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작은 기쁨과의 우연한 만남(정윤수)
“큰 슬픔을 견디기 위해서 반드시 그만한 크기의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작은 기쁨 하나가 큰 슬픔을 견디게 합니다. 우리는 작은 기쁨에 대하여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그럭저럭 안정되고 이만하면 살 만한 게 아닌가 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자기가 딛고 있는 일상의 발판이 얇은 살얼음판이었음을, 그리하여 대번에 그 얇은 얼음이 깨지고 급기야 걷잡을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빠져들 수 있음을 냉혹하리만치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잔인하다.
얼핏 보면 그가 다루는 이야기는 너무도 소소해서, 아침에 교통체증에 짜증을 내고, 점심 때 맛없는 햄버거를 우걱우걱 씹어먹고, 저녁 때 푹 꺼진 소파에 몸을 파묻고 토크쇼나 보고 있는, 그런 현대의 지루한 나날에 불과하다. 그런데 느리게 찍힌 지루한 필름 같은 그 소설 안에는 저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사상가가 묵시록적인 예언으로 다루고 있는 현대의 심각한 찰과상, 그 상처, 그로 인해 서서히 배어 나오는 눈물이나 심지어는 핏자국까지도 여지없이 흘러나온다.
사형수 신영복이 감옥에서 기다린 것
스티븐 킹처럼 아예 대놓고 현대 도시의 평범한 일상과 그 안에 도사린 섬뜩한 괴물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쟁투 같은 소설이라면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읽었기 때문에 그 체감의 공포가 크지 않을 텐데, 레이먼드 카버는 지금 이 순간, 도시의 주택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느리고 지루한 풍경을 그리되, 종막에 이르면 어느덧 그 풍경이 찢어지면서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심리적 괴물들이 비틀거리며 출몰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를테면 서서히 목을 죄어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심리적 괴물이 다름 아닌 나 자신, 내 모습, 내가 한사코 부정하고자 하는 내 안의, 죽여버리고 싶은 내 또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레이먼드 카버는 냉혈한인가. 악한이 등장하고 심지어 진짜 괴물이나 좀비가 등장해서 그의 소설이나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는 늘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물처럼 흘러넘쳐도 스티븐 킹이 결코 악한이 아니듯이, 레이먼드 카버의 피도 따뜻한 사람이다. 결국 소설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는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 덧붙일 것도 없는 얘기지만 그 눈물은 독자, 곧 당신의 눈물이다.
여기 빵장수 이야기가 있다. 아니, 그 전에 어느 부부 얘기를 하는 게 더 낫겠다. 이 부부는 이 세상의 모든 대도시의 부부들이 그렇듯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부부다. 그들이 마주한 삶의 여러 이유들이 그들을 밀어내기 때문에 그들은 부부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들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
이 아이의 생일날, 불행하게도 아들은 아침에 학교를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아이는 일단 집에 와서는 침대에 좀 누워 있겠다고 했고, 또 그렇게 별 일 없다는 듯 누워 있었다. 그날은 아이의 생일이었고 엄마는 동네 빵가게에 큼직한 생일 축하 케이크를 주문했다. 저녁에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장난감을 선물하고, 아이는 인형을 끌어안고 제 방에 가서 자고, 어쩌면 부부는 잊어버린 행동이라서 어떻게 할 줄 모른 채 일단 서로의 몸을 어색하게 만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살얼음이 깨지기 시작한다.
아이는 깨어나지 못한다.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부부지만, 아이가 깨어나지 못하는 상황 앞에서는 만사가 정지된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하고 온갖 검사와 치료를 받아 보지만 아이는 죽은 듯 잠에 빠져 있다. 의사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여러 수치가 아이가 걱정할 단계가 아님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 말이 잠시 위안이 되기는 해도, 그러나 어쩌랴, 아이는 깨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간다.
한편, 빵가게 주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오른 상태다. 이런 손님이 한둘이 아닌데, 오늘도 고약한 손님한테 된통 걸렸다고 판단한 것이다. 생일이다 승진이다 뭐다 해서 고급 케이크를 주문해 놓고는 찾아가지 않는 손님 말이다. 정성껏 만든 것은 고사하고 그것을 만드는 데 들어간 시간과 비용과 재료 등등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케이크를 뭉개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혹시 찾으러 오지 않을까 기다린다. 하지만 주문자는 오지 않고, 결국 빵가게 주인은 전화를 건다. 왜 주문을 해놓고 찾아가지 않냐고 화를 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받지 않는다. 그렇게 몇 번 걸다가 점점 화가 난 주인은 응답 기능이 있는 전화기에 화를 내기 시작한다. 급기야 욕설도 하게 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아이의 입원과 간호에 필요한 물품들을 가지러 잠시 집에 들렀던 엄마는 응답 전화기의 내용을 듣고는 분노가 치민다. 아이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깟 생일 케이크 때문에 욕설을 들어야 하다니, 이 어처구니 없는 현실이 화가 나는 것이다.
결국 안타깝게도 아이는 깊은 밤에 죽어간다. 다행이라면, 상처나 죽음에 맞서 격렬한 몸부림을 치다가 떠나간 게 아니라, 그저 자는 듯 가만히 누워 있다가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나간 것이다. 부부는 거대한 슬픔, 표현도 하기 어려운 슬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그래도 아직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아이의 장례를 위해 사소한 일들을 해야만 한다. 그런 일들을 위해 잠시 병원을 나섰던 부부는 일찍 문을 여는 빵가게에 들어서게 된다. 그제야 생일 케이크가 생각났고 주인도 이 부부가 방금 겪은 죽음을 알게 된다. 주인은 갓 구운 빵을 건넨다. 엄마는 롤빵을 세 개나 집어 먹는다. 주인이 말한다.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은 될 거요.”
앞날이 창창했던 20대 후반의 젊은 경제학도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어두컴컴한 독방, 견뎌야 할 것은 무지막지하게 놓여 있는 검은 시간들, 그리고 열패감과 두려움들. 그런데 아침이 되자, 작은 창문으로 햇살 하나가 들어온다. 신문지 크기만한 햇살이 한 시간쯤 머물다 사라진다. 신영복은 그 햇살을 또 기다린다. 다음 날, 작은 창문에 의하여 네모나게 잘린 햇살이 또 찾아온다. 그 햇살을 무릎에 앉히고 그 위에 책 하나를 얹어서 사형수 신영복은 책을 읽는다. 그렇게 하여 20여년을 버틴 것이다. 신영복은 쓴다.
“큰 슬픔을 견디기 위해서 반드시 그만한 크기의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작은 기쁨 하나가 큰 슬픔을 견디게 합니다. 우리는 작은 기쁨에 대하여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큰 슬픔에 절망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일상은 작은 기쁨과 우연한 만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5·18 광주항쟁 37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역사에 남을 만한 연설을 했다. 또, 모두가 지켜봤듯이, 눈물을 채 닦지도 않은 채 걸어가서 흐느끼는 유족을 깊은 마음으로 위로했다. 그렇게 가만히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역사적 순간이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노래를 했다.
나는 이미 한 해 전에 이 지면에서 우리들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하여 쓴 바 있으므로 오늘은 그 얘기를 줄였다. 대신, 그 노래가 울려퍼지던 순간의 풍경을 생각했다. ‘큰 슬픔을 견디기 위해서 반드시 그만한 크기의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공감과 위로와 존중. 누군가의 슬픔을,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의 슬픔임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스러져간 모든 슬픔들에 대한 연대인 것을.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