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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번 여행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길 간절히 바랬습니다.
사실 9일간의 여행 일정은 저에게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으므로 여러가지 부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기전에 여러분에게 글을 쓴 것 같이, 제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기에 여행으로 인해서 제 삶에 대한 그 분의 보호하심이 약해지거나 흠이 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어려운 상황이 다가오면 그분의 보호하심을 의심하게 됩니다.
기적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지만 어려운 환경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불확실성의 상황은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이지만, 그 불확실성이 상황속에 우리 자신을 던져 넣는 것 자체는 몹씨 두렵고 힘든 결단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꼭 大事가 아니라 小事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분의 보호하심은 마치 찬양의 가사와 같이 "이제는 내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 가물 아련거려도", 그 속에서도 늘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고 지켜 주심을 깨닫게 됩니다.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운명은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한 걸음씩 행함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두려움의 벽을 무너뜨리고, 안주를 떨쳐 버리고, 믿음으로 가나안으로 떠난 아브라함과 같이 움직일 때 새로운 운명, 새로운 믿음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믿습니다.
9일간의 일정을 이제 여러분께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인도하심과 보살핌이 있었는지 함께 여러분과 나누기 원하고 우리 주위에 감싸고 있는 새로운 삶에 대한 두려움의 장벽을 넘어보려고 합니다.
세상의 물질과 인간의 보호가 아닌 그 분의 협력하심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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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7일
가기에 앞서 두려움이 많이 앞섰다. 사실 9일간의 일정을 현재 상황에서 간다는 것 자체가 부담과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여행도 아닌 나 자신을 포함한 5명의 가족과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실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여행은 가려는 마음은 일찍 부터 있었으나 여러가지 상황으로 볼 때, 예를 들면 사전에 여행에 대한 준비(정보 및 탐방지역)라던지 아니면 재정적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떠나는 것 자체가 여행에 대한 설레임이라기 보단 생존에 대한 염려가 더 있었다.
하지만 가기로 결정한 이상 더 이상 주저함을 가지기 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했다.
밤에 잠을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안온다.
누워서 밤새도록 기도했다. 이번 여행가운데 그 분의 인도하심이 있길 간절히 바라며...
2006년 8월 8일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났다.
오늘까지 일을 하고 휴가를 얻게 되어 있다. 집에서 공항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은 아침 10시경이다.
그래서 오늘 아침까지는 일을 하고 가기로 했다. 일을 하고 돌아오니 8시 30분이 되었다.
오전 10시 출발..
(버밍엄 Coach Station 에서 출발)
(Standstead Airprot 도착)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이제 공항에서 출발해서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스라바로 들어가게 된다.
오늘 하루 일정은 길다. 버밍엄에서 공항까지 4시간이나 차를 타고 왔다. 그리고 여기서 비행기로 브라티스라바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다시 셔틀 버스를 타고 비엔나 시내까지 가야 한다. 아마도 밤 11시나 되어야지 비엔나 시내에 도착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곳에서 비엔나 한인교회 교우가 우리 가정을 픽업해 주기로 되어 있다.
아마 모임장소에 도착할 시간은 밤 12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이륙에 앞서, 오후 5시 20분)
(하늘에서 본 모습)
(브라티스라바-슬로바키아의 수도, 도착. 오후 8시 30분 경)
(비엔나 도착 및 숙소에 들어옴, 9일 0시 경)
2006년 8월 9일 -11일(장로회신학대학교 유럽동문회 및 선교사회 참석)
8일 저녁 늦게 도착 한 후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동문회 및 선교사회 참석을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동문회의 도움으로 우리는 3일정도의 일정동안 좋은 숙소에서 좋은 음식으로 공급함을 받았다. 동문회 기간동안 예전 학교에서 공부할 때 함께 공부한 동기 및 선후배를 만날 수 있었고 또 한국에서 오신 강사님들(김기수 목사-안동교회 원로목사, 김지철 목사-소망교회 담임목사, 이광순 목사-총동문회 부회장, 이연옥 권사-전국여전도회 연합회 명예회장)을 통해서 좋은 강의와 위로를 얻었다.
