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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8번 말씀
제목 : 나귀를 타신 왕
본문 : 요 12:12-19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 인줄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아멘.
드디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요한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하기 전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를 그 앞에 끼워 넣음으로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암시했던 것을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계신 거라 그랬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그분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이야말로 참 제사장이요, 참 선지자요 참 왕이라는 것을 입증하셨어요. 그런 하나님의 인정하심은 원수의 목전에서 잔칫상을 베푸시는 행위였고, 그렇게 낮아지고 죽는 모습이 결국 하나님 나라의 승리의 삶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실제화 하여 살아내야 하는 성도의 대표로 그 자리에 참여했던 거라 그랬죠? 모든 이들이 그녀를 향해서 손가락질을 하고 그녀를 버렸어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 세상의 힘을 모두 주님 앞에 내어놓고 자신의 영광인 머리카락을 주님의 발 아래로 내려놓았던 그녀의 행위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바보 같아 보였던 것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고 이 땅을 작은 예수로 살아가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의 삶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던 거라 그랬죠? 그리고 그녀의 그러한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대로 반영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질 때 이 여인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질 것이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한 거라고 제가 설명해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에서 이미 예견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놓는 그러한 보잘 것 없고 연약한 모습으로 죽으셔야 돼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리아의 향유 도유사건에서 예고된 예수님의 죽음의 행진이 오늘 본문에서 이제 실제화 되어서 나타나는데 이렇게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그림으로 한번 돌아가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근거해서 절기 때마다, 특히 유대인의 세 가지 절기, 아주 중요한 세 가지 절기가 있죠? 그죠? 초막절, 장막절 그리고 유월절 오순절 그렇게 세 절기 때는 특히 더 그러해야 했지만 모든 절기에 의무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야 했어요. 성인 남자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고 나머지 식구들도 최소한의 인원만 집에 남겨두고 대부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명절을 지켰습니다. 절기는 명절이니까요.
유대 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유대인의 수가 270만 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숫자에요. 그 당시 인구로 하면. 지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소식을 듣고 그 성 입구에서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향해 환호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다고 그래요.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이제 구원하소서!’ 라는 뜻이에요. 지금 구원하소서! 그 단어가 시편 118편에 나오는데요 한번 가볼까요?
시 118:25-27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찌어다
25절에 있는 ‘이제 구원하소서!’ 가 호시아나 라는 히브리어거든요. 지금 유대인들이 바로 그 단어를 주님을 향해 큰 소리로 반복하여 연호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이들은 그 호산나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이 시편 118편의 호시아나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 호시아나에요. 27절에 보면요 하나님께서 제단 뿔에 희생을 매셨다, 라고 나오죠, 그죠? 여러분 제단 뿔 하면 생각나는 게 있으시죠? 도피성이죠.
성경은 아담 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을 살인자라 규명합니다. 살인자라고 불러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행복과 만족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 내재된 것만으로는 그것을 다 채울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이루어지기까지 필요한 하나님의 생명력만을 인간 안에 내재시켜놓고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다 끊어버린 상태란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내재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생명력을 다 쓰게 되면 인간들은 그냥 다 죽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을 뿌리 뽑힌 꽃, 뿌리 뽑힌 나무라고 얘기한다. 그랬죠? 보기에는 살아있으나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러한 인간들은 자기 이외에 다른 이들의 것을 탈취하여 자신의 행복을 찾도록 되어 있어요. 그건 자동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을 경쟁자요 원수로 여기게 된다고 그랬죠? 그건 미움입니다. 근데 성경이 요한 1서에 보면 형제들 미워하는 자는 전부 살인한 자라, 그러죠? 살인으로 간주할 것이다, 가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전부 살인자다. 살인한 자다, 라고 이야기한단 말에요. 따라서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전부 살인자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살인자들은 모두 사형이에요. 그것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야 돼요. 그 사람들을 죽을 때까지 돌로 때려서 죽여야 됩니다. 그게 살인자들의 형벌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확정적 고의나 미필적 고의가 아닌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율법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지 않고 죽음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하나 마련해놓으셨어요. 그것이 바로 도피성으로 피해서 제단의 뿔을 잡는 거였단 말입니다. 그것은 가인의 후손들로 칭해지는 죄인들 그 죄인들은 모두 다 가인처럼 고의적인 살인자들이지만, 우리 창세기 할 때 배웠죠? 가인은 아벨을 일부러 들로 가자, 해서 데리고 나가서 죽였단 말에요. 그래서 가인을 최초의 고의적 살인자로 표기를 하고 있잖아요. 그건 이유가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 가인의 후손들은 전부 고의적 살인자들이지만 이 이외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고의적 살인자들의 명단에서 그 이름을 빼내서 도피성, 예수를 상징하는 도피성에서의 구원의 기회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친절한 설명이었단 말이에요. 시편 118편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죄인들은 호산나, 호시아나를 외쳐야 되는 긴박한 지경에 빠져있는 자들이에요. 안 그러면 곧 죽거든요. 살인자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인간은 사실 호산나, 호산나를 외쳐야 돼요. 쉬운 말로 하나님 살려주세요! 라는 말이에요. 호산나는.
그들의 외침은 하나님, 우리 스스로는 절대 이 지긋지긋한 죄와 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좀 강구해주세요, 라는 외침이었어야 돼요. 그게 호산나거든요. 근데 지금 유대인들은 죄와 사망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호산나를 외치는 게 아니라 로마의 압제와 가난과 질병으로부터의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 거예요. 당시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어요. 자신들은 이미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구원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인데 지금 로마라는 악한 자들이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그 현실에서 자신들을 구원해달라는 게 호산나였어요. 메시아는 바로 그 역할을 하러 온다고 생각했단 말입니다. 그게 민속 메시아사상이라 그랬죠?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그렇게 기다렸단 말이에요. 그들은 자신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러 오신 하늘의 왕에게 이 세상 현실에서의 구원을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은 바로 그러한 자들이 예수를 죽이더라,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건 무서운 겁니다, 여러분.
