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두 가지를 먼저 말씀드리자면 첫째는 계보의 왜곡 문제는 알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후대의 관념으로 당대의 생사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대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자신은 물론 그 아들들도 나이가 많은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국천왕 둘째아들이라고 하는데 첫째 부인의 자식들이 모두 나이들어 죽고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둘째 아들일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고국천왕도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고 했는데 원래 없었는지 혹은 나이가 들어 죽었는지 그 또한 알 수도 없습니다.
발기 이하의 형제들은 고국천왕과의 관계에서 몇 번째의 형제들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발기가 계수에게 쫓길 때에 '늙은 형을 해하려느냐' 외쳤던 것을 본다면 발기 또한 상당히 고령으로 보입니다.
고구려는 성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자유분방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피임에 대한 개념이나 필요성이 있지 않은 이상 형제간에도 2~30년의 연령차가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은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대략적으로 가정하여, 신대왕이 89년생 - 고국천왕 130년대생 - 산상왕 140년대생이라고 본다면 신대왕은 이들을 대략 40세 및 50세 정도에 얻었고, 고국천왕과 산상왕은 대략 5~60세 정도에 왕위에 오른 것이 됩니다. 이정도 나이는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고질도 고자를 대략 4~50대에 얻었던 것을 금석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을파소는 유리왕의 대신인 을소의 손자인데 을파소가 190년대에 등용 당시 이미 고령이었다고 해도 을소 또한 유리왕 당시 대신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고령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략적으로 을소는 아들을 50대에, 그 아들은 을파소를 또한 50대에 얻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단순히 손으로 볼 수 있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역해는 손자라고 해석했군요.)
뿐만 아니라 백제나 신라의 경우에도 상상하기 힘들 만큼 고령의 인물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얻기 위해 동방으로 사람을 보냈다는데, 동방인들이 장수하는 자가 많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들 동방으로 보낸데에는 그 이유가 있었겠죠.
어쨌든 결론적으로 신대왕과 그 아들들과의 관계는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입니다.
첫댓글 신대왕이 77세에 즉위했으니 부인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좀 희박하지 않을까 싶고 즉위 이후 공신들의 딸들을 맞아 낳은 아들들이 고국천왕,산상왕,계수가 아닐까요? 그러면 나름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발기는 즉위하기 이전에 낳은 아들이고..
남당유고를 연구하다보니 어머니가 같은 경우에도 장자와 계자가 3-40년 나이 차이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자가 50대 중후반까지 무분별하게 자식을 낳은 경우에는 10년을 더 못살기 어렵고, 장수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아버지의 경우에는 70대 후반까지 자식을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들이 손자, 증손자보다 어린 경우가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구도와 미추이사금입니다.
구도 - 옥모 - 조분 매(내해) - 우로, 아이혜
남당유고의 을파소의 생년을 살펴보니 139-203, 65세에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을두지의 후손이고 을어의 아들인데, 을어가 강직하여 외척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아니하여 면직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계보편에는 을포의 아들이고 을소의 손자라고 되어 있으므로 계보에 모순이 있습니다.
을두지가 유리명왕대의 인물인 것은 맞으나, 을소의 처가 마씨인 것을 보면 을소는 유리명왕대의 인물이 아닙니다.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하면서 중외대부로 임명하려하자 대정을 행할 수 없다고 하자 삼보를 합하여 국상의 지위로 합니다. 그래서 을포의 자식으로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을두지는 B.C.34-A.D.40년이니 을두지와 을소가 동일 인물은 아닙니다.
역시 을포와 을어는 동일 인물이 아닙니다. 또한 같은 직책을 지낸 것도 아니고, 을포는 삼보의 지위를 지낸데 비하여 을어는 태수의 직에 머물렀습니다.
확실히 다른 인물인데...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