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꾸는 유토피아 그리고 밥상과 들꽃
산뜻하고 화려한 나만의 창을 갖고 싶어요. 엄마의 집을 떠나온 나에게 펼쳐진 세상은 늘 햇살 가득한 나날이어서 창문이 달린 집 따윈 필요치도 않았어. 향기롭고 눈부신 날들이 모두 흘러간 후, 춥고 바람 부는 거리에서 비로소 깨달았지. 내가 탕진해버린 모든 것들이 엄마에게서 훔쳐온 것임을……
-「엄마의 창(窓)」에서-
그는 페미니즘을 오버랩시킨 자연 풍광 문장들로 시집의 첫 부분을 채운다. 이제 인생의 시계추 오후 네 시쯤의 도정에서 비로소 ‘엄마의 창’으로 돌아온 시인의 감회는 새롭다. 그러나 기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들창 쪽으로 몸을 누인 채 양말을 깁는 중이어서 시인도 슬그머니 해진 양말을 집었을 뿐이다. 헤어짐의 인연들이 그렇듯 피붙이의 눈길조차 받지 못한 채 별리(別離)를 맞이하기도 하는데 마지막까지 순간의 정황을 놓치지 않는 시인의 시선이 서늘하다.
신열에 들떠 두둥실 흔들리면서
지리산 산 그림자 물에 어리는
먼 옛날 섬진강 나룻배 타고 건넜네
가을 노고단 억새풀 되어
바람에 흐느꼈네
「천년의 노을」
가장 가깝게 등장하는 소재가 ‘밥상’으로 통칭되는 ‘여자의 노동’이다.
‘겨우 쌀 씻고 국 끓일 만큼 아픈 몸’부터 하루의 일상을 시작하기도 한다. 빈 방에 홋홋이 누워 늘어지게 아프고 싶은데 문득 엄마의 칼도마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의 콩나물시루 물주는 소리 너머 살구꽃 복사꽃 산도라지 보랏빛이 노을로 펼쳐지는 배경에서다. 무거운 짐으로 덮인 채 오래도록 풋내음만 기다리고 있다.(묵은 슬픔)
그래서 이 땅의 ‘깨어있는 여성’은 지금도 헌신과 자존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특히 70-80의 도정을 지낸 그미들은 ‘박탈감과 희생의 미덕’ 사이에서 출구 없는 번민에 빠지는 것이다. 관성의 벽에 막힌 슬픈 사랑, 그것은 여성들에게는 ‘못 넘는 벽’이고 사내들은 권위의 방패로 은근슬쩍 ‘안 넘는 벽’이다. 그 와중에도 사물에의 애틋함에 몰입하는 여성성들이 여기저기 드러난다.
수척해진 산나물들도 겨울 물살에 풀어놓으면 단내 나는 봄으로 되살아난다. 아직 풋내음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골짜기마다 시린 물을 끌어올려 골다공증 관절을 세우느라 분주하다. 묵은 몸 풀어내는 방식이 저마다 따로 건재하니 있으니 그게 연륜의 관조다. 저무는 퇴근길, 상호 이름을 추적하면서 청춘의 흔적을 더듬으면 절망도 달콤하다.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은 날) 이순(耳順)의 도정에서는 그렇듯 슬픔의 언어도 품격을 갖춰야 한다.
개울가에 쪼그려앉은
작은 계집아이
물살에 실려 하염없이 떠가는
꽃 이파리 풀 이파리 보인다
「엽서」
그의 유년은 조약돌에 홀려 송사리 놓치던 헛헛한 스크린에서 비롯된다. 지금은 조약돌로 가라앉은 쓸쓸한 추억들이 불현듯 벋은 새순으로 피어나 유년의 꽃잎 편지로 도착하는 것이다. 기실 지난한 기다림으로 만난 정한이라서 아리고 시릴 틈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기억에 사무친다. 무당벌레 닮은 엽서 한 장을 종이비행기처럼 날려보내며 모처럼 호숫가 풍경을 되살리는 것이다.