그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있었어요. 사실 종려나무가지는 유월절에 흔드는 게 아니라 장막절, 초막절에 흔드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었느냐? 그건 2세기 전, 그로부터 2세기 전에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손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그들을 쫓아낸 유다 마카비, 캐톨릭 경전에는 마카비서가 있죠, 그죠? 그 마카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쥬다 마카비의 그 승리를 예수님에게 다시 한 번 기대하는 유대인들의 강한 열망이 담겨 있는 거였어요.
헬라가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다음에 네 나라로 갈라지죠? 그 중에 셀루코즈 왕조가 세운 나라가 시리아란 말에요. 그 시리아는 원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 유화정책을 썼었어요. 그래서 그들의 종교와 제사등을 인정해줬어요. 심지어 성전보수 자금까지도 대줬어요. 근데 BC 198년에 그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던 안티오쿠스 3세, 안티오쿠스 에피파테스 아버지거든요. 안티오쿠스 3세가 BC 190년에 로마를 공격했어요. 그런데 그가 로마에게 대패를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돈 오만 달란트를 로마에 물게 됐어요. 보상금으로. 그때부터 안티오쿠스 3세는 점령지의 물건을 수탈하기 시작했어요. 돈이 없으니까. 갚아야 되는데 돈이 없어요. 그래서 팔레스타인 땅은 그때부터 엄청난 식민지 백성으로써의 고난을 당하게 됐죠. 그들은 성전의 집기들이나 물건들을 모조리 빼앗아서 그 빚을 갚았어요. 왜냐하면 성전에 금이 많이 칠해져있었잖아요? 그래서 그거들을 전부 벗겨다가 빚을 갚기도 했고 심지어 유대인들의 솥 냄비 그릇까지 전부 뺏어다가 그것으로 빚을 갚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그의 아들인 안티오쿠스 4세 우리가 잘 아는 안티오쿠스 에피파테스가 왕이 되면서, 시리아의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이 엄청난 박해를 받기 시작해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죠? 정말 잔인했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오죽하면 다니엘서에 다니엘이 본 환상에 다 나와요. 다니엘서 8장 23절에 보면 헬라에서 갈라진 네 나라의 마지막 즈음에 한 왕이 일어나서 유대인을 파괴하고 멸할 것이다, 라는 대목이 나오죠? 그 한 왕이 바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요.
그는 정말 엄청나게 이스라엘을 괴롭혀요. 그 사람은 이스라엘의 종교를 뿌리뽑고 헬라의 종교로 바꾸려는 시도까지 했어요. 당시에 유대인들은 두 파로 갈라져있었어요. 오니아스파와 토비아스파였는데 오니아스파가 톨레미, 톨레미는 이집트 쪽이죠? 톨레미 쪽이었고 토피아스파가 쎌루코스, 시리아 쪽이었어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당시에 그 톨레미 쪽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세를 쫓아내버리고 그 동생 야손에게 돈을 받고서 대 제사장을 시켜줬어요. 근데 메넬라우스라는 사람이 돈을 더 내고 그 대 제사장직을 샀어요. 뺏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그러한 치리에 반발을 해서 어떻게 성경대로 아론의 후손에서, 사독계열에서 대 제사장이 나와야지 왜 네 맘대로 대 제사장을 임명하냐? 그러한 반발에서 유대인들이 한 집단으로 뭉쳤는데 그것이 바로 하시딤, 경건주의 운동이라는 거예요. 그 하시딤에서 바리새파가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바리새파를 여러분 성경에서 예수님이 뭐 독사의 새끼들아, 막 이렇게 욕했다고 너무 그렇게 우습게보시면 안 돼요. 바리새인들을요. 유대 경건주의 운동 하시딤 운동에서 나온 이들이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이에요.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 나중에 보면 하스모니안 왕조가 생기는데 그 하스모니안 왕조에서 제사장이, 대 제사장이 나오죠? 그러니까 정말 나중에 사독개열 사람들이 왜 하스모니안 왕조에서 제사장을 세우니? 그거는 우리가 도저히 용납 못한다. 제사장은 우리한테서 나와야지. 그래서 하스모니안 왕조가 사독개열 사람들을 핍박했죠? 그래서 그들이 광야로 도망간 게 에센파에요. 그래서 나중에 세례요한이 그 에센 파의 옷 약대 털옷을 입고 또 에센 파들이 먹었던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나타나죠. 그죠? 그들이 굉장히 경건한 삶을, 금욕적인 삶을 광야에서 살았던 사람이고. 그리고 그렇게 사독 계열이 나가가지고 그렇게 에센 파를, 하나의 파벌을 이루고 사니까 거기에 위기를 느낀 하스모니안 왕조 사람들이 우리가 진짜 사독 계열이다 그래서 사두개파를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센파가 그렇게 나오는 거죠? 이건 사족이니까.
그때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이집트를 치러 내려가요. 근데 로마의 방해로 회군을 해서 돌아오게 되었어요. 그가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서 돌아오고 있는데 팔레스타인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야손이 고 새를 못 참고 그 틈을 타서 메넬라우스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돈을 받고 세운 메넬라우스를 쫓아내고 대 제사장 직을 탈환을 했어요. 그 소식을 듣고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대노했겠죠. 그죠? 그래서 그 즉시 군사를 보내서 이스라엘에서 약탈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야손이 시리아의 군사가 팔레스타인에 들어오는 구실을 준 거죠.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BC 167년에 아폴리우스 장군을 비롯한 2만 명의 대군을 팔레스타인에 보내서 주둔을 시켰어요. 그리고는 안식일 할례 제사를 폐지시켰어요. 그리고 구약성경을 금서로 지정해버렸어요. 유대인들보고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거는요. 뿐만 아니라 절기도 지키면 안 되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절기 때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지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성전, 유일하게 예루살렘에 딱 하나 있는 성전에, 그 지성소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어요. 그 지성소가 어떤 곳인데 거기에다가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제우스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어요. 제사의 제물은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로 지내게 했어요. 그리고 제사가 끝나면 반드시 그 돼지를 먹게 했어요. 억지로. 요즘 같으면 좋죠, 뭐. 삼겹살 구워서 그냥 맛있게 한 잔 할 텐데.
