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90) 상상력 개발 유형학습 - ③ 상상력이란 정신을 드러내는 코드다/ 시인, 순천대학교 명예교수 송수권
③ 상상력이란 정신을 드러내는 코드다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 라
―한하운, 〈개구리〉 전문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청각 이미지로 빚어진 〈개구리〉의 의미는 무엇일까?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차용하여 우리 자모음을 순서대로 배열해 놓은 것은 제1 상상력으로 볼 때는 단순히 개구리의 울음소리로 깊은 의미가 없지만 제2 상상력으로 들어가면 깊은 의미의 지평이 열린다.
한하운은 천형(天刑)을 앓는 문둥이 시인이었다. 그의 유명한 시 “가도가도 전라도 길 붉은 황톳길 (…) 오늘도 버드나무 아래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하나 뭉그러졌다”에서 보듯이 소록도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가다 여름날 밤 어느 거름더미 밑에서 노숙을 하며 무논에서 서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쓴 시라는 체험적 사실을 가정해본다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하다. 이 시가 어릴 적 어머니 무릎 밑에서 “가갸”를 읽었던 추억의 장면을 재구성한 것이라는 점까지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감동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한하운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시를 썼다고 가정해보면 그 감동은 이처럼 진하게 오지 않는다. 한 편의 시는 결론적으로 그 사람의 인생체험을 담아낼 때 깊은 감동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상상력의 질은 같은 체험이라도 쓰는 사람의 독창적인 사유와 체험의 고백에서 그 감동의 깊이는 달라진다.
이런 연유에서 바슐라르는 상상력을 문학작품의 원동력이라 믿었으며 존재를 파악하는 근원적 힘이라고 보았다. 그는 물질의 4원소인 불, 물, 공기, 땅과 관련되어 본질을 해명하는 정신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슐라르의 ‘물질 상상력 이론’이다. 상상력이란 대상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경험에 의해 재구성하는 것이다.
한편 러스킨(J. Ruskin)이 구분한 통찰적 상상력, 연상적 상상력, 명상적 상상력, 또는 원체스터(Winchester)가 나눈 창조적 상상력, 연상적 상상력, 해석적 상상력 등 그 어떤 상상력이든, 상상력은 지적 발산능력에서 온다. 이 지적 발산능력은 곧 지식과 경험의 깊이를 말하는데, 우리는 보통 이 힘을 직관력이나 통찰력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사물의 깊이를 들여다보는 ‘지혜의 눈’이 비로소 생긴다. 그러므로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처럼 독서와 체험, 여행 등은 시 쓰기의 아주 중요한 요소다. 프랑스의 조각가 브르델(E. Bourdelle)은 모든 예술은 ‘지식의 열매’라고 규정했다. 마찬가지로 글쓰기 작업 혹은 시 창작은 시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 이상의 그 무엇을 그릴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다. 아무리 직관력이 뛰어나도 지식이 축적되어 있어야 훔치기도 가능하고 모방도 가능하다. 달리 말하면 시 창작이란 자기의 예술적 소양과 지식을 총체적으로 집약시켜 표현하는 정신적 작업이다. 영혼의 세계와 사물을 장악하는 힘, 즉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을 만들어야만 비로소 지적 상상력을 발산할 수 있다.
제주 귀양살이에서 그린 제주 수선화. 그보다는 〈세한도(歲寒圖)〉로 유명하고, 추사체(秋史體)로 자기 정신을 열어놓은 김정희(金正喜, 1788~1856)는 ‘난초를 그리는 비결’, 즉 〈사란결(寫蘭訣)에서 99를 얻고도 나머지 1푼 때문에 사이비 난초만 그리다가 입문은커녕 문전에서 서성거리고 만다고, 창작 정신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 1푼이란 난초를 치는 기법은 다 터득했으면서도 ‘자기 영혼이 실리지 않은 난초가 되어버린다’는 뜻과 같다. 이것이 곧 시인의 정서 속에 들어 있는 언어의 정신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정체성(identity)이다. 이것은 곧 그 시인의 시세계가 된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면 추사의 〈세한도〉는 59세 때 유배지 제주(대정골)에서 당시 연경에 유학하고 있던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 보낸 작품이라고 한다. ‘절후가 추워져야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구절을 패러디하여 기개를 보인 그림이다. 빈 오두막집 그리고 네 그루 소나무들은 참혹한 겨울의 시대를 견뎌내는 선비의 올곧은 정신세계를 그림으로 펼친 것이다. 이 그림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적적성성(寂寂惺惺)한 독특한 분위기는 그대로 추사의 정신이 된다. 추사의 정신을 표현한 그림으로 〈묵죽(墨竹)〉과 〈묵란(墨蘭)〉이 유명한데, 그중에서 〈묵죽〉을 언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가 되지 않을까 싶어 소개한다.