특히 전국여전도회 연합회에서 격려차 방문하여 여러가지 많은 위로와 은혜를 입게 되었고, 비엔나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이모저모로 많은 신경과 사랑을 부어주어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평안함과 위로함을 얻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난생 처음으로 이곳에서 여름성경학교를 하게 되었는데, 비엔나 한인교회 교역자와 청년중심으로 된 헌신적인 교사들이 많은 수고를 해 주어 아이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시간이 되었다. 지금도 아이들에게 어디가 제일 좋았냐? 고 물으면 비엔나가 좋다고 한다. 나라나 도시가 좋은게 아니라 그곳에서 한 여름 성경학교가 아주 인상 깊게 남은 것 같다.
(비엔나 시내 관광 중 식사 시간)
(쉘부른 궁전에서)
(터어키의 균두스 목사와 함께-신대원 입학동기로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음)
(선교사 및 동문 자녀 여름성경학교 발표회, 영진이와 이삭이가 앞 줄에서 따라하고 있음)
(여름성경학교 발표회, 영은이 사진)
이렇게 3박 4일간의 동문회 및 선교사회 일정이 마치게 된다.
평안함과 위로의 시간었고 또 아이들에게도 추억의 시간이 되었다. 하나님께선 믿음없이 염려한 나를 4일동안 풍성한 은혜로 평안케 해주셨고 또 용기를 주셨다.
2006년 8월 11일(오후부터)
3박 4일간의 일정이 다 마치고 모든 동문 및 선교사들이 각자의 선교지로 또 학업과 일터로 흩어졌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의 보호속에 있었다면 이제부턴 혼자 약 5일간의 일정을 보내야 한다. 사실 내가 염려한 것도 지금부터였다.
동문회는 이미 잘 계획된 조직과 일정이 있어 거기에 따라 움직이며 되는 것이지만, 이후의 시간은 막상 동유럽을 탐방한다는 목적만 있었지 어디를 가야 할지 또 어떤 것을 경험해야 할지 망막했다.
나의 계획은 동문회 때 그런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많은 정보를 얻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와중에 나에게 좋은 친구를 붙여주셨는데 그는 버밍엄에서 함께 온 원현철 목사이다.
이 분은 내가 영국에 처음왔을때 나를 버밍엄으로 인도해 주고 여러가지로 도움을 준 선배 목사이다.
이번 동문회에 그분 가정은 비행기가 아니라 차로 직접 오스트리아 비엔나까지 오신 경우이다.
오면서 서유럽을 여행하고 동문회가 마친 후에 동유럽을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오기전에 서로 약속한 것은 없었지만 비엔나 있는 동안 함께 움직일 것을 서로 이야기 했고 그래서 함께 이번 여행에 동무가 되었다.
원 목사님 가정은 철저한 계획과 준비를 가지고 어디를 가는 것이 장점이다.
그 분의 차는 5인승이나 뒤 트렁크가 큰 Van 종류의 차였는데(마치 우리나라 스포티지 종류의 차) 그 뒤 트렁크에 밥솥부터 시작해서 침낭 심지어 텐트에 접이식 테이블까지 준비해 오셨다.
하지만 안탁깝게도 이곳에 오는 도중 차량사고가 있어 차량의 한쪽 면이 심하게 스크레치되었다.
그런 이유로, 내 짐작에는 원 목사님 가정도 누군가의 여행 동무가 필요했는 것 같다. 특히 그 가정에는 3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자녀들 모두 우리 아이들과 동연배이며 절친한 사이여서 아이들이 함께 여행을 가는 것에 너무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사람들과 함께 동유럽 탐방이라는 5일간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더욱 감사한 것은 지도 한장 없는 나에 비한다면 그분에게는 네비게이션이 있었기에 어디를 찾아간다는 것이 수월한 일이었고 또 나는 그 분의 차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동문회가 끝남과 동시에 다시 브라티스라바에 가서 차를 빌리기로 했다.
서유럽과 동유럽의 경제차이가 큰 간격이 있으므로 차를 오스트리아에서 빌리기는 돈이 많이 들 것 같고 또 내가 비행기를 타야할 곳도 브라티스라바였기에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스라바 공항으로 다시 돌아가서 차를 빌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출발하게 된다.