그때 유대인들은 이 돼지고기를 시체 먹는 것보다 더 부정하게 여겼단 말입니다. 근데 그 돼지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돼지를 먹여버린 거예요. 그리고 성전에다가 창녀들을 둬서 성전으로 매춘 굴로 만들어버렸어요. 그 중에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어요. 그렇게 이스라엘이 엄청난 박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있을 때 마따디아라는 할아버지가 거기에 반발을 하고 시리아의 요구를 거부를 했어요. 그리고 그들의 뜻대로 돼지를 제물로 해서 제우스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나오는 유대인 하나를 칼로 찔러 죽여 버렸어요. 시리아 군사들이 당연히 마따디아를 붙잡을라고 했겠죠? 그래서 그 마따디아가, 그 할아버지가 시리아 군사들 몇 명을 죽여 버리고 아들 다섯을 데리고 산으로 도망을 쳤어요. 근데 얼마나 연로하신 분인지 삼 개월 있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래갖고 아들들이 이게 웬일이냐? 우리 아버지 때문에 산에 도망 왔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거 어떡해? 그러다가 셋째 아들 유다가 그 임무를 대신했죠. 근데 그 유다가 굉장한 전략가였고 싸움을 굉장히 잘하던 사람이었대요. 그래갖고 그 별명이 마카비인 거예요. 망치 같이 잘 싸웠다는 뜻이에요. 하시딤 사람들이 마따디아를 많이 따라 올라갔거든요. 그래서 그 하시딤 사람들을 규합을 해가지고 게릴라전을 벌였어요. 그래서 삼년 만에 시리아군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버렸어요. 기적이었어요, 그거는요. 그리고는 성전을 싹 청소를 하고 하나님께 다시 그 성전을 봉헌했죠. 그게 수전절이에요, 하누카. 그래서 요즘도 유대인들은 그 수전절 하누카를 지키죠? 그때에 유대인들은 바로 그 마카비, 쥬다 마카비를 메시아로 추앙을 했어요. 그 마카비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바로 오늘 본문에서처럼 유대인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지금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유다 마카비 같은 강력한 망치 같은 힘을 가진 정치적 군사적 힘을 가진 메시아를 우리는 기대하고 있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유월절에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자, 유대인들은 그렇게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팔레스타인 땅에 오병이어로 가지들의 눈앞에서 빵과 고기를 산더미처럼 만들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내고 풍랑까지 잠잠케하고 또 물위를 걷기까지 하는 어떤 이가 나타난 거예요. 그걸 직접 본 사람도 있고 직접 그 빵을 얻어먹은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생각했겠죠. 이가 바로 그이구나! 그래서 유대인들이 전부 모여가지고 예수님이 들어오실 때에 호산나, 호산나하고 외친 거예요. 환호를 했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 바리새인들과 대 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 등의 그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기득권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해가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호시탐탐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거죠.
그러니까 지금 호산나를 연호하면서 그분께 환호하는 무리들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자기들의 이 세상 삶에도 유익이 될 것이다. 분명히 유익이 될 것이다, 라는 확신 속에서 예수님을 환호하고 있는 거고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과 그분의 능력을 인정은 하되 그것이 자기들의 이 세상살이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분을 죽이려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은 그 예수님이 힘이 있는 것은 알겠는데 그 힘으로 자기들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그 예수님이 걸핏하면 자기들 보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그러니까, 그리고 너희들도 구원을 받아야 된다고 그러고 너희들도 회개해야 된다고 그러니까 이놈은 우리 편 아니구나. 그렇다면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이가 우리 편이 아니라면 죽여 버려야 되겠다, 라고 해서 죽인 거죠. 그러나 결국 며칠 뒤에 그 두 부류는 한 편이 되죠.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적과 그분의 능력이 자기들의 이 세상살이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의 말과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에요. 인간들은 그렇습니다. 기적 앞에서 인간들이 예수님 앞에 돌아온다고요? 하나님 앞에 돌아온다고요? 천만의 말씀. 그 기적이 나의 이 세상살이에 도움이 돼야 예수님께 돌아오는 척을 할 뿐이지 아무리 엄청난 기적이 자기 눈앞에 일어나도 그게 내 이 세상살이에 도움이 안 된다면 그들은 그것으로 예수를, 하나님을 죽여 버리는 것이 죄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시에 호산나를 외쳤던 동일한 목소리들이 며칠 뒤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외쳤던 거예요. 동일한 사람들이 고 며칠을 두고.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어요.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자신들의 종교행위나 신앙생활은 모두 이 세상에서의 유익을 얻어내는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구원은 이미 받았고 그러면 왜 이렇게 열심을 부리느냐? 이렇게 열심을 부려야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지. 그런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에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나오는 모든 헌신과 종교행위들은 반대급부를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미리 지불하는 선수금 정도로 치부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신을 하고 헌금을 하고 구제를 하고 선교를 하는 건,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저히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한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어내시어서 우리에게 선물로 부어주셨다는 확신 속에서 감사의 제물로 드리는 거지 감사의 제사로 드리는 것이지 절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지불의 행위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때려죽인 유대인들의 모습이었다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자주 이 세상에 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주여 이 지긋지긋한 죄의 세상과 옛 사람의 세상에서 하루속히 저를 좀 구원해주세요.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사는 것이 바로 성도의 신앙생활이어야 되는 거예요.
물론 우리는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나 지금 이 옛 사람의 껍데기를 우리가 입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옛 사람이 배태하고 출산하는 여러 가지 사망의 증상들을 지금 경험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때에 사도바울처럼 오호라 이 곤고한 몸에서 누가 나 좀 구원해줘! 그게 호산나라는 말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죄에서 나 좀 건져내주세요! 그 호산나를 외쳐야 되는데 우리는 이미 구원 받은 거니까 그거는 뭐 저 뒤로 미뤄놓고 이 땅에서 어떤 복을 받을까? 요 문제 해결, 나의 소원성취. 그런 의미에서 호산나를 외치는 놈들이 예수님을 때려죽인단 말입니다. 근데 대부분이 예수를 그렇게 믿고 있다니까요. 아마 예수님이 오늘날 교회라는 곳에 다시 나타나시면, 나귀를 타고 그렇게 허름한 모습으로 나타나시면 오늘날의 교회는 또 다시 그 예수를 때러죽을 것입니다. 당신 같은 예수는 필요 없다는 거죠. 이 세상살이에 도움이 되는 예수가 와야지 왜 너 같은 게 와갖고 자꾸 나한테 독사의 새끼라고 그러고 회개하라 그러는 거야? 때려죽일 거란 말입니다. 그건 굉장히 심각하고 무서운 거예요, 여러분.