갈가마귀 울음 자욱히 잦아가는
언 하늘에
온통 시퍼런 청죽(靑竹)을 치겠다.
삭풍이여, 삭풍이여,
우리를 다시 한 몸으로 묶어라.
또 한 차례 땅속 깊은 뿌리들을 출렁이게 하고
우리들을 다시 한 뿌리로 묶어라.
그리고 지상에 홀로 남아
칼을 입에 물고 노래하는 가인(歌人)을
오래 머물게 하라.
절복(切腹)의 시대(時代)가 온다.
삽과 망치와 깃대를
땅속 깊이 매장하고, 삭풍 앞에 나서
입에 문 칼끝을 삼키면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절복의 시대가 온다
한 뿌리에서 올라온 수천의 잎
다 찢겨지고
헐벗은 나뭇가지에 언 하늘빛 환히 뿜을 때
언 하늘에다
죽(竹)을 치며, 죽(竹)을 치며
자신의 발등에다
스스로 얼음을 터뜨리며
스스로 맨발로 얼음 위를 딛는……
스스로 증명하는 이여.
증명하는 이여.
절복의 시대가 오고 있다.
―조정권, 〈山頂墓地 5〉 전문
위의 시에서 겨울 하늘에 청죽을 치는 행위는 맨발로 얼음을 딛는 초극의 정신을 표현한다. 입에 칼을 물고 포복하는 삶은 추사처럼 한 시대를 관통하는 삶의 정신이다. 그래서 시인은 “삽과 망치와 깃대를 땅속 깊이 매장하고” 삭풍 앞에 나서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절복의 시대가 온다고 예언한다. 예수의 ‘산상수훈(山上垂訓)’과도 같은 수난 받는 시대, 한 시인의 삶과 고통 그리고 정신세계의 깊이가 잘 그려져 있다.
우리말에 ‘맥도 모르고 침통만 흔든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맥을 잡을 줄 알아야 침을 놓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맥을 잡는 일은 독서(동서양 고전)의 깊이와 삶의 체험에서 온다. 위의 〈산정묘지 5〉는 〈세한도〉를 언어로 펼칠 때 탄생할 수 있는 그림임도 쉽게 알 수 있다. 혹은 막연한 추측일 수도 있겠지만 ‘초극적인 정신’에서는 코드가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곧 패러디를 차용하여 자기의 정신세계를 나타내고자 하는 데 불과하다. 그리고 많은 작품들을 텍스트로 사용할 때 비로소 눈이 열린다. 이때부터 창작행위가 가능한 길로 들어선다. 사자가 얼룩말을 사냥할 때 단번에 잡는 것은 오랜 경험으로 목을 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이다. 이것이 ‘사자굴신법(獅子掘伸法)’이다. 사자굴신법이란 곧 언어로 이 세계와 사물을 장악하는 힘을 말한다. 그것은 자기 체험에 쌓인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상상력의 유형을 만들어가며 이 유형 중 어느 한 패러다임에 자기 피를 투입시켜 새로운 영혼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때서야 우리는 그 시인이 새로운 시대의 언어를 창조했다고 믿으며, 그의 고뇌와 고통이야말로 값진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가운데 줄임 >
상상력(imagination)이란 글자 그대로 ‘이미지+이미지=이미저리’를 의미한다. 즉 언어로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말함인데, 이미지가 곧 ‘정신세계’를 뜻하는 말과 일치하는 것이 흥미롭다.
< ‘상상력 개발을 위한 유형학습, 시 창작 실기론(송수권, 문학사상, 2017)’에서 옮겨 적음. (2020.10.17.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90) 상상력 개발 유형학습 - ③ 상상력이란 정신을 드러내는 코드다/ 시인, 순천대학교 명예교수 송수권|작성자 화룡이의 행복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