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 계속)
송석원터도 마찬가지로 달랑 문설주만 두 개, 그것도 하나는 2/3 정도가 땅 속에 파묻힌 채로 남아있습니다.
오래된 사진으로 보면 이 문설주로부터 저택까지 거리가 상당한 것 같아
그 당시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송석원은 순종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의 저택으로 아방궁으로 불리웠는데
전우용 교수의 <근대의 사생활> 옥인동 윤덕영의 아방궁에서 보면 ‘윤덕영은 세 가지로 유명했다.
특별히 주문 제작한 모자가 아니면 맞지 않을 만큼 머리가 커서 ‘윤대갈’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이 하나요,
기생이나 여학생 첩을 옆에 끼고 ‘궁둥이를 두드리며 노는’ ‘고상한’ 취미가 둘이며, 옥인동의 저택이 셋이다.
그런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서로 연결돼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송석원은 해방후 언커크(UNCURK)란 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건물로 쓰이다
1966,4.5에 큰불이 나 소실되었다 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문설주 두 개만 달랑 남다니...
그러나 이런 속물적인 흥미보다도 송석원은 송석원시사(詩社),
인왕산 아래 옥류동 송석원(중심인물, 천수경의 집)에서 결성된 중인 중심의 문학단체로 옥계시사,
송석원시사라고 불리웠다 하고 백전이라는 전국적인 시회가 매년 한 번씩 열렸다 합니다.
이걸 위항(委巷=閭巷: 조선중인마을)문학이라 하는데 정조(1786)부터 순조(1818)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합니다.
통인시장. 도시락카페로 유명한 곳으로 관광객들이 많습니다.
도시락카페에서 한 개에 5백원짜리 엽전을 10개쯤 구입하여 빈 도시락을 들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먹을거리를 사 넣고
다시 도시락카페로 돌아와서 국과 밥을 보충해서 먹는 방식.
골라먹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지만 겨울에는 음식이 금방 식어버려 재미가 반감되는 느낌이고
기름 떡볶기는 여기서 먼저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통인시장을 뒤로 빠져나오면 정자가 하나 있는데 여기가 바로 노인정입니다.
남녀노소가 신구가 혼재되고도 별 이상한 느낌이 없이 잘 조화되는 곳이 바로 서촌입니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구두집이 하나 있고 유리에는 뒷굽, 밑창 수선이라 써 붙이고 속에서는 작은 망치 소리가 들려
고개를 기웃거리니 정말로 노인네가 구두를 수선해서 들고 나옵니다. 요즘 저런 집 쉽게 볼 수 있나요?
대오서점. 이 근방에는 10여개의 서점이 있었다 합니다.
최근까지 중고서적을 취급하는 마지막 남은 口자 형태의 한옥서점으로 책은 안 팔리더라도 옛 추억을 살리는 서점이었는데
이젠 카페로 바뀌어 구경을 하려면 최소한 1천원짜리 엽서라도 하나 사야한다고...
할머니가 계셨을 때는 딸기우유 하나 사다드리면 좋아하셨다 하는데...
배화여고로 올라가는 골목길. 셔터가 내려진 사진관 위 간판이 재미있습니다.
필(Feel)운동 사진관. 오래된 박스카메라와 손으로 흘려 쓴 서체가 세련됩니다.
필운대는 배화여고 본관 왼편 교사 뒤쪽에 있는데,
필운대 각자가 된 석벽과 교사 건물 뒷벽 사이는 좁은 공간밖에 없어 옹색하지 그지없어 보입니다.
삶의 팍팍함이 한 치의 여유를 갖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을까요?
필운은 우필운룡(右弼雲龍-임금을 오른쪽에서 보필)에서 따온 것으로 인왕산의 다른 이름이 필운산이었다 합니다.
이곳에 살던 이항복이 필운을 자신의 호로 삼고 이를 석벽에 써놓았고
고종때 영의정이던 그의 후손 이유원이 이를 새겨 넣었다 합니다.