주님은 힘 있는 자의 모습으로, 강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어요. 날 때부터 허름한 사관의 구유를 택했고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자라나셨어요. 그리고 겉모양도 시원치 않아서 사람들이 눈을 돌렸다고 그래요. 얼마나 못생겼으면 보기도 싫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약한 모습으로 왔어요. 그리고 결국에는 세상의 힘에 맞아 죽어 버렸어요. 세상을 이긴 게 아니라 세상에게 맞아 죽어 버렸다니까요. 가시적으로는.
그런데 그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 거예요. 그의 삶에 기름을 부르시는 거예요. 즐거운 기름. 희락의 기름을 하나님이 부으시는 거예요.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삶을 하나님이 칭찬하신 거예요. 자신의 약함으로 원수를 유익하게 하고 섬겨주는 삶을 기뻐하신 거예요. 하나님은 그렇게 약한 모습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 드셨어요. ‘이가 승리자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잖아요. 베드로의 설교에. 오른 손으로 높이 드셨어요. ‘이가 승리자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만이 힘이시며 하나님만이 계획하시고 하나님만이 실행하시므로 움직여지는 그 하나님 나라. 그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그분이 뜻하시고 계획하시며 행하시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순종해야 돼요.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심지어 죽기까지 순종해야 돼요.
하나님이 가장 강한 분이시고 가장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을 들어야 가장 선하게 가장 강하게 살 수 있는 거거든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최고의 선이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은 절대 당신의 백성들을 상하게 하거나 아프게 하실 분이 아니에요. 최고의 선이신 분이 최고의 선의 자리로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어가고 싶어하세요. 그런데 인격을 가지고 이성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들이, 도덕적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자신들에게 은혜로 부어주신 그들의 지혜와 힘을 자꾸 의지해서 살려고 하면 하나님 나라는 최고의 선으로 채워질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런 엄청난 능력을 부어주신 건, 하나님께 순종하는 도구로 쓰라고 주신 건데 그걸 하나님께 순종하는 도구로 쓰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힘으로 의지해버리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정말 좋은 걸 부으실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신 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여 자신들이 추구하여 생각하는 이 세상의 유익만을 채우려하는 자들의 그 어둡고 고단하고 추악한 모습들을 드러나게 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것을 경험하게 하시므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만들어진 자들의 절대 의존을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절대 의존. 그게 역사인 거예요. 그게 신앙생활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 자꾸 치를 떠셔야 돼요. 정떨어지는 일을 자꾸 경험하셔야 돼요. 그게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이 너무 좋으면 안 돼요. 성도는 이 세상이 너무 행복하면 안 돼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자가 하나님 앞에서 전부 약자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 하나님 앞에서 모든 자는 약자로 서야 돼요. 그걸 성경이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너에게 능력이 있어. 맞아. 그러나 그건 하나님이 주신 거야. 왜? 하나님께 순종하는 도구로 쓰라고, 방법으로 쓰라고 준 거야. 그러니까 너는 하나님 앞에서 티끌이어야 돼! 이것이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의 약자에요. 그렇게 옛 사람이 비워지고 부인이 돼야 진짜 강함이신 하나님이 그들을 처소로 삼아서 진짜 강자로 만들어내실 수 있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약자로 서는 훈련을 하다가 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앞에서의 강한 자, 거인,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어디서? 창세기 6장에서. 노아의 심판의 근거가 된 자들이 누구에요? 거인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 그거 다 좋은 거 아니에요? 우리가 다 추구하는 것들 아닙니까? 근데 하나님은 그것을 근거로 이놈들 싹 쓸어버려야 되겠다고 말씀하신다니까요. 창세기 6장 4절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강한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 내가 강한 자가 되어서 나귀새끼 같은 거 말고 백마 한 마리 보내주세요. 내가 강한 자가 되어서 당신 일 도와줄게요. 그 자가 심판의 근거가 되는 자입니다. 근데 오늘날은 예배당에서 전부, 나귀새끼는 전부 쫓아버리고 백마 보내주세요, 그러고 있는 거예요. 내가 강한 자가 되어서 당신일 도와줄 테니까 나를 좀 높여달라니까. 내가 좀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록 도와줘 봐요. 나에게 재산을 좀 부어줘 봐요. 그러면 내가 당신에게 유용한 도구가 될 거예요. 아니라니까요. 그걸 비워내야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의 정체인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약한 자로 서신 거예요.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내고 자기의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발을 닦아버리는 그런 순종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인 거예요. 죽기까지 순종했다.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하잖아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상을 그에게 차려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하나의 모형으로 집약되어 나타난 게 바로 오늘 본문인 거예요. 왕으로 당신의 나라인 이스라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거. 그것도 새끼나귀에요. 여러분 어른이 새끼나귀를 타면요 노새도 아니고 나귀를 타면 발이 땅에 닿습니다. 웬만큼 다리가 짧지 않고선 발이 땅에 닿아요. 어른들이 세발자전거 탄 거랑 비슷한 거예요. 그러니까 말이 나귀를 탄 거지 거의 자기 발로 이렇게 걸어가고 있는 거예요. ㅎㅎ. 어기적어기적. 아니면, 정 그 모습이 추해보이면 발을 살짝 들어서 엉거주춤 그 불쌍한 새끼나귀를 지금 타고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왕으로 오시는 주님이 왜 그런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흉하게 들어가시냔 말에요. 그게 왕의 모습으로 어울려요? 어기적어기적 세발자전거 타고 들어가는 모습이 왕의 모습으로 어울립니까? 그런데 그러한 예루살렘 입성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이 되었던 거예요. 오늘 본문 15절을 보시면 기록된 바, 라는 어구가 나오죠?