(동문회를 마치고 비엔나 중앙역에서 브라티스라바로 가는 도중 점심식사. 비엔나 중앙역에 있는 부산식당에서 라면밥을 시켜서 먹음)
(비엔나 중앙역, 브라티스라바행 열차)
(브라티스라바 중앙역 도착, 함께 간 김종삼 목사님, 서정일 선교사님과 함께)
(자동차 렌트한 후 사진 한장, 뒤에 보이는 차가 렌트차량, Skoda, Favia. 제조사는 체코. 5일간 렌트비용으로 comprehensvie 보험포함, 23만원정도 지불)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저녁식사, 옆에 계신 분은 원 목사님 사모인 김지현 사모)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여 숙소에서 취침)
2006년 8월 1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제가 있는 교단에서는 정채화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선교지이다.
정채화 선교사는 신대원에서 공부할 때 이미 안면이 있는 분이며 또 나와 같이 견습선교사 출신으로 많은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감사하게도 정채화 선교사께서 이곳에 방문하는 줄 알고 저녁약속을 잡아 주셨다.
우리 일행은 아침에 부다페스트 일대를 돌아보고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고 또 저녁시간에는 정채화 선교사를 만나 함께 식사하며 은혜를 입게 되었다.
(헝가리 국회의사당 모습)
(왼쪽에서 원현철 목사, 정채화 선교사, 그리고 접니다)
(부다페스트 야경을 보며)
(영웅광장에서 한장, 아이들은 모두 차 안에서 자고 있습니다. 이날 밤은 차에서 잠을 잤습니다)
2006년 8월 13일 (폴란드로)
원래 계획에는 폴란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계획이 변경되어 폴란드를 가기로 결정을 했다.
잠은 부다페스트 외곽에 있는 주유소 주차장에서 잠을 잤다. 아이들도 차안에서 그리고 우리 부부도 차안에서 잠을 잤다. 하루는 차에서 자고 하루는 숙소를 정해서 잠으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폴란드를 가기로 한 주된 이유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가기 위함이었다.
사실 그곳은 특별한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이곳까지 왔으니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갑자기 생긴 계획이었다. 물론 이런 계획에 가지게 된 것은 헝가리 정채화 선교사의 말 때문이었다. 정 선교사가 이곳에 왔다면 그곳을 꼭 보고 가는 것이 좋다고 하여 마음을 먹게 되었다.
물론 그곳에 도착한 이후에 깨달을 것이었지만, 이곳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는 장작 10시간이나 차를 운전해서 도착해야만했다. 원래는 6시간이라고 하나 초행길이고 또 아이들과 함께 가는 여정이여서 그만큼 시간이 더 소요된 것 같다.
하지만 그만한 보람은 있었다. 나라와 나라를 지나면서 그 나라마다 특유한 분위기가 있었다.
모두 유럽의 나라였지만 국경만 넘으면 나라마다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슬로바키아의 경우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타 유럽나라에 비해서 낙후되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물론 이곳 동유럽에서는 영어사용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어를 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어로 말을 한다해도 곧이 듣는 사람도 없다. 물론 우리같이 영어를 하면 도망가지도 않는다.
더 당당하게 자기 나라 말을 한다. 전혀 알아듣지 못해도 그는 자기나라 말로 설명하고 나는 그 설명을 알아들어려고 노력하다. 자부심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헝가리는 아름답고 웅장한 나라였다. 그리고 특히 우리집 사람과 내가 함께 동감한 생각이지만 그곳 여성들은 모두 매력적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모두 멋쟁이 같이 다녔다. 그리고 그 나라의 웅장함과 다뉴브 강 주위에 세워진 건축물들은 내가 사는 영국과 비교해 볼때 훨씬 더 나은 것 같이 보였다.
나는 영국의 건축물과 풍경들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영국은 이곳에 비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였다.
폴란드로 접어들면서 헝가리와는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곳은 평화롭다는 마음이 들었다.
비록 아우슈비츠라는 무시 무시한 고통의 역사가 있는 곳이었지만 넓은 들판위에 뛰엄 뛰엄 보이는 집들은 마치 그림의 한 장면같이 보였다. 지붕은 색깔은 빨강, 노랑, 파랑, 가지 각색의 색깔로 단장해 놓았고 잊을 수 없는 것은 모든 집마다, 창틀에 그리고 베란다에 이쁜 빨강꽃 화단이 장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폴란드에서 하루 숙박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친절함은 관광객인 우리들에게 기쁨이 되었고 또 그 숙소는 전원주택과 같은 아름답고 포근한 곳이었다.