배화여고 본관 우측에는 조세핀 필 캠벨 여사의 흉상이 있고
선교사 주택으로 쓰던 생활관이 있는데 건축양식이 독특하고 특히 기와 형태가 이국적입니다.
이제 서촌 초입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입니다.
길가에 세종대왕 나신 곳
‘서울 북부 준수방(이 근처)에서 겨레의 성군이신 세종대왕이 태조 6년(1397) 태종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달랑 써 붙여 놓고 얌체 같이 ‘세종마을’ 음식문화의 거리라고 문을 세워 놓았습니다.
세종이 아무리 식성이 좋아서 육류가 꼭 끼어있는 음식을 하루 4끼나 드시고
비만에 나중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꼴이 되셨어도 이거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최소한도 준수방인 지를 좀 찾아 헤매는 노력이라도 한 다음에 이런 먹자골목 만들었어야 되능거 아닌감?
죄송한 마음을 간직한 채 골목으로 들어서면 그런 마음도 잠시, 배에서 체면 불구하고 회가 요동을 치게 만듭니다.
그중 몇 군데를 둘러보지요. 참고로 그날 하루에 다 들른 건 아니고요. 이전에 들렀던 곳 3곳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빚짜(BeeZza)라는 수제맥주와 피자집입니다.
작은 테이블 4개 정도 놓인 집으로 피자가 7-9 천 원대로 금방 구워 나와 양, 가격, 맛이 삼위일체로 좋습니다.
다만 수제맥주가 가격이 센 편입니다.
일반 맥주도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데 피자 맛에 용서가 됩니다. 맥주잔에 손가락을 넣으니 섹시한가요?
다음은 감자집입니다. 생감자를 깎아 급속냉동 시킨 뒤 튀긴 것 같은데
고깔 콘 같은 용기에 감자튀김을 담아 야외테이블 우산꽂이에 꽂아 놓습니다.
맥주잔은 파이렉스 500ml 계량컵이 대신하고요. 자잘한 거품으로 입술을 부드럽게 적시는 맛이 매력적입니다.
‘섹시해서 죄송합니다’, ‘청년장사꾼 교육생’,이라 등판에 쓴 걸 보는 재미와 한참 멀리 떨어진 화장실을 가는 고생은 덤.
서촌계단집. 이집은 제가 거의 혀의 감각이 마비가 될 즈음 들어가서 안주 맛을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사진처럼 서비스 홍합탕이 멋들어지고 동행한 사람 중 한분의 미각을 믿어 의심치 않으니
이집을 포함 시키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이집은 해산물을 주로 하는 집입니다. 되게 성의 읍네---
서촌을 돌아보는데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찾아가본 현장은 허겁지겁 살아온 우리의 근현대사의 실상을 보는 것 같아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촌이 각광을 받게 된 근저에는 우리 것, 우리 역사도 한몫했을 것이 당연한데
성의 없이 써놓은 표지판, 축대에 깔리고, 건물에 가리고, 잡초 속에서 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사유지 담장에 막히고, 고결함의 척도가 마치 돈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천박한 우리의 벌거벗은 속마음이 들어난 것 같아 그리 개운하진 않았습니다.
이곳에 오래 살고 계신 분들도 제가 찾아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분들이 허다하니
그걸 탓할 순 없겠지요.
그렇게 겉껍데기만 보고 살아가는 게 바로 우리들 삶의 실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닥다리 블로그
http://blog.daum.net/fotomani
첫댓글 피자하고 맥주 먹으러 한번 들러야겠네요~~
통인시장 바로 옆에 내가 어려서 살았던 체부동이 있는데 그곳엔 금천교시장이 있습니다
후라이판에 간장으로 구운 떡볶이의 일종인 '짠떡'이 유명하죠
맞습니다. 저기 피자집과 감자집, 서촌 계단집 모두 금천교시장 이제는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