요 12: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요 말을 잘 기억해두세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 말은 지금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입성이 구약의 어딘가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말이죠? 어디에요? 스가랴서죠.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정확하게 나오죠?]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여기서 보장이라는 것은 요새, 본부로 돌아올 거란 예기에요]
지금 요한은 스가랴서를 인용해서 주님이 새끼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이유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거예요. 스가랴서의 이 전체의 내용을 하나로 요렇게 축약을 해서 한 줄만 인용을 한 거예요. 보시는 바와 같이 스가랴서는 나귀를 타신 주님의 입성을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고 그들의 활을 끊기 위함이다, 라고 밝히고 있어요.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은 곧 에브라임과 유다, 즉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의 나귀 행차는 이스라엘의 무장을 해체하기 위함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지금.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 밖에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유대주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10장 설명할 때 자세히 설명해드렸죠? 양의 우리와 선한 목자 설명할 때. 그 우리가 유대주의라 그랬잖아요. 거기서 불러내는 게 구원이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목자가 밖에서, 유대주의에서 양들을 불러내지 않습니까? 자, 그 유대주의 밖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화평이 전해질 것인데 그게 10절이잖아요? 그 방법이 언약의 피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11절에 그죠? 요한은 이 전체의 내용을 단 한 줄로 요약을 해서 인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나귀 행차는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힘을 얻어서 그 힘에 의해 그 힘으로 완성이 되는 화려한 세상 다윗 왕국의 재건을 꿈꾸는 유대주의를 부수고, 그게 무장해제에요. 그게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의 활과 말과 병거를 꺾는다는 말이 그 말이란 말입니다. 그 유대주의를 부수고, 무장 해제시키고 당신의 백성들, 그 유대주의 밖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참된 하늘의 메시아의 모습이 바로 나귀를 타고 오는 이의 모습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죠? 그런데 그분이 칼과 창이 아닌 겸손으로 언약의 피로 오신다, 그래요. 그 일을 이루러 오신다, 그래요. 그게 스가랴서의 예언이란 말에요. 스가랴서 9장 9절 이하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모형으로써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몇 가지 준수사항을 하달하셨어요. 신명기 17장에 나오죠? 16절 볼까요?
신 17: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들에게 말과 아내와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 그랬어요. 원래 왕은 그걸 많이 가지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들에게는 유독 그걸 많이 갖지 말라 그랬어요. 말 갖지 말고 아내 많이 갖지 말고 은금 많이 두지 말아라. 솔로몬은 나중에 이거 다 가졌죠? 와이프가 천 명이었어요. 은금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말과 병거가 너무나 많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솔로몬은 우상을 섬기다가 죽어요. 그가 천국 갔는지 지옥 갔는지 그런 건 궁금해 하지 마세요. 그냥 그러한 자도 그렇게 하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삶을 살다가 가는구나. 인간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그것만 배우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들에게 말과 아내와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한 건, 하나님의 백성들의 힘은 말이나 은금이나 여자, 거기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힘으로, 힘의 근거로 여기지만 성도들의 힘은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왕들에게 그걸 많이 못 갖게 한 거예요.
시 33:16-17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말은 구원에 있어서, 이 세상의 힘은 구원에 있어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구원이 온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가르쳐주기 위해 말 많이 못 두게 한 거예요. 너희들의 힘은 나니까 말 많이 두고 그것으로 힘 삼으려고 하지 마, 그런 거예요.
시 20:6-7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바로 이걸 가르쳐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거예요. 새끼나귀.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은 말로 되는 게 아니라 바로 새끼나귀를 타고 가는 이런 연약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완성되는 것이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는 거예요. 말 타고 안 오고.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는 방법이 이 세상의 힘을 이용해서 이 세상의 힘을 부어주는 게 오늘날 어떤 교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게 구원의 모습이라면, 그게 구원받은 자들의 가시적 모습이라면 예수님은 나귀타고 들어오면 안 되죠. 구원하러 들어오시는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오시면 안 되죠. 백마 타고 와야죠. 그리고 그들의 말과 병거와 활을 뺏어서 무장 해제를 시킬 게 아니라 그것들을 탱크 원자폭탄 자동소총으로 바꿔줘야죠. 그걸 왜 뺏어요? 세상의 힘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무장해제 시키러 오시면 안 돼요. 그리고 나귀새끼 같은 거 타고 오면 안 돼요. 근데 주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그들의 활과 칼과 병거를 뺏으러 오셨다 그래요. 그들을 무장해제 시키러 오셨대요. 그리고는 그게 구원이다, 라고 이야기해요. 성경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순종. 즉 약함을 들어서 당신의 강함으로 채우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하죠?
고후 12:9-10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게 무슨 말인지 이제 확실히 아시죠?]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예수도 약하셨고 그를 쫓는 성도들도 약했다 그래요. 사도들도 약했다 그래요. 우리도 약하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나 그 안에서 강함이 드러난다고 확실하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바울이 본 십자가의 모습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성도들의 모습이 이러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필두로 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나귀새끼를 탄 것처럼 우스꽝스럽고 연약해보이나 사실은 그 속에 하나님의 강함이 꽉 채워진 진짜 강한 자들이라는 거예요. 해서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행진을 마치시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밑에 뭐라고 붙어있는지 보세요.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 말이 무슨 말이에요? 내 생명을 막 미워하라는 거예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너 같은 거는 뒤져야 돼. 매일 그냥 거울보고 이렇게 외쳐야 돼요? 자기부인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욕심으로 꽉 차있는 그 옛 사람, 그 옛 사람에게 자꾸 먹이 줘서 그 옛 사람을 살찌우지 말라는 거예요. 그걸 미워하라는 거예요. 그 생명을. 그 자들이 그렇게 자기부인이 된 자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주의자들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사람들은 사망으로 던져질 거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생명을 부인하는 자들, 즉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들만이 영생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거예요. 바로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라는 알기 쉬운 그림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거예요. 따라서 그 예수 안에서 연합이 되어서 작은 예수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역시 이 세상에서는 나귀를 탄 우스꽝스럽고 연약한 모습으로 살다가 가게 되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느라 커다란 말을 타고 활보하는 가운데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을 쫓아서 져주고 섬겨주고 용서해주고 감싸주고 인내하면서 바로 새끼나귀를 탄 바보의 모습으로 이 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볼멘소리를 해요. 하나님, 챙피하게 나귀새끼가 뭡니까? 예수 믿는 사람 면 좀 세워주세요. 폼 나게 백마 한 마리 보내주세요. 그러면 사람들이 야, 예수 믿으면 너처럼 백마 타게 되는구나? 너처럼 세상의 힘 갖게 되는 거구나? 나도 예수 믿어야지. 이렇게 돌아올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백마 보내주세요. 고걸 기복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맞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나귀새끼 타고 들어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여러분이 백마를 요구하는데 비실비실한 나귀만 계속 보내주는 거예요. 이거 타고 가. 열 받죠? 남들은 전부 메르세데스 타고 가는데 나만 맨날 티코야. ㅎㅎ. 그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게 맞다, 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기 없는 이런 설교를 하고 있으니까 참 피차간에 힘이 빠지고 있습니다.
