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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내가 이대로 신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 출판사에서 저녁 늦게 돌아와 책을 펴면 문장은 모두 피로에 지쳐 허물어진다. 교정지에도 오자가 많이 나온다는 지적을 받았다. 생각은 바람에 날려가는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지고 있다. 히브리어 ‘쪽지 시험’에는 한 문제도 답을 쓰지 못했다. 차라리 직장인으로 되돌아가 버릴까? 네 개의 침대는 고요히 잠들어 있다. 보조 침대의 백형기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목구멍에서 솟구쳐 오르는 이상한 소리를 주체할 수 없어 입을 틀어막고 채플 실을 뛰쳐나와 까치동산에 올랐다. 다시 입을 열자 밀물처럼 터져 나오는 기도, 기도, 기도……. 그것은 방언 기도의 홍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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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형진이가 서울 현세대학을 졸업하는 해에 형기는 대구 경동대학 국문학과에 합격했다. 형기가 마을을 떠나던 그해 봄부터 송전마을은 해수욕장 개발을 시작했다. 마을 유지들은 꿈에 부풀었다. 마을 뒤 해변은 부산의 해운대 해수욕장보다 풍취가 좋았고 선유도의 명사십리보다도 더 아름다운 휴양지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형기는 해수욕장 가는 길을 내기 위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를 베어내는 것이 마음 아팠다.
그동안 경주법원에서 근무하던 형기 아버지는 5‧16군사혁명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포항에 돌아와 법무사 사무소를 열었다. 송전마을은 해수욕장 개발이 중단되고 인근 마을까지 모두 한데 묶어 포항종합제철단지가 조성되었다. 포철의 중심은 백형기의 고향인 송전마을이었다. 지금도 포항제철을 견학하는 사람들은 1968년 마을이 철거되기 전의 사진을 영상에서 볼 수 있다. 검푸른 송림이 400여 호의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흑백사진에는 하얗게 밀려오는 영일만 파도와 멀리 호미곶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마을 앞으로 하얀 신작로가 지나가고 중심에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그 옆의 기와지붕이 형기네 집이다. 맨 처음 송전마을에 교회가 들어올 때 천막 교회를 세운 자리가 미루나무 앞에 있는 논이었다. 형기 할아버지는 교회에 나간 적은 없지만 천막교회의 터전으로 농한기의 문전옥답을 내어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동서남북으로 흩어지고 집들은 다 철거되었다. 그리고 350만평 부지에 포항제철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한창 마을이 헐릴 때 백형기는 군에서 제대한 뒤 복학을 앞두고 송전교회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교회당 문을 열자 강단 벽에는 ‘終結禮拜(종결예배)’란 붓글씨가 보였고 마룻바닥에는 먼지만 가득 쌓여 있었다. 교인들은 이미 한 달 전에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2
백형기가 30개월 군 복무를 마칠 즈음에 떠나버린 사랑의 빈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었다. 그 사랑은 소명을 흐리게 만들었다. 한 여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웃 사랑’을 밀어내어버린 것이다. 백형기는 슈바이처를 흠모하던 자기가 싫어졌다. 그렇게 살아갈 힘을 잃어버렸다. 그는 마음을 바꾸어 졸업예정자로 대구 계산동에 있는 달성문학사에 입사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목회자가 되려던 꿈이 회사원으로 탈바꿈했다. 아직도 그는 정아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회사는 월간 종합문예지 『달성문학』을 발행하고 시집이나 소설집도 출판했다. 형기는 취재와 편집을 겸하고 있었고, 대표 이사는 서울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이었다. 형기는 잡지사 일이 즐거웠다. 시인·작가·화가를 비롯한 예술인과 저명인사들을 만나 취재하고 책이 나오면 지인들로부터 글을 잘 읽었다는 찬사를 들었다. 퇴근길에는 동료들과 어김없이 염매시장 ‘마산집’을 찾아 술잔을 기울였다. 술에 취해 하숙집으로 돌아오면 그는 사랑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며 아픈 가슴에 울었다.