일정에 없는 폴란드의 방문은 이틀이라는 시간을 우리에게서 가지고 갔다.
도착한 날 아유슈비츠 제 1 수용소를 방문하고, 그 다음날 제 2수용소를 방문했다.
제 2수용소는 우리가 영화에서 보던 그 수용소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100여 킬로가 떨어진 소금광산이라는 곳으로 옮겨 그곳을 방문할 수 있었다.
(폴란드로 출발)
(폴란드에 도착하여 주유소에서)
아우슈비츠 제 1 수용소
수용소 정문 - 위에 "일하면 자유로워진다" 라는 문구가 있음
(수용소 박물관 안에서, 뒷 조각상은 어머니가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
(수용소 내부 모습)
폴란드 전원주택에서 숙박 및 식사
(숙박 장소)
(숙박한 곳 주인가족과 함께)
2006년 8월 14일
아우슈비츠 제 2 수용소 방문
(수용소 정문)
(수용소 전경)
(수용소 안에서)
(뒤에 보이는 폭파된 건물은 그 당시 유태인을 학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스실임. ss요원들이 퇴각하며 폭파하여 현재 건물 잔해만 남아있음. 뒤에 큰 잔해 더미 우측이 독가스실이며 우리가 서 있는 앞쪽에서 사람들이 입장하여 살해 당함, 뒷편에는 죽은 자들의 재를 뿌렸다는 작은 연못이 있음)
소금 광산
소금광산은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1970년대에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보존물이다.(혹 틀리면 수정을 부탁함) 이곳에 얽힌 이야기는 헝가리의 킹가 공주가 폴란드로 시집을 오면서 소금광산의 일부 소유권을 지참금으로 받았다고 한다. 근데 공주가 헝가리를 떠나 오면서 그 광산에 자신의 반지를 떨져 놓고 왔다. 그리고 폴란드에 와서 사람을 시켜 폴란드의 한곳에 땅을 파게 시켰는데 그곳에서 소금광산을 찾게 되고 더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 자신이 떨어뜨린 반지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킹가공주는 소금광산의 수호여신이 되었다고 함. 이 소금광산이 유명한 것은 그 땅 깊이 속에 있는 광산안에 소금을 조각하여 만든 조각품들 때문이다. 또 광산안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예배당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 많은 카톨릭의 조각품들이 있다.
(소금 광산을 내려가는 계단 통로, 안탁깝게도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이곳에 방문하여 낙서를 한지 모른다. 뒤에 보면 많은 낙서가 있는데 단연 한국인의 낙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음. 특히 자기 이름에 대한 흔적을 남김. 부끄러웠음)
(킹가 공주에 대한 묘사 조각)
(내부 예배당)
2006년 8월 15일(체코 프라하)
폴란드에서 시간을 많이 소요하게 되어 체코는 잠시 방문하게 되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경험이 된 것 같다.
(체코로 가는 도중, 잠은 차안에서..)
(프라하 도착)
(프라하 까르교에서, 한국에서는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드라마 할때 이곳에서 찍었다고 들었음)
2006년 8월 16일
브라티스라바에서 이젠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륙)
(영국 도착)
(정다운 집에서)
이렇게 하여 9일간의 동유럽 및 오스트리아 5개국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기도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저희들도 이곳에서 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지내고 있으 여러분께서도 평안하시기 원합니다.
사실 가기전에 염려했던 것들, 막상 가고 보니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은 적절하며 또 충만하였습니다.
무엇인가를 시작한다는 것, 두려움이 앞서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신실한 분이기에 그분의 신실함이 우리의 모든 것을 덮고 인도해 줍니다.
모든 것에 참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받은게 너무 많아 더욱 더 그 분에게 충성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평강이 있으시길...
첫댓글 감사합니다. 매일 성령츙만을 기도드립니다. 앞으로 사역에 큰 공부를 하셨군요. 저도 기도드리며 꿈을 가지는 동유럽을 돌아 보심을 부러워 합니다. 야훼의 복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