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자연 전체에 대해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차세계의 인식으로 가는 길, 2003, 70)."
인간이라면 누구나 정신, 물질의 이면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인간이라면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 물질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이고, 물질세계에서 살아가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도 동의해야 한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인간이라면 정신세계를 반드시 가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컨대 우리 모두가 수행자다. 추구하던 추구하지 않던지 간에 인간이 정신의 길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가는 방법이 서로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하는 경험이 같은 수준의 정신이라면 거의 같다. 문제는 경험을 해야한다는 것인데, 만약 그 경험을 한다면 다른 방법, 과정이라도 이해를 하지만, 경험을 하지 않으면 들어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정신세계의 속성이다. 그래서 인류이래 나온 수많은 글들이 정신을 이해시키고자 나온 것에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필자역시 경험했기 때문에 이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비약하면 '모든 곳에 신이 있다'는 말이다. 어느 날 법상스님의 법문을 듣는데, 과거 산에 꽂혀서 산에 자주 올라간 경험을 말씀해 주셨다. 산에 피는 아름다운 야생화를 보고 감탄했고, 책에서 약초, 독초를 구별하는 것을 찾아서 읽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채취해서 먹었다고도 하였다. 그 당시 법상스님은 거의 매일 산에 올랐다고 했는데, 처음 법문을 들을 때는 누구나 동의하는 수준, 산의 아름다움은 말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인 정도였다. 그런데 그 사실이 슈타이너의 책 속의 내용과 서로 만나서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드디어 정신을 이해한 것이다.
이는 법상스님의 법문이 필자의 마음 속에서 계속 되뇌였기 때문인 듯하다. 필자의 마음 속에서 이렇듯 되뇌일 수 있었던 것은 법상스님이 깨달은 분이기 때문이다. 깨달은 분의 자아, 법상스님의 자아가 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상을 벗은 필자의 자아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자아가 현실에서는 무의식이므로 필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때 다른 사실(법문), 새로운 사실이 추가되면서 그 사실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깨달은 분의 말씀이나 법을 설해 놓은 책을 통해서 깨달음에 다가갈 수가 있기 때문에 법문이나 법을 설해놓은 책을 읽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자아는 깨어있는 의식에서는 상속에 있다. 꿈꾸는 의식에서 자아는 꿈을 꾸며, 잠자는 의식에서 자아는 잠을 자는 무의식 상태이다. 이런 상태의 자아가 현실에서 상 속에 있지 않은 자아를 만나면, 무의식의 자아가 영향을 받아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법문을 들으면 마음이 편하다거나 우울한 감정이 위로 받는 경우가 그렇다. 즉 깨달은 분의 자아가 상을 벗어났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무의식 상태의 자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문제는 현실의 자아가 상속에 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꾸준히 들어야하고, 또 병행해서 자신이 수행을 해야 한다. 그리고 법문이나 책을 오래 듣거나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자아가 상에서 벗어나지만, 이 또한 자신의 정신의 수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되풀이 하면 언제나 자신의 정신에 대해서 탐구하고 의문을 가져야 한다.
요컨대 결론은 법상스님의 말씀을 필자의 자아가 받아들였다. 그러면 필자의 영혼이 이에 대해서 활동을 개시한다. 영혼이 필자가 하는 생각, 감정, 의지를 활용해서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시너지 효과를 낸 필자의 생각은 슈타이너의 『고차세계로 가는 길, 2007』에서 본 '소리의 행'이다. 주위의 소리를 통해서 정신세계로 가는 것이다. 첫 번째로 소리를 들으면서 그 소리를 내는 동식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새소리를 들으면, 새소리가 아름답다거나 슬프다는 것을 떠나 소리를 내는 새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필자가 둘레길을 걸으면서 새소리와 하나가 되어 보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다만 가끔 그 새와 하나가 된 듯 느끼기는 했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두 번째로, 동물의 소리, 식물의 소리, 심지어는 광물이 내는 소리도 있다고 한다. 소리를 내는 존재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 소리가 영혼의 감각기관을 깨워서 영혼으로 듣고 볼 수있는 영혼의 감각기관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필자의 이 경험과 법상스님의 말씀이 만나면서 어떤 깨달음, 정신세계를 가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세계를 가기는 거의 어렵다. 요컨대 정신세계를 갈려면 그 과정에서 반드시 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산이 그렇게 아름다운지는 몰랐다'라는 법상스님의 말씀이, 사실은 법상스님의 영혼이 아름다움을 볼 수있는 눈이 열렸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영혼의 감각기관인 것이다. 영혼의 감각기관이 열려야 아름다움을 본다. 영혼의 감각기관이 통상 우리가 말하는 영혼의 눈이다. 영혼의 눈이 열리면 주위 모든 것이 아름답게 빛난다. 슈타이너는 영혼의 눈으로 꽃을 보면 꽃이 빛, 광채를 내면서 다가온다고도 하였다. 이 과정을 거쳐서 자연과 하나가 된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과 하나가 되면 영혼의 감각기관이 열린 것이다. 이것이 영혼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는 의미이다. "수행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자연 전체에 대해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위 책, 72)."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이러한 길 가운데 어디 즈음에 서 있다. 다만 문제는 내가 그것을 집중해서 파악해야지만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가 상을 벗은 만큼 물질세계에서 능력을 갖는다. 자아가 상을 벗으면 삼라만상이 같은 존재이므로 모든 대상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가 상을 벗은 정도가 우주와 하나가 되는 정도이다. 예컨대 '너만은 내가 용서할 수가 없다'라고 생각한다면 , 거기까지가 나의 능력의 한계이다. 하지만 이 한계를 인간이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인간이 한계를 갖는다.
첫째는 나의 정신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신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이다. 셋째는 정신에 대한 책을 읽고 법문을 듣는 일이다. 마지막에는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탐구해야 한다. 정신에 대해서 탐구해서 영혼의 감각기관이 길러지거나 영혼 조직에 가해진 영향은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반드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믿고 꾸준히 가야 하는 것이다.
가다보면 작은 문제는 곧바로 본질을 파악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더 큰 이상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유와 해탈의 의미를 파악할 수도 있다. 자유란 정신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는 일이다. 물질세계에서 물질인 육체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결론은 인간이라면 정신세계를 탐구해야 하고, 정신세계를 가는 과정은 그 방법이 다르게 보이기도 하나, 정신의 관점에서 보면 같은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말은 영혼의 감각기관이 길러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혼의 눈(감각기관)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꽃)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는 자아가 현실에서 상을 벗었다는 말이다. 만약 현실에서 자아가 상을 벗으면 어떤 것을 해도 잘 할수가 있다. 상을 벗은 자아는 우주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평안과 침착성은 인간 존재의 핵심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초감각적 세계인식에 이르는 길, 2016, 36)" 는 사실을 명심하고 바깥세계의 문제에 초조해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럴려면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체크해야 한다. 처음에는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하는지도 모르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되고, 또 불안과 초조에서도 놓여난다. 놓여나야 비로소 정신세계로 가는 문을 열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