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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적 사랑과 타자에 대한 감응
-안준철 시집 《별에 쏘이다》중심으로
박철영
1. 덜 기호적인 의미언
안준철 문학의 화두는 단연코 사랑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의 대상은 특정한 곳에 한정되어 발현하는 것이 아니다. 즉자적 사물이 곧 사랑의 대상이 되고 심성은 물성에 이내 닿아버린다. 물심일여物心一如의 본성은 사랑이고 그것에 대한 반응은 항상 외 방향적이다. 대상의 반응과 관계없이 스스로 반응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주체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경우를 '또 다른 주관성'으로 규정한다면 그 존재에 의해 다른 세대와 단절을 완화하거나 우회할 수 있는 주요한 비상통로라는 메를로 퐁티의 주장대로라면 ‘원초적 의사소통’의 방편에 이를 것이다. 그렇기에 안준철 시에서 표현 미학의 언어는 덜 기호적이면서 직유적이다. 그런 사랑에 대한 사유는 세월의 더께에도 낡음으로 대체되지 않고 오랫동안 안준철 시인의 시작詩作 전반에 하나의 장르로써 완강함을 보여준다. 세 번째 시집 《세상에 조촐한 것들이》 이후 8년여의 공백을 두고 나온 네 번째 시집 《별에 쏘이다》에서는 사랑에 관한 생명력과 사유는 더 깊고 넓어졌다. 그 사랑은 항상 슬픔처럼 빈번하게 수식어로 쓰이다 이내 주어의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안준철 시를 논하기 전 슬픔은 사랑과 어떤 관계일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양자의 상관성을 숙고하면서 그것은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전제가 슬픔인가 의혹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궁극이 특정되지 않는 사람들과의 소통에 방점을 둔다면, 김수영이 말한 것처럼 “진정한 시는 자기를 죽이고 타자가 되는 사랑의 작업”이 분명하다. 그 의미는 확장이 아니더라도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하고 당연한 것이다. 시도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수행의 한 방편이라면, 서정의 편향이어도 어쩔 수 없다. 안준철 시에서는 교사로서의 엄숙함을 배제한 무의식의 감성 세계를 기꺼이 표출한다.
2. 심리적 기저의 반응들
인기척에 놀란 듯
갈대숲에서 껑충 뛰어나와
눈 깜짝할 사이 들판을 가로질러
시야에서 멀어진 뒤에야
나 또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호> 부분
아마 순천만의 새벽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흩어진 새벽의 고요에 놀라 풀숲에서 뛰어나온 수달이나 노루와 마주친 순간으로 상상을 추정케 한다. 누구에게나 당황스러운 일은 일어날 수 있고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시인에게 소소한 일이 될 수 없는 것은 슬픔 같은 그리움을 타고난 여린 심성 탓이기도 하다. 오히려 자신 때문에 그 짐승을 놀라게 한 것이 못내 미안스러울 뿐이다. 어둠 속 그리움 같은 풍경 속으로 쓸쓸히 사라져가는 짐승의 뒷모습을 보며 슬픔 같은 연민이 가슴에 남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나쁜 의도가 없었지만, 그 짐승에게는 생명의 존재 지속에 대한 위협의 일말을 제공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인 자신도 짐승들처럼 무한 경쟁 사회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항상 견제되거나 상실할 위험이 잠복하여 있다는 심리가 은연중 자기 보호 본능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다. 서로가 어찌 보면 위로받거나 보호받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 “나도 어린 짐승일 뿐”인데 “엉덩이가 외로워 보이는 짐승을 향해” 되려 놀란 가슴을 숨기기 위해 장난삼아 포수의 자세를 취한 것이 못내 미안스럽다. 그런 위협적인 자세보다는 그 짐승을 해치지 않겠다는 “어떤 약속의 신호도 없이/속수무책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시인이다. 일상의 행위를 무심하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빚어진 행위에 대하여 성찰의 한 방편을 단단히 삼고 있다. 그래서 비록 황망히 놀라 떠나간 짐승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여도 마냥 슬픈 것은 아니다. 시인의 가슴에는 그마저 “하얀 깃발 같은” 사랑의 표식을 달았으니 말이다. 그런 일상은 매번 시를 통해 시 이전까지 내면화를 거쳐 발화되며 기록된다. 고적한 <산길에서>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등산로에서 오줌을 보다 순간 근처에서 꿩이 날아오른다. 이내 산길이라는 곳이 사람만이 사는 영역이 아님을 인지한다. "왜 나는/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까"라며 반성한다. 