그러나 자고 나면 새 일이 기다리는 것이 고마웠다. 백형기가 빼놓지 않고 거의 매일 들리던 곳은 당시 문단의 중심이었던 향촌동 골목이었다. 다방이나 술집에서 원로 문인들과 자리를 같이할 때면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그들은 추억담을 늘어놓았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나면서 향촌동, 북성로 일대에는 시인 박두진, 구상, 작곡가 김동진, 화가 이중섭 등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들이 피난살이를 위해 모여들었다. 작가들이 향촌동 일대에서 문학과 예술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던 그 흔적들은 70년대까지도 남아있었다.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가 출판된 꽃자리 다방, 전쟁 당시 외신들이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고 타전했던 르네상스 음악감상실, 김광섭, 조지훈, 박목월 등 종군 문인들의 합숙소나 다름없었다는 감나무집(술집) 등등······.
지금은 상가들이 오밀조밀하고 좁다란 옛 상업은행 골목길이 그때는 이른바 ‘향촌동 시대’를 풍미하던 주무대였다. 구상 시인이 단골로 묵던 화월여관 골목 앞에 화가 이중섭이 드나들던 백록다방이 있었고, 북성로 쪽 모퉁이에 이효상의 출판기념회가 열린 모나미 다방이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그랜드피아노를 비치한 음악다실 백조, 그리고 르네상스 남쪽 골목 끝에 젊은 작가들의 문화살롱으로 이용되던 녹향이 있었고 그 2층에 곤도주점이 자리했다. 피란 시절 음악감상실과 다방에 앉아 잿빛 시름을 피워 올리던 문인들은 해거름이면 단골 술집에 모여앉아 막걸리 향연을 벌였다. 향촌동 일대의 술집은 물론 종로초등학교 옆 감나무집, 동성로의 석류나무집, 향교 건너편의 말대가리집 등은 문인들이 매일같이 들러 술을 즐기던 고향집 같은 곳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고 누가 술값을 내는지도 몰랐다. 궁핍한 전란 속에 밥은 굶어도 술자리는 놓칠 수 없는 낭만이 흘렀다. 그때는 대구 막걸리는 맛도 진국이었고, 외상술을 탓하지 않을 만큼 술집 주모의 인심도 후했다. 감나무집은 영남일보 주필이었던 구상 시인이 터줏대감이었다. 그는 이 집에서 문인들이 마신 술값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동성로에 자리 잡은 석류나무집도 창공구락부를 비롯한 피란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석양이 곱던 어느 날 저녁 무렵에 거제 포로수용소에 있던 김수영 시인이 염색한 미군복과 군화 차림으로 석류나무집에 나타났다. 술상을 마주하고 있던 마해송, 조지훈, 최인욱 등이 그를 반겼고 그가 겪은 수용소 얘기를 들었다. 피란의 북새통에서도 다방은 좀 더 격조 있는 문화행사의 주요 공간이었다. 동성로의 아담다방(후일 오리온다방)은 육군종군작가단의 산실이었다. 여류작가 전숙희가 문을 연 향수다방에서는 조지훈의 첫 시집 『풀잎단장』과 김소운의 수필집 『목근통신』, 유치환의 시집 『보병과 더불어』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중섭이 담뱃갑 은박지에 못으로 그림을 그리던 백록다방은 경북여고 동기생인 정복향, 안윤주 두 인텔리 과부가 경영주였다. 주인의 빼어난 미모와 지적인 용모가 숱한 문인들을 사로잡았다. ‘음악은 르네상스에서, 차와 대화는 백록에서’란 말이 나돌 정도였다.
