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욕적, 정신적 몰두를 수련하면, 바로 그 수련이 인간 내면에서 정신세계를 관조하는 힘으로 바뀐다(신지학, 2020, 236)."
물질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물질만 보고 살게 된다. 정신은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거의 전부이다. 그래서 마치 서커스에서 줄을 타는 것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쪽으로 가면 정신이고, 저족으로 가면 물질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제는 나의 영혼이 정신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의 영혼이 정신으로 향할까가 질문이다.
인간이 물질세계에서 살지만, 물질 이면의 정신이 드러나지 않아서 통상 물질로 촉수를 드리우게 된다. 그러므로 정신을 파악할려면 자신의 내부에 아주 집중해야 한다. 일례로 요즈음 거리에서 비만인 젊은 청년들을 자주 보는데, 그 청년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 청년들의 영혼이 물질로 향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영혼은 현 상태에 매몰되는 것이 속성이다. 따라서 패스트푸드를 먹으면 영혼은 그 맛과 하나가 된다. 패스트 푸드 같은 음식은 자극적이어서 중독이 되기가 쉽다. 영혼이 그 맛을 기억, 중독이 되는 것이다. 이때 자아가 영혼의 촉수를 정신으로 돌리면, 영혼이 그 맛에서 헤어 나올수가 있다. 영혼이 헤어 나와야 그 맛에서 벗어나기 때문인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비만이 된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이것이 아주 짧은 시간인 것 같지만, 내부 무의식에서는 오랜 시간 (무의식의) 자아가 계속 메세지를 보냈을 것이다. 상속의 자아가 물질에 촉수를 드리웠기 때문에, 당연히 비만 청년은 이 메세지를 듣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아주 작은 이 차이가 젊은 청년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정신이 물질을 이끈다는 말이다. 청년이 비만이 되면 취업에도 지장을 준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를 깨우쳐주고 싶으나, 이 또한 청년이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되풀이 하지만 청년의 영혼이 메몰되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정신은 스스로 깨닫거나 스스로 받아들여야만 변화가 온다. 만약 청년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경우에 처할지 모르기 때문에 누군가로 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신은 언제나 물질과 함께 한다. 내가 물질을 보지만 정신도 함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못보는 것이다. 사실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 이와 같이 정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삶이 나아가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정신을 보느냐가 질문이다. 첫 번째는 늘 자신의 내부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삶에서 의문이 드는 경우에는 내부에 집중하면 -반드시- 길을 일러준다. 인연, 책, 정보 사람 등등을 만나게 해 주어서 해결을 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정신이 어떤 경우에도 드러내어서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계속 가기가 굉장히 어렵다. 이때 필자는 가만히 내부에 귀를 기울여 보았더니, 내부 무의식에서 긍정의 느낌이 흘러나왔다. 틀리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 계속 갈수가 있었다. 이런 느낌 역시 굉장히 애매모호해서 파악하기도 역시 어렵다. 정신세계에 가는 길에 관한 책(슈타이너)을 읽어서 그 느낌도 파악할 수가 있었다. 더불어 정신세계가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현재 내가 정신세계에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정신세계에 관한 책을 읽으면 자신의 수준도 알 수가 있고, 정신세계로 가는 길에 길잡이도 되어준다. 책을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생각을 하면, 자신의 정신이 이를 받아들여서 정신세계로 향한다. 정보(지식)의 이면이 정신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이 사고작용이다. 내가 하는 사고작용이 곧 정신 작업인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가 정신세계로 가는 길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다.
필자는 학교생활을 하면서 항상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지식이 나오는 곳이 어디인가'였다. 처음에는 머리 속에서 나오는 듯해서 실험도 해보았는데, '결과는 알 수가 없다'였다. 우리 모두가 책을 읽고 공부를 하지만, 만약 지식이 나오는 곳(방법)을 안다면, 공부를 하기가 조금은 쉬울 듯하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 공부를 해도 능률이 안 오를 때도 있고, 그렇게 오랜 시간 공부를 하지 않아도 능률이 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종잡을 수가 없다. 이를 통상 재미(흥미)있게 공부를 하면 능률이 오른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식(학습)은 자아가 정신자아가 되어서 정신세계의 통지, 직관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먼저 자아가 정신자아가 되어야 한다. 자아가 정신자아가 될려면 영혼이 지식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당연히 재미있어야 영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다음 사고작업이다. 이 작업은 오성혼이 한다, 그리고 나아가 의식혼이 정신세계의 통지를 받아와야 한다. 이 통지를 영혼이 기억하고, 자아가 받아들이면 자아가 정신자아가 되는 것이다. 지식을 탐구할 때 오성혼의 작업에 그치는지, 의식혼까지 연결되는지에 따라서도 자아가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 이것이 능률이 오르는 차이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에테르체가 진화한다. 이런 에테르를 생명에테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노래를 잘 부르면, 듣는 사람이 감동을 한다. 그것은 부르는 사람의 에테르체가 진화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에테르체가 여기(진화한 정도)에 맞게 진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더 나아가면 인간의 몸이 변한다. '정신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횡경막이 호흡을 일정하게 내도록 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은 건강한 몸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진화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 에테르체, 감각혼, 오성혼이 물질세계에 속하고, 정신자아, 생명인간, 정신인간은 정신세계에 속한다. 가운데에서 정신세게와 물질세계를 연결하는 존재가 영혼이다. 그리하여 항상 자신의 영혼의 촉수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만약 물질세계에 놓여있다면, 정신세계로 향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즉 무엇을 하더라도 정신세계에 자신이 존재하게 해야 한다. 밥을 먹더라도 맛있는 밥에 초점을 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신에 초점이 가있는가하고 점검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맛없는 밥을 먹으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그 차이를 파악하자면 정신을 파악해야 진정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결론으로 지식이 나오는 곳은 정신세계이고 그 지식을 가져오는 존재가 정신자아이다. 이는 영혼이 노력해서 자아가 정신자아가 되어야 한다. 그럴려면 언제나 자신의 영혼의 촉수를 정신에 두어야 한다. 이 경우 정신이 보이지 않아서 이리저리 헤매이거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경우도 많이 있다. 그 길에서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글귀가 다음 문장이다. "무욕적, 정신적 몰두를 수련하면, 바로 그 수련이 인간 내면에서 정신세계를 관조하는 힘으로 바뀐다(신지학, 2020, 236)." 중요한 것은 정신세계를 관조하는 힘이고, 그 힘이 자신의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되풀이 하지만 비만 청년이 조금만 자신의 내부에 관심을 가졌다면, 삶을 살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비만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다. 자신의 정신을 찾는 일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일과도 같다. 오히려 삶을 살아가는 일이 정신을 찾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거의 대부분 자아가 정신자아가 되기는 커녕 자아가 잠을 자는 듯하다. 만약 자신의 자아를 깨운다면, 자신의 현재 삶이 달라질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았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