그 영역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경계를 허물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뿐임을 알게 된다. <슬픔>에서 시인은 기차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기차가 논산을 지날 무렵/일흔 안팎의 할머니가 옆자리에 앉으시고/당신의 딸처럼 보이는 마흔 안팎의 아낙은/입석표를 끊었는지 통로에 비스듬히 서서/노모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발밑에 두었던 가방을 수습한 뒤에/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아낙을 노모 곁에 앉히고는/통로를 걸어나”오는 시인을 상상해본다. 그러고서 한참이 지난 뒤 두 모녀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은 “내 안에 찾아온 슬픔이 한 일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두 모녀를 통해 시인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과거를 회상했을 것이다. 상황만 다를 뿐이지 그 모습은 바로 자신의 기억에 내장된 아픈 추억의 한 부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세월이라는 나이를 먹어가며 쓸쓸하도록 슬퍼지는 것들이 유독 눈에 성글어진다. 그 두 모녀를 통해 닮은 듯한 삶을 반추하면서 하루 동안의 관계된 일상을 시라는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 영역은 <손님>이라는 꿈으로도 여지없이 사실처럼 이어진다. 꿈은 무의식의 메커니즘이라는 용어를 빌지 않더라도 프로이트나 칼 융의 해석에서 말하는 전위, 압축, 분열, 투사 중 딱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어도, 결국은 안준철 시인에게 억압된 무의식의 한 일면이 투사의 유형으로 치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슬픈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깰 때가 있다
이런 날에는 꿈에서 깨어나도
슬픈 감정이 몸 어딘가에 앙금처럼 남아있다
오래전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수채화처럼 마음에 번진 적 있는
무명빛 서러움이 거기에 배어 있다
어린 시절, 겨울이 막 시작 될 무렵
풀 먹인 무명 이불의 까실한 감촉이 좋아
따뜻한 이불 속에 있다가도
차가운 이불 홑청을 매만지곤 했던 것이다
슬픔이 다녀간 곳에는
빛이 스러져간 별자리처럼
맑고 투명한 얼룩이 남아 있다
오늘도 손님처럼 찾아온 슬픔을
아침이 올 때까지
잘 대접하여 보내주었다
-<손님> 전문
시인은 일상이 꿈일지 모를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슬픈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깰 때가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흔한 일상이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슬픈 감정’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어린 시절, 겨울이 막 시작 될 무렵/풀 먹인 무명 이불의 까실한 감촉이 좋아/따뜻한 이불 속에 있다가도/차가운 이불 홑청을 매만지곤 했던 것”까지 추억해낸다. '무명 이불'의 까칠한 촉감을 통해 부재한 모성 이미지를 떠올린다거나 그 이상의 울컥한 그리움 같은 슬픔에 전이되어 노출되고 만다. 그것은 이미 시인의 과거 속에서 우울과 슬픔이 견고하게 내성內省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얼룩처럼 가슴에 밴 슬픔이지만, 그렇다고 비이성적으로 타자화되거나 무차별적으로 전위되지 않는다. 무의식 속에 잠재된 의식은 무한 경쟁 시대에 던져진 지식인으로서 그 자체가 슬픔이지만, 단순하게 소화消火되지 않고 분열을 거쳐 투사라는 사랑으로 확장 점화點火 된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애증이 곧 자신에 대한 애증의 결핍에서 오는 것일지라도 보상 심리로 초연해질 수 있다. <인연>에서도 소소한 일상에 대한 경이에서 비롯된다. 단순하게 보면 꿈같은 일상이다. 붉은 해를 안고 저무는 숲에 시선이 멈춘다. 마침 그 숲을 걸어 나오는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의 방향과 시인의 시선이 일치한 것이다. 작은 오해지만, 할머니는 되려 시인을 의식하고 가다 말다를 반복하자 시선이 모호해진다. 그 할머니를 안고 있는 숲으로 지는 놀빛 마저 "그날 단 한번도 마주치지 못하고/허공에서나 만나 얼크러졌을 눈빛들이/어디쯤 날아가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닌지/저 길가에 핀 들꽃은 아닌지" 익숙한 이미지에 대한 사유에 빠져든다. 그런 시선은 일상 속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서정의 시 세계로 인식한 뒤 대상과 동일화를 거쳐 감각의 교감이 심화한다. 그럴수록 작고 소소한 것에 대한 시인의 몫은 당연한 관심거리다.
