍身刻以斗星星象]이라고 하여 북두칠성을 검신에 새긴다는 내용이 있다. 현대의 중국 도교 의식에서는 주로 복숭아나무로 만든 도부검(桃符劍)을 사용하는데 도사(道士)는 이 검으로 천장(天將)을 부르고 사악한 힘을 몰아낸다. 유과용검(幽科用劍)은 철제 쌍검으로서 도부검과 마찬가지의 용도로 사용된다.
2) 칠성신앙과 사인검
사인검은 도교의 영향을 받아서 제작된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사인검의 전통이 전적으로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에 도교가 도입된 것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7년(624년)의 일이며 이 때 처음으로 당(唐)나라 고조(高祖)가 고구려에 도사를 파견하여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도덕경(道德經)》을 강론하게 하였다. 하지만 도교의 도입 이전에도 우리나라에는 이미 칠성신앙이 존재하였다. 상고시대의 고인돌과 암벽 그림에는 북두칠성으로 해석되는 별자리가 새겨져있으며 《삼국지》 위지(魏志) 예전(濊傳)에 ‘예족(濊族)은 성수(星宿)에 효통(曉通)해서 연중 풍작을 예지하였으며 10월에 제천행사(祭天行事)를 해마다 행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지금까지 약 20여기의 고구려 고분에서 성수도가 발견되었으며 4세기 경에 만들어진 고분 속에서 나온 초기의 별그림들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따라서 칠성신앙은 도교 도입 이전에도 이미 우리나라에 존재하였으며 그 원형은 아시아 북방 민족이 공유하는 천문 숭배 신앙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뿌리 깊은 전통은 도교의 전래로 인하여 보다 강화되었고 불교가 도입된 이후에는 칠성각(七星閣)을 통하여 사찰 내로 흡수되었다. 불교가 전파된 모든 나라들 중에서 유독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는 칠성각에는 중앙에 금륜보계치성광여래불(金輪寶界熾盛光如來佛)을 모시고 좌우에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모셨으며 그 밖에 칠성여래(七星如來)와 3태 6성 28수(三台六星二十八宿)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중에 칠성여래는 북두칠성을 상징하고 주불인 금륜보계치성광여래불(金輪寶界熾盛光如來佛)는 다름아닌 북극성을 상징한다.
이렇듯 하늘의 성신(星神)을 섬기는 칠성신앙은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이며 북극성과 북두칠성으로 상징되는 천신의 힘을 빌어 사악한 요귀를 몰아내려는 사인검 또한 우리민족 고유의 성신 숭배 신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6. 결어
사인검(四寅劍)은 조선왕조 500년간 왕실의 안녕과 평안을 빌기 위하여 제작된 신령스러운 칼이다. 사인검(四寅劍) 제작은 우리나라 고유의 칠성신앙(七星神仰)과 중국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으며 동양의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과 성신(星神) 숭배(崇拜) 사상이 투영됨으로써 한 토막의 쇠덩어리는 비로소 신비로운 힘을 지닌 보검(寶劍)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이제 비록 산속의 요귀들은 모두 사라지고 물속에는 이무기가 없지만 사인검(四寅劍)은 여전히 우리나라의 전통 공예 기술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자 동양의 종교와 철학 사상을 농축적으로 담고 있는 신물(神物)로서 존재한다. 필자는 이러한 소중한 문화유산이 학자들에 의해 좀 더 깊이 있게 연구되고 장인(匠人)의 손에 의해 복원되기를 기대하며, 한편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맞이하며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는 현대의 한국인에게도 사인검(四寅劍)의 영험한 힘이 작으나마 위안거리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참고문헌
- 周易, 崔完植 譯解, 惠園出版社
- 莊子, 金達鎭 譯解, 高麗苑
- 淵海子平精解, 沈載烈 講述, 明文堂
- 朝鮮의 鬼神, 村山智順, 民音社
- 符籍大辭典, 오현리, 東學社
- 國譯朝鮮王朝實錄, CD-ROM, 서울시스템
- 三國史記
- 三國誌
- 道敎槪況, 李養正
- 道書全集, 道學術資訊網站首頁, http://www.ctcwri.idv.tw/
- 天師世家宗譜, 道學術資訊網站首頁, http://www.ctcwri.idv.tw/
- 道敎文化資料庫 http://www.taoism.org.hk/
- 육군박물관 도록/ 육군박물관 2002. 12.
- 도검의 기능성 연구 / 김성혜·김영섭/육군 박물관 학예지 제6집/ /1999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