많이 힘들었다는 뒷담화 소식도 슬픔의 딱지다. 등짐 무거운 사람의 안부를 듣고 자신은 견딜만하다고 가까이 달래준 것도 미안하다.(안부) 그러니까 숲으로 난 작은 길을 찾아내는 시인의 눈이 중요하다.(숨은 길) 그 길은 나루터에서 아주 잠깐 인생을 헤아려보던 간이역과 상통한다. 그렇다. 질주하는 차창으로 무심히 스쳐가는 그 오솔길을 가슴에 담는 자만이 시를 쓸 수 있다. 그 눈은 속도를 거부하며 아름답게 숙성시킬 터이니, 타자의 아픔 속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시멘트 구멍 하나 얻기 위해
구겨진 꿈이 있다
저 불빛 하나 잡기 위해
저당 잡힌 날개가 있다
-「꽃과 열매의 시간」-
시멘트 구멍에 불 지피고 된장 한 숟갈 뜨러 나간 차에 분꽃 한 송이 조우하는 그림이다. 아궁이를 바라보면 가슴이 싸-하게 달아오르니 그게 부지깽이에서 꽃이 피는 이유다. 그 따스함을 문장으로 옮기며 몸의 삭감을 채워주는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 종소리 울리는 계단에서 착한 백성으로 쉬고 싶어한다. 더러는 물속 그림자에 홀려 심부름도 까먹던 소녀가 되어 저물녘 맞이하고 싶은 것이다.(고속국도에서) 이제사 그렇게 검은 상처도 그리워지는 초로의 몸을 세워보려 한다.
기실 시인이란 놓친 사연을 헤아리는 암호 해독자다.
고추밭 지드락길 따라가면 잃어버린 옛 마을이 요술처럼 나타날 것 같다. (그 마을이 정말 있었던 것일까) 뭇 사람들이 잊은 기억들을 선명하게 되살려 여지저기 나눠주니 그게 시인의 업이요, 사명이다.
산 빛깔은 멀수록 그윽하고
골짜기 잡목들은 저저끔
제 빛깔로 물들다 어우러지니
가을이 거기 있음을 알겠다
「가을은 거기 있었다」
진부하던 배경에서 시나브로 정이 든 옛 직장 3층 회의실 창밖이다. 그러니까 바깥에 나가지 않고 창틀만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이다. 풍경을 뚫는 안광의 힘으로 개나리 꽃단장한 함석집도 되살아나고 빨랫줄 아기자기 펄럭이는 초록색 마당도 불쑥 등장한다. 개발 팻말과 함께 파손된 자리에서 보리이삭 밭두렁 잡아내어 기어이 푸르게 출렁이는 가슴이라니.
텃밭 감자의 내력은, 분리수거 쓰레기통 옆에서 주워 왔으니 싹 나서 버려진 감자가 농사꾼 임자를 만난 거다. 그 텃밭이 탐스런 새끼들을 재생시키니 지금 저 감자는 그때 감자의 손자뻘인 셈이다. 감자꽃 기다리며 사내와 아낙이 합체된 모습이 모처럼 싸-하게 화사하다. (감자꽃이 피리라) 그뿐인가. 김장 때 팽개친 배춧잎 무심히 들춰 곰삭은 홑잎 아래서 오그르르 돋아난 나싱개도 찾아낸다. 파릇한 봄풀 틈에서 알몸으로 늦추위 견뎌낸 겨우살이의 서러움도 캐어내야 한다. 그래서 배춧잎 이불로 겨울을 보낸 여린 속잎은 ‘냉이’가 아니라 ‘나싱개’라고 쓰는 게 맞다.
그해 겨울이 그리도 모질었음인가
온실 속 분재 화분에서 풀려나와
볕 바른 돌담장 아래 뿌리를 묻던
첫 봄, 진분홍 꽃 몇 송이 피우고는
「꿈꾸는 영산홍」
그의 시에 등장하는 꽃들은 죄다 은둔한 생명붙이다.
쥐똥나무 그늘의 아주 작은 쑥갓꽃이 등장하고 그 틈새에서 싹을 틔우며 울타리 바깥 햇볕 쪽으로 한사코 밀어내던 무수한 꽃대궁들이 그렇다. 그 숨소리들이 딱히 시인만의 가슴에 혼자 담겨졌으므로 더욱 귀하다.(겨우 겨우 존재하는) 참외도 달콤한 것 넘치는 세상에서 하필 개똥참외만 그리워한다.(개똥참외) 마찬가지다. 무수리 사과의 과육을 빠져나온 향에 취하니 가만히 있어도 우주가 되어 나만의 체취를 내뿜는 셈이다.(존재의 기쁨) 화사하게 피고 지는 복사꽃, 배꽃이 아니라 빛바랜 여생마저 ‘차별 받는 꽃’으로 이름 묶이니 그게 백일홍이란다.