저것들,
저것들을 뭐라 부르나
밤새
질펀한 사랑을 나눈 듯
지천에 피어난
우선 일 저질러놓고
야트막한 언덕배기에서
살림을 차린 듯
세상 물정 모르는
귀때기 시퍼런
저 철없는 풀꽃들의 지저귐을
뭐라 번역하나
-<개불알풀> 부분
도시라는 일상에서 흔히 잊기 쉬운 것이 도시적이지 않은 것들이다. 기피되거나 소외되어야 마땅한 것들에 대한 시선은 괴롭거나 낯설어서 불편해야 한다. 시인에게는 오히려 그런 것들이 그렇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모든 감각의 대상은 눈을 통해 인지될 때, 길가에 핀 들풀의 꽃도 산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보이는 모든 것이 경이롭도록 아름답게 보인다. 개불알풀에 핀 꽃은 굳이 꽃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작은 꽃이다. 하지만 그 작은 꽃이 가진 물성을 하찮게 지나치지 않는다. 꽃이라는 본성이 그냥 피고 지는 것이 아니듯 “밤새/질펀한 사랑을 나눈 듯/지천에 피어난” 의미는 생명의 존귀함으로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비록 “세상 물정 모르는/귀때기 시퍼런/저 철없는 풀꽃들의 지저귐”이 순박할지라도 그 이전 저 작은 풀꽃이 험난한 세상에서의 존재에 대한 우려가 더 깊은 시인의 순박한 심성은 사랑보다 슬픔에 가깝다. 그래서 그런 일들이 시인의 눈에서는 남의 일이 아니다. <잎새 하나>에서도 그런 시선은 상상으로 다가온다. 길을 지나다 눈에 띄는 잎새 하나가 유난히 요동을 치고 있어 걸음을 멈춘다. "어디 상한 곳이 있나/손끝을 대어 만져 보아도/같은 줄기에 달린 제 동기들과/외양이 달라 보이진 않는다//그렇다면 저 이파리가 유난히 가을을 타거나/아니면 나처럼/시를 쓰는 작자인지도 모르지"라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다가도 못 미더워 손으로 바람을 가려보았더니 이내 잠잠해진 것을 알았다. 순전히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노출된 자연 현상이었다. 그렇지만, 이내 "저 잎새의 흔들림이/그녀의 울음인지 노래인"일 거라며 내면적 상처까지를 상상한다. 만약에 잎새 하나가 흔들린 것이 아니고 나무 전체가 흔들렸다면 상처가 되는 울음으로 인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낯설거나 낯이 익다는 것은 죄다 지나칠 수 없는 슬픔이고 기어이 사랑으로 투사된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할머니가 안고 있는 개에 시선이 멈췄다. <개가 슬퍼 보이다>에서 “-어, 개가 얼굴이 벌겋네!/-눈물을 많이 흘려 그런답니다/-무슨 슬픈 일이 있었나 보지요?” 그냥 지나친다면 친근한 사람의 안부로 들릴 법한 대화다. 대화 속에서 대상을 분별하지 않는 긍정은 놀랄 만치 대단한 일로 사람과 개와의 경계를 관통해 버린다. 그런 삶의 가치가 시인이 품고 있는 사랑의 시학이다.
징검다리를 건널 수 없다
돌다리 서너 개 물에 잠겨 있어
남은 돌들이 멀쩡해도
시방 징검다리는 소통 불능 상태다
내 안에도 징검다리가 있다
물이 닿지 않아 잘 마른 외로움들
그 오랜 수고를 헛되게 하는
젖은 돌도 몇 개 박혀 있다
물이 졸아들어야 돌다리가 드러나듯
이제는 나도 졸아들 궁리를 해야겠다
누구에게는
가 닿지 않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징검다리> 전문
여름 철새인 물총새를 유년기에 본 적이 있다. 화려한 자신의 날개에 새겨진 무늬를 분석하듯 물가 나무에 앉아 오래도록 흐르는 물 안에 비친 또 다른 생명체인 물고기의 유동에 골몰한다. 그런 일상적 습관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듯 풍경과 주의를 교환하는 안준철 시의 진지함에 의미를 부여해본다. 물총새가 한 끼의 배고픔을 때우기 위한 골몰이 아니듯 시인도 동천변 징검다리를 단 한 번 건너는 수단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총새의 골몰이 물 안에서 물고기의 소요에 주의를 집중하듯, 시인도 마찬가지 징검다리를 건너다 물속에 잠겨버린 돌을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쉽게 드러나지 않는 물속의 징검돌 때문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징검다리처럼 시인의 내면에도 누군가에게 닿을 수 없는 징검다리가 있음을 절감한다. 소통 불능의 징검다리와 닮은 그 사랑은 무엇일까. “누구에게는/가 닿지 않는 것이 사랑”이었고 슬픔이었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면서 슬픔의 근원이 된 사랑의 시학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더 궁금했다.