작년에 개봉된 한국영화 중에 <바보> 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차태현이 나오는 영화였는데. 차태현이 날 때부터 정신지체아로 태어나서 평생 동생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들을 위해서 희생만 하고 자기 것을 다 퍼주다가 결국은 그렇게 자기 거를 다 비우고 죽는 그런 영화에요. 아주 그냥 판에 박힌 흔한 이야기죠. 근데 전 그 영화를 보면서 참 바보의 삶이 아름답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Seven pounds>란 영화 보셨어요? 그 영화에서도 보면 그 주인공이 자기의 모든 것을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다 나눠주고 심지어는 나중에 눈하고 심장까지 떼 주고 죽어요. 그 영화가 끝나면서 제 아내와 제가 동시에 내뱉은 말이 우리도 저렇게 살자! 였어요. 여러분, 그마 만큼 그렇게 이 세상에서 나귀를 타고 가는 바로 같은 삶은 힘을 갖고 있고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곧 잊어버리죠. 그런 것을 볼 때는 감동을 하기도 하고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그러는데 곧 잊어버려요. 왜 그럴까요? 이 세상 권세 잡은 자가 그 삶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다른 것으로 감추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더 맛있어 보이고 더 달콤해 보이는 것들을 우리에게 위장하여 내어놓고 있기 때문에 이내 우리는 그걸 잊어버리고 백마를 쫓아 헐레벌떡 뛰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 삶이 정말 아름다운 삶이에요. 여러분은 그렇게 바보 같이 살다간 사람들을 존경하잖아요? 위인전집에 나온 모든 위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다 간사람 아닙니까? 그 위인전들을 볼 때는 나도 이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그랬다가 뒤돌아서자마자 그런 바보 같은 놈들처럼 살다가는 이 세상에서 한 달도 못 견뎌. 자식들한테는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우리가. 그건 뭔가 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삶의 매력 있음과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자꾸 우리 마음속에 각인을 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삶을 경험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삶이거든요.
여러분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의 힘을 축적하여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고 하는 그런 인간들의 욕심과 교만이 그 십자가의 삶을 자꾸 보잘 것 없는 것으로 폄하하고 감추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제시하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에 마음을 뺏기는 거예요. 그게 백마에요. 그게 유대주의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그 유대주의에서 빼내는 걸, 이름을 불러 끄집어내는 걸 구원이라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그리로 자꾸 넣어주겠다고 하는 목사들은 뭐냔 말에요, 도대체? 너 같은 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상관없어. 그거랑 똑같은 거 아니에요? 들어가면 죽는데 거기에 자꾸 들어가라 그러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냔 말에요. 그런데 바보 같이 아무런 분별능력이 없는 자들이 그냥 앞에서 이야기하는 건 다 옳겠거니 하고 멍하니 쫓아가요. 그게 자기들 책임이에요.
성공주의와 물질주의는 십자가의 삶과 완전히 반대쪽에서 십자가를 조롱해요. 그 둘은 사실 적대 관계에요. 그런데 오늘날 어떤 이들은 그 둘을 자꾸 화해시켜보려고 해요. 성공주의 물질주의 엘리트주의 자연주의 고지론은 십자가를 대적하는 대적이지 절대 화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마귀를 타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들을 공격해요.
시 2:1-9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자,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세상의 왕들이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세요.]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보세요.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군왕들은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오는 나귀 타고오시는 예수를 대적한단 말입니다. 나귀를 탄 연약한 예수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거 같애요. 세상의 힘이 그 연약함을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 나귀를 탄 예수라는 그 연약함이 세상의 강함이라는 그 군왕들의 힘을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파하는 거예요. 강력을 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요.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이 비웃으신다고 그러죠? 너희들이 그걸 강함이라고 지금 나한테 내놓는 거니? 개미들이 우리 앞에서 홍포를 입고 하얀 칼을 들고서 야, 너 한번 나랑 싸워볼래?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요? 그냥 찍 눌르잖아요? 그거랑 마찬가지인 거예요. 이 인간들의 강함이 도대체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하나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게 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나에게 백마만 보내주면 하나님의 그 강하심에 내가 뭔가 보탬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니까요.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과 지금 전쟁하자는 이야기와 똑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귀를 타신 예수가 철장으로 그 세상의 강함을 질그릇처럼 부수어버리신다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에요. 약함이 강함을 파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그의 나라가 땅 끝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완성이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도 거기에 대한 힌트가 나와요.
요 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 도다 하니라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그 그림의 마지막 절이거든요, 이게. 시편 2편 8절의 내용을 그대로 바리새인들이 이야기하고 있죠?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이 철장으로 질그릇을 부수어서 온 세상을 정복할 것이다, 라는 것을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이 예언하시는 거예요. 대 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한 사람이 죽어 한 나라가, 민족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예언하시는 것처럼 이렇게 바리새인의 입을 통하여 시편의 그 이야기를 이렇게 예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귀를 타고 입성하셔서 나귀새끼 같은 그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그 이야기는 창세기에서부터 예언이 되어 있어요.