그러나 세상의 군상들은 끊임없이 화려함을 추구한다. 개발의 굉음이 터지는 순간 빈한하면서도 따뜻했던 유토피아가 쌩- 날아간 탓이다. 바깥나들이에 나섰다가 사람 바퀴에 치여 헐떡이면서도 똑같은 일탈만 시도한다. 도심지 유리창마다 럭셔리한 상품들이 번뜩번뜩 위용을 드러내는데.
결국 버려진 것들을 삼태기에 담는 것도 시인 혼자다. 지금 이 순간이 날마다 가장 젊은 몸이라며,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아내던 버림받은 것들에게 호오호 곱은 손을 쥐어준다. 점차 그는 마이다스의 손을 달고 다닌다. 고무다라나 플라스틱 화분에 핀 분꽃으로 온 골목을 어느새 환하게 비춰주고 그 처연함에 생명을 불어넣어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채워주는 점액질로 살려내는 것이다. (살림살이 팍팍해도)
-집배원 아저씨
우편함에 물새가 둥지를 틀었어요
우편물은 돌담장 위에 놓아두세요
-물새와 우편함-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우편함에는 편지나 무당벌레 옆서 대신 전기료 청구서나 청첩장만 쌓인다. 그래서 시인은 비 젖은 솜이불처럼 무거운 짐을 털며 작은 놈부터 건져내기 시작한다. 벌레먹은 매듭을 사랑해야 하니 그게 존재의 화두다. 잡풀 속에 살던 개구리나 지렁이들이 집안 마당에 뛰어들면 권정생 생가처럼 정겨우리라.
그런 유토피아를 그려보는 것이다. 민들레 벌판과 개울가 그리고 버드나무 사이로 보이는 사내와 아낙의 흐뭇한 풍경이다. 앞치마 두른 남정네가 설거지할 즈음 스카프 맨 여자는 베란다에서 화분을 닦고 있다. 함께 쌀을 씻고 못질을 한 다음 화롯가에서 독서 삼매경이나 묵 내기 화투에 빠지는 한가로운 정경이다. 그러나 솔직히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단칼에 사라진다.
원판을 지니고 있다면 누구라도 가끔은 젊어질 수 있지요.
사람들 얼굴에 이따금 나타나는 옛 모습, 수십 년 세월을 한꺼번에 뛰어넘는 놀라운 복원력, 평범한 얼굴도 때로는 아름다워지는 표정의 생명력, 그 단순한 비결을 설마 모르시나요
-「성형외과」
한때 그는 폭정의 시대에 맞서는 전사의 길을 걸으려 했다. 동지의 뼛가루를 강물에 뿌리며 미워하는 자는 끝까지 미워하겠노라 이를 갈았다. 거품으로 떠오른 동지를 떠올리면서 무엇을 아끼면서 살아남고 있는가에 대한 회한 서렸던 화두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그 화두처럼 해직교사 출신인 동시에 명퇴교사의 도정을 걸었다. 먼지 낀 탁자에서 루카치를 읽었고 최루탄과 촛불 집회에서 시를 낭송했다. 그러나 결의와 좌절의 사이클에 몸을 실었던 기억은 이제 지척이면서도 까마득하다.
자본주의는 약진을 거듭했고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조급해졌다. 스마트폰이 터지지 않으면 집단 공황에 빠지면서 빨간 신호등 앞에서도 클락숀 빵빵 누른다. 민중들의 숨소리는 찌라시 언론들의 마법 속에 수렁으로 잦아들었다. 꿈나무들은 예전보다 살얼음판 행보 중인데 매스컴들은 사소한 일에도 장안을 뒤집어놓는다. 분하지만 지금은 대개 그냥 견디는 시국이다.
내 그리움은 다르거든
남편과 아들이 보지 못한 그 애의 풋풋하고 발랄했던 옛날,
아슬아슬 위태로웠던 순수함, 이루지 못했지만 아름다웠던 꿈과 이상을 나는 아니까
세월이, 현실이 흐려놓은 그 애의 원판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니까……
「친구」
코 고는 남편 옆에서 마키아벨리즘을 읽다가.