3. 산문적인지만, 더 시적인
시집 이외에도 다수의 산문집이 있지만, 그중에서《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에서 교육자로서 정신의 근간을 보여주는 행간을 건너뛸 수 없었다. <셀렘도 없이 아이들을 만날 뻔했습니다>에서 1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가진 조바심을 엿볼 수 있다. 누구나 만남은 설렘이 분명하다. 그러나 교사와 학생으로서의 만남은 예전 같지 않게 지식 노동에 대한 계약적 의미를 배제할 수 없다. 물론 학생보다는 좀더 우월적 지위를 부여받은 것은 당연하다. 어린 학생들을 잡아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보편성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에 반하는 의식의 교사라면 그때부터 또 다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자초한 업이다. 특히 인문계고교도 아닌 특성화고교라면 더 많은 인내가 요구될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불안한 것이다. 안준철 시인도 그런 일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봄이 왔는데도 나는 봄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어떻게 만날 것인지 갈피
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갈림길에 서서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서성이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었다. 아, 아이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갈
수록 강제에 길들여지고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속내를 털어놓자면,
아이들보다는 나 자신이 무능無能 교사가 되는 것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셀렘도 없이 아이들을 만날 뻔했습니다> 부분
아이들에게 매를 대지 않겠다는 교사의 의지가 자칫 잘못 전달되면 물컹한 교사로 비쳐질 수도 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 이미 내친걸음 임에야 어찌할 것인가. 다른 방도는 없다. 지금껏 해왔던 친절 서약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걸 수밖에, “교사는 학생에게 친절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교사에게 친절하게 대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라며 이러한 권리가 학생 개개인에게 수혜가 되기 위해서는 학생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약속이 이행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임을 각인시켜주고 있다. 철학적이지 않은 사랑이 시인의 정신이면서 교사로서의 근간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런 사랑은 남에게 강요하는 사랑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각성해가며 이뤄내는 사랑으로 실천하고 있다. 사랑은 실천의 의지다. 그 실천의 본성에 자신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시인의 사랑학이다. 사실 욕망이라는 것도 사랑이라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사랑과 욕망은 누가 더 주체적인가의 차이에서 시작되어 결과적으로는 커다란 차이를 낳게 된다. 흔히들 사랑과 욕망을 혼동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욕망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물론 시인도 그런 혼란을 깨닫기까지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학급 내에서 문제 있는 한 아이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면서 보여주는 <‘쉬운 사랑’ 이야기>의 부분을 살펴보자.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지만,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한 기도였다. 제자를 사랑하는 훌륭한 교사가 되기 위한 나를 위한 기도.”였음을 깨닫게 된다. 욕망은 반성을 전제하지 않을뿐더러 타자에 대한 결핍을 긍정하고 만다. 그 결핍은 오로지 타자인 학생의 문제로 남게 된다. 안준철 시인은 그런 학생의 결핍마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실천해간다. 수업 시간 중 크리스티나 이킬레라의 <Beautiful>의 ‘넌 아름다워’라는 가사를 보며 교사로서 제자에 대한 욕망이 아닌 사랑을 확인한다.
“광수야, 눈 떠. 눈 떠라. 선생님이 네 이름을 열 번도 더 불렀을거야. 그때마다
넌 아무런 불평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앉았어. 만약 네가 일어나지 않았
다고 해도 난 널 때리지 않았을 거야. 그걸 넌 알고 있지. 그런데도 넌 선생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어. 넌 아름다워. 넌 충분히 아름다
워.“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부분
에서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학생을 위한 지루한 시간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단지 그 학생은 공부에 집중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 학생이 가진 자아 속 미래의 꿈마저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학생이 무한하게 펼칠 수 있는 아름다운 꿈의 조각들을 퍼즐로 완성할 수 없음을 더 안타까워한다. 교사로서 그 아이에게 자존의 자아를 각성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이라며 하는 말이 학생의 처지가 아니더라도 슬픔으로 번져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다시 돌아가 시집 《별에 쏘이다》에 수록된 시에서 번번이 슬픔은 동일화된 의식의 울림으로 나타난다. <겨우 핀 꽃>에서도 꽃의 형상을 아름답게 보여주지 못한 꽃의 아픔에 몸이 다가간다. "한참을 바라보니/꽃이 형상이 보였다"는 인식은 교사의 본성이었을 것이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꽃의 이미지를 바라보며 그 또한 상처의 응축임을 알게 되고 기꺼운 상처의 개화임을 인식한다. 행동이 느린 <욱현이>한테는 "그의 고요한 눈길이/다시금, 한 장의 카드가 아닌/서른 개의 빈방에 가닿고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슬픔이 절제된 사랑이다. 가끔은 슬픔을 벗어난 사유를 통해 자신을 뒤돌아보는 반성도 마다하지 않는다. <선생 몇이서> 짬이 나 학교 뒷산에 올라 돗자리를 펴고 여가를 즐겼던 것 같다. 그러다 돗자리를 걷어낸 자리가 "다리미로 눌러 다린듯/엉덩이들 깔고 앉은 자리만/고스란히 풀밭이 납작"해진 것을 본다. 그 정도면 반성이 아닌 참회라고 보아야 하고 삶의 일상적 수행이다.
