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분을 읽고 나서(오용욱)
내가 화수분을 읽게 된 계기는 어느 수업 시간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화수분 이라는 책의 이야기를 선생님께서 들려 주셨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화수분 이라는 책 이름을 들었을 때는 그 뜻이 무엇인지 잘 몰랐었다.
특별히 이것 때문에 읽은 것은 아니고 2학기 수행평가 책 목록에 있어서 그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수행평가 책 목록 중에서 화수분이라는 책을 바로 집에서 찾아 읽게 되었다. 화수분이란 재물이 자꾸 새끼를 쳐서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 아니한다는 보통 명사 이다. 그리고 이 화수분이라는 책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로도 쓰인다.
화수분이란 작품의 배경은 일제의 수탈이 날로 가속화 되어 경제적으로 궁핍하던 시대를 나타낸다. 먼저 화수분이란 사람은 그 이름의 뜻과는 다르게 못 배우고 가난 하지만 마음씨는 순박한 사람이다. 그리고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 그에게는 부인과 딸 이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소설 속 화자인 화수분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느 날 밤 행랑아범인 화수분의 통곡소리를 듣는 것부터 시작된다. 소설 속 관찰자인 나는 평소에 행랑아범인 화수분을 불쌍하게 여기고 있었다. 통곡소리가 들린 다음날 알아보니 화수분의 부인은 매일 쌀을 팔러 다녀서 쌀가게 주인을 잘 알았고 때때로 같이 앉아 이야기도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정을 하소연 하자 쌀가게 주인은 그렇게 살 바에야 딸을 다른 집으로 보내는 게 낮지 않겠는가 하고 물어 보았다.
그리고 화수분의 부인은 고민 한 끝에 딸을 다른 집에 맡겨 버렸다.
그래서 그날 밤 그것을 안 화수분이 그렇게 통곡을 한 것이었다.
그런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화수분은 나를 찾아와 자신의 형인 거부가 발을 다쳐 시골에 내려가 추수라도 해주고 와야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겨울이 지나기 전까진 와야 한다고 다짐 받고 행랑아범을 떠나게 했다.
그렇지만 한겨울이 지나가는데도 화수분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부인은 편지를 보내고 결국엔 어린 딸과 화수분을 데리러 가게 된다.
한편 화수분은 너무 일을 많이 하여 앓아눕게 된다. 그리고 가족에게서 온 편지를 보자 바로 일어나서 가족이 있는 집으로 향하게 된다.
한 100리 즈음 왔을 때 어느 고개를 지날 때 추위에 떨며 웅크리고 껴안고 있는 부인과 딸을 보았다.
그리곤 가서 와락 끌어안았다.
다음날 아침 끔찍하게도 화수분과 그의 아내는 동사체가 된 채 발견되고 어린 딸만이 부모의 체온에 의지해 살아나 있었다. 이야기는 대강 이렇게 끝나게 된다.
처음 내가 이 책 제목을 들었을 땐 화수분이란 단어의 뜻도 몰랐기 때문에 책의 내용이 상상이 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렇게 책을 한 장씩 보니 책제목을 보고 책을 보는 것과는 다른 즐거움이 있는 것 같았다. 책의 제목을 보면 대강의 책의 내용을 알게 되고 읽지만 화수분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의 첫 부분에 나온 화수분이란 뜻을 듣고는 비로소 책 내용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수업시간에 얼핏 듣기로 이름이 반어적으로 표현 됐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예상대로 화수분이란 사람은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고 있었다.
처음 화수분의 부인이 자신의 딸을 다른 집으로 보냈을 때 나는 왜 부인이 화수분과 의논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딸을 다른 집으로 보냈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잘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그리고 화수분이 왜 자신의 딸을 그렇게 사랑한다면 다시 찾으러 가지 않았는지도 궁금하다.
단편이라서 자세히 나오지 않았을까 아니면 집이 궁핍해서 차라리 그게 낳을 것 같아 데려오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화수분과 부인이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하여 죽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헌신적인 사랑에 감동 했고 나도 나중에 그럴수 있을까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는 소설 인 것 같았다. 저런가난 속에서도 저렇게 자식들을 사랑하며 지키려고 하는 노력이 정말 감동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