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87) 차이와 진정성 - ⑤ 시의 성공/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 진
차이와 진정성
네이버 블로그 - 그리움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시]성공이란
⑤ 시의 성공
역사의 뒤로 사라진 묵은 주변부 양식을 빌어 현재에 대응하는 것도 차이 나는 세계로 가는 방안의 하나일 것이다.
고문체와 지방어로 자신의 주체적 세계관―자아와 공동체가 호혜적 연대감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세계를 표현하는 시인도 있다.
광음이 흐르는 물과 같아 못 뵈온 지가 벌써 여러 해 짧게라도 전해 올린 봉서 없사오니 어찌 동기간 간절한 정이라 하오리까 물 설고 사람마저 낯선 땅에서 남의 어버이 섬기고 남의 동기 따르는 아녀자 옛법이 원망스럽습니다 아지 못할 새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씨에 어머니 만강하옵시며 오라버니 댁 질아 두 오누이 두루 무탈하온지 알고 접습니다 아버지 중환이실 때 이리 구완 저리 구완 쓰라렸을 일들을 차마 저에게 보이지 않으려 하시던 마음 쓰심이 해를 건너 눈물 더하게 합니다 민물장어국이 오지다 하여 끼때 맞추어 올리시던 오라버니댁 손실이 더욱더욱 도타웠습니다 오라버니 한 번 친정걸음이 매양 어렵더니 이제금 용기를 내었습니다. 다가오는 청명 한식 아버지 산일 때는 기별하여 주시오소서 하로라도 열흘처럼 기다릴까 합니다 남은 말씀은 뵈온 뒤로 미루옵고 이만
동생 총총
―박태일, 「광음이 흐르는 물과 같아」 전문
서문, 본문, 결문을 갖춘 내간체 형식이다. 오늘의 도시사회에서 보기 어려운 봉서(封書)가 아닐 수 없다. 진정 어린 혈육지정이며 병구완이며 민물 장어 국과산(山) 제사(祭祀) 날을 맞아 혈육과 함께 하던 친정가의 정성이며, 친정 나들이가 그리운 젊은 부인 화자에겐 여간 그립고 귀하고 마음 설레게 하는 일이 아니다.
공동체적 연대감과 예의범절, 삶의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진 체험을 부녀자간의 내간체를 빈 방언들로 곡진하게 빚어낸다. 그로써 산업사회적 증상들- 서구화, 파편화, 해체, 합리와 등에 대응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근대시 양식을 기준으로는 탈 장르적 표정으로 읽을 수도 있겠거니와 이는 만해 한용운이 일제의 어두운 말을 견디며 그 속에 개체 헌신적, 공동체적 절대 화해의 세계를 담았던 양식이요, 백석 시인이 줄기차게 조명하고 목 놓아 불렀던 전통 민중 생활 언어라는 주변부 양식의 중심화를 통한 차이성 담보 전략이기도 하다 하겠다. 지금 여기에 오래 전의 전서와 풍속을 재현함으로써 독창성을 보이게 할 뿐 아니라 잘 짜여진 구성과 흥미와 교훈이란 효용성 또한 갖추고 있다.
전반적으로 소극적 고백 같기도 한 시로서, 사회적 성공 여부는 전통적 연대사회를 향한 자아의 진정성, 역설적으로 만해나 백석과의 차별성, 그리고 실제 오늘의 독자에게 받아들여지는 참신성과 현실감의 정도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 시뿐 아니라, 앞에 든 예시들도 자족적 존재로서의 자질과 반영성, 교훈·괘락의 효용성, 독특한 정서와 표현을 나름 갖추고 있다 할 수 있다. 성공 여부와 정도는 일반에 대한 특수성, 포현과 맥락의 진정성과 적합성에 달린 문제라 할 것이다.
시를 포함하는 모든 문화 양식은 사회와 역사로부터 제공된 정보들을 저 나름으로 처리하는 일종의 특수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의지적으로 짜이기도 하고 ,우연히 조합되기도 하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숱한 방식으로 뒤얽히고 분화한다.
근래 진화예술학자라 할 디사너예이크(Ellen Dissanayake)는 예술의 본질과 그 발생 배경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특별한 것 만들기(making special)란 말을 내세운다. 이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을 비범하고 주목할 만한 것으로 바꾸고 연출하고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원시시대에는 각각의 집단이 자신들의 고유한 방식을 개발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스스로 집단적 차이성과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가치와 내면의 의의가 존중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이 ‘특별한 것 만들기’가 차이 나는 인식과 그에 따른 차이 나는 표현으로 예술의 근골을 이루어갈 뿐 아니라 그 차이성의 강도가 가치판단의 주요 기준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뿐 아니다. 정신적이든 물리적이든 실존하는 존재는 새로운 상황, 새로운 지향성 속에서 실재한다. 그래서 존재란 무릇 차이에 의해 존재한다 할 수 있다. 우수한 시는 차이 나는 맥락과 표현에 의해 존재한다. 우수성의 척도는 차이성과 그 차이를 객관화하는 맥락과 표현의 수준에 따른 문제이다.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차이 나는 표현에 창의성과 진정성이 담보될 때 감동의 계기가 마련된다 할 수 있다.
차이는 공통성 밖에 있지만 공통성의 바탕으로 존재한다. 성공한 시는 매순간 해당 시각의 시적 체험에 걸맞은 차이와 공통의 황금비율에서 탄생한다. 진정성은 이 연금술을 가능하게 하는 윤활유이다. 순간적 체험을 영원의 성찰에 닿게 하고, 상상의 상황을 현실의 인간적 진실에 닿게 한다. 가상과 환상의 언어놀이가 내면적 삶의 항로를 열게 한다. 시란 언어로, 논리로 온전히 닿을 수 없는 자기의식(自己意識)의 인격체이며, 매순간의 인식, 감정, 의지, 미학 등으로 이루어진 언어 생명체인 것이다.
사회의 공평한 평가와 독자들의 열린 의식 또한 현재적 적격을 넘어서는, 성공한 시를 수수(授受)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요건임은 말할 나위 없는 일이라 하겠다.
< ‘차이나는 시쓰기, 차유의 시론(신진, 시문학사, 2019)’에서 옮겨 적음. (2020.10.14.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87) 차이와 진정성 - ⑤ 시의 성공/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 진|작성자 화룡이의 행복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