4. 반성을 뛰어넘는 참회의 시학
교사로서 그동안 누군가를 혹시 저토록 짓누르지 않았던가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있다. 매번 일상에서 일어나는 낯선 풍경은 마음속에서 안준철 시인만의 긍정으로 치환된다. 행위에 대하여 부정했던 지난 일들을 반성하고 봉인한 뒤 진정한 긍정으로 나아가려는 참회는 누가 뭐라 해도 바른 실행이다. <살벌한 아이>에게는 반성의 기회를 당장 요구하지 않는다. 얼굴이 곱상한 아이가 벌을 잡아다 토막 내는 것을 보게 된다. 그 학생이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정신적인 고통뿐이 아니라 몸으로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느껴보라며 손등을 꼬집어 주었던가 보다. "그랬더니/살벌한 아이 왈,/내가 벌보다 못하단 말이"냐며 살벌하게 대든 것이다. 이쯤 되면 참회를 회의해야만 옳다. 하지만, 성찰에 이르려는 참회를 멈출 수 없다. <시나브로>는 아이가 스스로 반성하며 변화하는 과정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선생님, 인생은 한 방입니까?//아무 문맥도 없이 날아온 질문이/조금은 귀찮기도 하고/조금은 재밌기도 해서/아이의 손을 잡고 창가로 가/이렇게 되물었다//"저기 저 나뭇잎들이 한 방에 물이 들더냐?/시나브로 물이 들더냐?"". 참회는 심리적으로 깨달음의 긍정에 동화되어야 가능하다. 그런 아이의 짓궂은 얼굴과 낯익은 교실 속 풍경을 통해 추구하는 서정은 일상으로 전이된다. <별에 쏘이다>란 시는 유머의 일면이다. 아니라면 신화의 원형이 만들어지는 과정일 수 있다. 부어오른 시인의 눈두덩이를 보며 주변 사람들이 보인 반응에 답한 변통이었을 것이다. 지리산 연하천에서 하늘의 별을 오래 바라본다면 별에 쏘이는 것이 가능할지 모른다. 만약에 그렇다면 사람들은 환상적인 그곳을 경험하려고 찾아갈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그리움의 시원이기 때문이다. 쩡쩡한 지리산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은 오랜 그리움 같은 슬픔일 터이고 안준철 시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그 퇴적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의 본질은 순수한 사랑이고 용기다. 그래서 일상에서 침묵하지 않는 시적 세계는 어디에서나 서정적 동화에 다다른다. 시라는 상징적 발화를 통해 실재한 감각과 교감으로 포용해가는 시인만의 굳은 의지임을 수긍해야 한다.
*
안준철 시인은 1954년 전주 출생으로 전남 순천 효산고에서 30년 동안 영어교사로서 근무한 뒤 정년퇴임을 했다. 소통불능을 호소하는 시대에도 학생들과의 행복한 소통을 꿈꾸며 경향신문, 국민일보, 오마이뉴스, 시사인 등 언론매체에 교육관련 글을 꾸준히 연재해왔다. 제자들의 생일 때마다 써 주었던 시를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를 펴낸 뒤, 교육문예창작회와 한국작가회의 회원 및 순천작가회의 회장을 역임, 활동하면서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등 네 권의 시집과 가족 에세이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교육에세이 <그 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처음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등을 펴냈다.
첫댓글 쑥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고맙기도하고......그 중 고마운 마음이 가장 크겠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어쩔 수 없구만.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시를 쓰고 싶은데 자네가 적절한 시기에 충동질을 해주느만. 철영아우 고마우이!!
무슨 말씀을
오래전부터 들여다보면서 생각했던 것을 해보았습니다
형의 글을 통해 세상사도 새삼 깨닫기도 했습니다
시를 쓴 분도 평론을 쓴 분도 참 멋집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