지난날의 꿈은 흐려져도 교회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백형기는 주일예배를 마치고 나서는 교회에서 가까운 청라언덕에 올라 고향을 그리며 설자를 떠올렸다. 청라언덕은 대구가 고향인 작곡가 박태준(朴泰俊, 1901~1986)의 애절한 사랑이 깃든 곳이다. 언덕 중앙에 있는 미국 선교사의 붉은 벽돌집에는 푸른(靑) 담쟁이(蘿)넝쿨이 휘감겨있다. 그때 국민가요처럼 불리던 ‘동무생각(思友)’은 대구 계성학교를 다녔던 박태준이 마산 창신학교의 음악 교사로 있을 무렵 만들어진 노래이다. 그가 국어 교사 이은상에게 자기의 짝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자 노산이 노랫말을 만들고, 박태준이 곡을 붙인 것이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백합화는 박태준이 사랑했던 신명학교 여학생으로 알려졌다.
백형기는 내게도 터놓고 사랑을 이야기할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흘러간 기억을 되씹고 있었다. 설자는 이제 형기에게 져버린 ‘백합꽃’이 되었다. 그녀의 소식은 들을 수도 없고 언제쯤 만날 기약도 없는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대학시절 어느 여름방학 때 귀향 열차 안에서 만났던 한 여학생과의 사랑의 기억은 아직도 내려놓지 못했다. 그 추억은 담쟁이넝쿨처럼 그의 가슴에 단단히 얽혀있다. 백형기는 회사원이 되고부터 술이 많이 늘었다. 술자리를 함께하지 않으면 동료들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그들과 호흡을 같이할 수 없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로 인해 교회와의 거리는 멀어져 있었다. 어쩌다 토·일요일에 멀리 취재를 나갈 때면 주일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기회를 보아서 현지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지만 그것도 제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백형기는 지난 3월 초, 남해고속도로에서 당한 교통사고가 시간이 지날수록 후유증이 심하게 나타나 한 달간 회사를 쉬며 물리치료를 받았다.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금 출근할 때였다. 출석하는 교회 앞에는 5월 말에 심령 대 부흥회를 개최한다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온 교인들은 마음을 모아 특별새벽기도회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옛날처럼 교회에 열심을 내지는 못했지만 1년에 한 번 열리는 부흥집회에는 꼭 참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한 지는 어느새 3년이 지났다.
그는 퇴근길에 첫날 저녁 부흥집회에 참석했다.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간절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부흥회 준비를 위해 마음을 모아 기도하지도 못했다. 시작 시간이 되었는데도 복음송과 찬송가를 계속 부르면서 더 많은 사람이 모이기를 기다려 예배가 시작되었다. 부흥회 설교는 백형기에게 새로운 것이 별로 없었다. 신앙의 기본을 되짚고 성도들이 인도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쉽게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날 부흥강사의 말씀 가운데 ‘자는 자여 어찜이뇨’(요나1:6)라는 말씀에 귀가 번쩍 뜨였다. 처음에는 말씀을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시 졸았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이 말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백성이 회개하도록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하는 요나를 보고 꾸짖는 선장의 말이다. 요나는 그때 큰 폭풍을 만나 파선할 위기에 처한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부흥강사의 말씀은 그동안 그가 잊어버리고 있던 꿈을 흔들어 깨웠다.
지난해 가을엔 동료들과 함께 바다낚시를 갔다가 통영 앞바다에서 낚싯배가 뒤집히는 사고를 당했다. 그때 백형기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생각하다가 얼마 후에는 지난 일을 잊어버렸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나 지리산 종주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남해고속도로에서 또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잇달아 대형 사고를 당한 것은 얼핏 주님의 부르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부흥회 말씀을 들으면서 현재의 삶에 안주한다면 더 큰 어려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제는 어디든지 가서 어려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가슴은 다시 달아올랐다! 세상에서 귀하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0년 만에 외삼촌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야곱은 섬기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여 벧엘로 올라갔다.(창세기35:1-7)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먼저 지난날의 허물을 말끔히 청산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를 붙잡고 있는 그림 같은 기억들은 오직 한 권 ‘마지막 일기장’ 속에 앙금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일기장을 태워버리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도저히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는 부흥회 이후로 그때 들었던 말씀이 되울려 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 백형기는 지난날의 서원을 이행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여름이 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