창 49:10-11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실로는 구세주, 메시아에요.]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죠?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유언하는 대목인데 유다에게 유언을 하면서 그의 후손으로 실로, 즉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예언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메시아는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옷을 포도주와 포도즙에 빨 것이다, 그래요. NIV에 보면 포도즙은 Blood of Grapes,포도의 피라고 번역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메시아는 포도의 피에 자신의 옷을 빨게 될 것이다, 라는 얘기에요. 그런데 요한복음 15장 1절에 보면 나는 뭐라 그래요, 예수님이? 포도나무라 그러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주님은 당신 자신의 피로 당신 자신의 옷을 빠는 이로 오시는 거예요. 그것이 포도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새끼의 모습인 거예요.
자 보세요. 포도나무는 예수님이죠? 포도나무가 나귀새끼 위에 타고 있는 게 포도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새끼인 거예요. 요게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고 십자가가 포도이 피로 자기 옷을 적셔 어떤 이들의 옷을 하얗게 만들어주는 그 십자가의 이야기다, 라는 걸 창세기 49장에서부터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요한복음에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사복음서 모두에 공히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나귀는 전부 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에요. 그죠? 바로 창세기 49장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 나귀는 반드시 포도나무에 매여 있어야 돼요. 그 나귀새끼를 포도나무가 타고 와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포도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는, 다른 말로 나귀를 타고 오시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붉게 적시고 물들이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의 모습인 거예요. 그렇게 해서 피 묻은 저주의 옷은 모두 다 자신이 가져가고 아버지의 백성들은 새하얀 세마포 옷을 입히시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계 19:11-1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여기 드디어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오세요.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세요.]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여러분, 창세기 시편 스가랴 요한계시록 이게 다 이렇게 이어지세요? 그 단어들이? 그 개념들이? 결국 다 십자가만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죠? 시편 2편의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백마를 타고 철장으로 적들을 치고 있어요. 시편 1편의 그 아들, 그 아들이 철장으로 질그릇처럼 세상의 군왕들을 부순다고 그랬잖아요? 여기 지금 백마를 타고 온 그 예수가 세상의 힘을, 죄를, 악을 철장으로 치고 있어요. 근데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분의 이름이 충실과 진실과 하나님의 말씀이래요. 당연히 예수죠? 근데 그 뒤를 쫓아가는 하늘의 군대들은 전부 새하얀 세마포를 입고 있어요. 예수님과 똑같은 백마를 타고 가고 있는데. 그러니까 앞장서신 예수가 그들이 받아야 할 저주와 심판을 피로 전부 받아내고 가고 있고 그 뒤에 쫓아가는 이들이 하얗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모습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인 거예요. 바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포도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 그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포도 틀을 밟아서 피를 내어 자기 옷에 묻혀야 돼요. 근데 원래 그 예수님에 의해 밟혀야 되는 건, 하나님에 의해 밟혀야 되는 건, 여러분과 저였단 말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피가 튀어서, 우리의 옷에 튀어서 우리가 저주 받고 심판 받은 자로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야 되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에 자기가 들어가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밟힘을 당하시고 그 피로, 자신의 피로 자기의 옷을 적셔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나귀를 탄 예수인 거예요.
사 63:1-6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원래는 이래야 된단 말에요. 그리고 이 모습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 이외의 모든 인간들에게 일어날 일이에요. 그때 하나님이 백마를 타고 와서 이렇게 밟아버릴 것입니다. 피를 튀어서 그들의 옷에 튀게 하여 그 저주와 심판을 그대로 안고 불 못으로 들어가게 만드실 거예요. 우리도 이 지경에 처해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밟혀야 돼요. 우리가 밟혀야 되는 거예요. 우리의 피가 튀어 예수님과 우리의 옷을 적셔야 되는 건데 예수님이 자신을 밟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스바냐가 이렇게 멋지게 기록을 해놨습니다.
습 3:14-17
시온의 딸아 노래할찌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찌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사야서 63장의 이런 지경에 처해야 할 우리였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며, 노래처럼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는 자들이 되었어요. 어떻게? 나오잖아요? 15절에.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고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시므로 말미암아 너희들에게 떨어질 모든 형벌이 다 사라지고 심판과 저주가 전부 사라지게 되었다. 여기 보세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라는 단어가 그대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조금 아까 읽어본 스가랴서 9장에서는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그러면서 뭐라 그랬어요? 그분이 오시는데 그분이 너희들의 활과 칼과 병거를 무장해제 시키러 오실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그 무장 해제시키는 게 뭐가 그렇게 즐거운 일이라고 시온의 딸아 즐거워할 지어다! 그래요? 바로 그렇게 우리의 무장을 해제시켜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를 죄에서 건지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워해라, 노래해라,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힘을 실어주는 게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여러분을 무장 해제시켜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는. 야곱처럼 환도 뼈가 위골이 되어서 지팡이를,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도저히 걸어 다닐 수 없는 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복이기 때문에 시온의 딸아 노래할 지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분이 너의 힘을 빼버리실 거야. 너의 무장을 해제시킬 거야.