호프집에서 훔쳐낸 여인의 대화를 세상에 드러내니 그게 이문구 타법이다. (사랑의 마키아벨리즘) 그러니까 사내와 아낙의 관계는 길들임과 길들여짐의 관계라는 폭로다. 밥상을 차려본 적이 없는 사내들도 밥상을 거부할 줄은 안다. 그미들은 비분강개와 합리화를 빨리 판단하며 다시 일상의 에너지를 저울질한다. 그건 해방 직후 출산된 아낙 특유의 허구적 풍자이자 눈물겨운 해학이다. (참고로) 익살이 그냥 웃기기만 하는 희극이라면 해학은 민중적 생명성을 담보로 하니, 그의 문장은 후자다.
망자가 된 아낙에 대한 사내와 여인들은 그 회한이 각자 다르다. 사내들은 여전히 ‘젖은 손의 애처로움’에 젖어드니, 솔직히 말하면 ‘무수리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다. 된장찌개처럼 구수하면서도 입에 딱 맞는 음식 그리고 잘 빨아서 다린 와이셔츠나 생산해주던 현모양처가 망자로 변신했으니, 불편하고 그립기도 하리라. 거기까지가 천편일률의 신파다.
그러나 여자들은 다르다. 쇠한 몸 이전의 풋풋함과 발랄했던 몸이 본디 본향이었음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고무줄놀이나 사방치기로 폴짝폴짝 뛰던 종아리 추억도 아리고 시리다. 젊은 날의 아슬아슬 위태롭던 사랑 놀음과 높이 날고 싶었던 ‘갈매기의 꿈’을 쌍동 잘라버린 석별들이 허망하다. 그 ‘여자의 일생’들을 어떻게 벗어나고 어떻게 서술해야 할까?
근디 이 여편네는 배달 나간 지가 원젠디 아직두 함흥차사여? 싼 맛에 쓰긴 한다만 속 터져 죽겄네, 죽겄어. 장사두 안 되는디 요번 달 까지만 쓰구 자르던지 히야지 원 부려먹기가 힘들어서……(궁시렁궁시렁)…
수행비서 겸 기사가 뒷골목 식당 주인에게 퉁방구리 시비를 건 직후다. 여주인은 대충 비위를 맞추고 적당히 흘려버리는 식으로 접대했을 뿐이다. 심통의 순간을 모면한 다음 식당주(主)는 다시 배달 종업원을 떠올리며, 여차하면 잘라버릴 궁리에 빠지니 그게 생존의 먹이사슬이다. 해답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은근슬쩍 던진 반전이 속화된 실체이자, 해학적 비장미다.
그놈이 그놈 같아두 그게 아닌 겨
감나무 집 딸 좀 보라구 겉만 번드르헌 놈헌티 시집갔다가 오늘날 팔자가……
뚱딴지 같이 웬 팔자타령이랴? 선거허구 혼인허구 뭔 상관이라구?
상관이 왜 읎댜? 그게 다 사람 고르는 일이구 내 신세 맽기는 일인디
「노인정 난상토론」
위정자에 대한 공론으로 경로당 노파들의 잦아졌던 에너지가 순식간에 살아난다.
순종과 페미니즘의 갈등이 쳇바퀴처럼 지난하게 얽혀서 마침내 선거판 스토리로 전환된다. 단순 명쾌한 게 천상 그의 모습이다. 그렇다. 그는 짜릿한 절창을 피하면서 신랄한 주제의식을 예고한다. 디테일한 묘사, 비유, 상징, 허구, 비약을 거절하는 대신 통째로 비유하고 상징을 시도한다. 이야기를 추스르는데 바쁘니 상징이나 비약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소외된 주변부에 포커스를 맞춘 다음 문단 전체를 한 방에 털어내 버린다.
무수한 엑스트라들이 세간의 주류가 되는 줄기를 찾아내는 것.
그게 시인의 주제의식이다. 밥상과 들꽃 그리고 마키아벨리즘까지 그 속에서 피어내지 못한 아우성을 토로한다. 그렇다. 굳은 땅 헤치고 비로소 첫 시집을 상재하려는 노병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