여러분 그걸 복이라고 믿으세요? 그럼 즐거워하셔야죠. 경기가 나빠지면 어때요? 하나님이 내 힘을 빼시는구나! 즐거워하셔야죠. 사기당하셨어요? 괜찮아요. 하나님은 내 힘을 빼시는구나. 즐거워하세요. 병이 걸리셨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내 육신의 힘마저 빼시는구나! 즐거워하세요. 그게 하나님의 전쟁인 거예요. 그래서 메시아가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는지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그렇다면, 그렇게 새끼나귀를 타시고, 다른 말로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부인하시며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우리의 모습은 이 땅에서 어떻게 보여야 될까요? 역시 나귀타고 가는 모습으로 보여야 돼요. 백마 타고 폼 나게 뛰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 믿는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실 거라고 착가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면 그 땅에서는 백마를 타고 다니실 거예요. 그러나 이 땅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감추어져 있는 이 땅에서는 여러분은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날 때 십자가로 나타난 것처럼 나귀새끼를 타는 모습으로 가셔야 돼요. 져주고 섬겨주고 용서하는 건 바보죠, 이 세상에서.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강함인 것입니다, 이게. 그래서 여러분은 그러한 모습으로 살 때 나귀새끼 타는 모습이 되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올바른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셔서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적심으로 원수들을 살려내셨어요. 근데 그 안에 연합되어, 연합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라 그랬어요? 아교로 붙인다는 뜻이죠? 떼어지지 않아요. 이걸 떼버리면 양쪽이 다 해를 입어요. 가끔 크레이지글루 같은 거 손에 이렇게 붙으면 이거 뗄 때 무지 애를 먹죠. 그죠? 그거 떼면은 어느 한쪽의 살점이 떨어지잖아요? 그거처럼 아교로 붙이는 거예요. 연합이라는 거는. 떨어질 수 없는 거예요. 그 예수와 연합이 되어 있는 우리는 당연히 나귀 타고 있는 예수처럼 나귀새끼 타고 이 땅에서 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마치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향해 닦달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수를 믿는 자신들의 인생은 나귀가 아닌 백마를 타신 예수님의 도움으로 풍성하고 멋지고 화려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예수가 나귀 타고 나타나면 금방 모른 척 해버릴 거 같아요. 아니에요, 여러분.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셨어요.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악을 멸하실 때 백마를 타고 오시기 전까지는 계속 나귀 타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세요. 왜?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요 은혜의 때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지금 백마 타고 오시면 여러분 다 죽어요. 여러분은 아직 그 껍데기를 못 벗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백마 타고 오시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예수님에게 백마를 타고 와달라는 게 이게 말이 되냔 말에요. 아직까지 내가 그 죄의 껍데기를 못 벗고 있는데 그 예수에게 백마를 타고 와달라니요? 나귀를 타고 오셔서 계속해서 주님 내 죄를 먹어주세요! 라고 얘기 해야죠. 호산나를 외쳐야지 백마를 보내주세요! 가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이용하여 이 세상의 힘을 얻어내겠다고 하는 자들은 빨리 나 좀 죽여주세요. 나 지옥 보내주세요, 라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아니면 자기도 지금 예수처럼 확실히 변했던가. 그러나 이 세상에서 그렇게 변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어요. 근데도 백마 타고 와달래요.
계시록 19장에서 읽으셨잖아요. 예수님이 백마 타고 오시면 철장으로 모든 악은 다 죽어야 돼요. 분명히 그분이 백마 타고 오실 날이 있을 거예요. 그러면 그 때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나게 돼요? 그때는 확실히 이 껍데기 다 벗을 자신 있으세요? 그래서 여러분의 지금의 삶 속에 백마 타고 철장을 가지고 오셔서 죄를 공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과 씨름이 자주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중에 여러분이 그 백마 타고 오신 예수님의 철장에 맞아 죽지 않게 만들기 위해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서 작은 전쟁들을 통과하며 그 껍데기 하나하나 벗으라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전쟁을 일으키고 씨름을 거시는 분이 바로 예수인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삶 속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철장으로 하루에도 열두 번씩 두드려 맞아야 되는 거예요. 성도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마지막 날에 백마 타신 예수에 의해, 철장에 의해 박살이 나게 될 그 옛 사람의 잔재들이 하나하나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삶에 고단함과 고난과 고통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물론 모든 이들이 다 세상의 힘을 진짜 힘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 나귀타고 가는 모습으로 자기 혼자 고난당하는 모습으로 가는 게 왠지 나만 손해 보는 것 같고 왠지 나만 이렇게 불이익 당하는 것 같고 참기 힘들 거예요. 그러나 그마만큼 하나님의 백성은 소수라는 걸 기억하세요. 그래서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길을 가셔야 되는 거예요. 지금 어줍지 않게 백마 타고 이 세상 활보하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가 지금도 나귀를 타고 있는데 내가 백마를 타다니요? 나도 나귀를 타야죠. 나도 나귀를 타고 다른 이들을 섬겨주고 용서하고 인내하고 또 나의 것을 비워 다른 이의 유익을 챙겨주고 하는 그런 바보 같은 나귀 타고 가는 모습. 그게 우리의 삶 속에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과 꾀.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이루어놓은 아담 적 열매들을 하나하나 쳐내세요. 그래서 우리는 바보처럼 사랑하고 바보처럼 섬기기도 하고 바보처럼 참아주고 바보처럼 용서하게 되는 거예요. 백마를 타신 예수님의 공격에 의해서 우리의 옛 자아가 조금씩 죽어가게 될 때에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나귀 타신 예수의 모습이 드러나는 거예요. 여러분이 백마를 탈 때마다 예수님이 돌격하여 여러분을 치시는 거예요. 그래서 때로는 야, 도대체 하나님이 조금만 올라서려고 그러면 밀어버리네! 온 세상이 낭떠러지야. 나에게는 어떻게 한 번도 기회라는 게 오질 않아? 그게 맞는 거예요. 예수만이 길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모든 다른 길은 낭떠러지여야 되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의 삶이 낭떠러지인지 아시겠어요? 왜 하나님이 걸핏하면 여러분을 밀어버리는지 아시겠어요? 조금 이렇게 올라가면 불안하죠? 하나님이 분명히 또 밀 텐데. 그럼 뭐 백발백중 조금 이따 또 밀어요. 그러면 찍 미끄러져가지고 또 하나님, 이럴 수가 있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왜 이놈의 구멍은 바늘 틈도 없어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때마다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거예요. 예수라는 길을 붙들고 올라와. 가장 안전한 길인 예수라는 길을 붙들고 올라와, 그러시는 거예요. 신앙생활은 그렇게 힘들어요. 어렵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열심히 격려해주면서 열심히 보듬어주면서 열심히 안아주면서 그렇게 가야 돼요. 그렇지 않고는 혼자서 절대 못 가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나귀 새끼 타고 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백마 탄 신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완성시키기 위해 지금 이 땅에서 그 과정을 통과 시키고 있는 거라는 걸 잊지 마세요. 이 찰나의 시간 동안에 잠깐 나귀 타고 가는 쪽팔리는 거 조금 경험하면 나중에 백마 타고 영원히 왕처럼 사시는 날이 곧 오실 것입니다. 잘 이기세요.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