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시
11월이 왔다. 한해가 지나감을 알리는 신호이다. 고대의 1년은 열 달이었으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曆)의 등장으로 12개월이 되었다. 영어의 ‘November’는 라틴어로 아홉을 지칭하는 ‘Novem’에서 나왔으나, 11월로 불린다. 어찌하든 그 순서는 마찬가지이다.
이즈음에 느끼는 감정은 나태주 시인의 시와 흡사하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아무도 감히 한 해가 가는 것이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간의 수고를 생각하면 버리기에 너무 아까운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마치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음을 전제하는 듯 자유롭다. 계절의 순환은 지속 가능할지 모르나, 지나간 시간의 강물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라고 시를 마무리한다.
이맘때쯤이면 손님을 부르고 싶다. 이곳 산동네 전철 역에서 만나면 된다. 절정이 지난 코스모스꽃밭을 가로질러, 단풍 우거진 한적한 공원과 삽상한 바람을 따라 여의천 변을 함께 걷고 싶다. 그런 후 따사로운 햇볕이 비추는 야외 식탁에 둘러앉아 먼 산 홍엽 풍경을 배경으로 식사도 하고 커피를 마시며, 그간의 안부를 묻고 정겨운 담소도 하고 싶다.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초대에 응할는지는 모르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그도 부르고 싶다. 이곳에서 그의 시 ‘11월의 손님’에 관해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한때 그의 시가 좋아 우리말로 옮겨보고 싶은 생각으로 틈틈이 번역도 해보았다. 그는 ‘가지 않은 길’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이다.
오래전 어느 여름, 뉴잉글랜드 뉴햄프셔(New Hampshire)주 데리(Derry) 소재의 그가 살았던 농장을 찾아간 일이 있다. 그는 1900년에서 1911년까지 이곳에 살면서 첫 번째 시집 ‘소년의 의지(A Boy’s Will)’와 두 번째 시집인 ‘보스턴 북쪽(North of Boston)’을 썼다. 첫 번째 시집에는 ‘11월의 손님’(My November Guest)이란 시가 나온다. 아마 그 농장으로 귀한 여자 손님이 찾아온 모양이다. 11월이라고 하지만 시의 분위기로 보아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느낌이다.
그 여자 손님은 일상적인 가을의 풍요보다 다소 황량한 풍경을 더 선호하는 듯 보인다. 아마 황량함에서 더한 아름다움을 찾는 심미안을 손님은 가졌을 것이다. 그는 겸손하게 손님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녀의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공감을 보인다. 이는 시인도 그런 황량한 아름다움을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며, 사실은 그곳에 대한 그녀의 아름다운 찬사보다 그 풍경 자체가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손님이란 ‘슬픔’을 ‘여인’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시인은 극심한 고통이나 슬픔을 11월에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가족사가 슬픔의 근원일 수 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들과 딸을, 이 시집을 출간하기 전에, 병으로 잃었다. 그 후 부인마저 암으로 사별하였고, 여동생의 죽음과 또 다른 아들의 자살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11월이면 매년 ‘슬픔’이 그를 찾아오는 셈이다. 그러함에도 슬픔은 그에게 자연을 이해하고 음미하는 성숙함을 가르쳤다. 시인의 시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세계는 시골 전원이며, 자연과 숲과 대지와 목초지여서, 우리를 들판과 목초지와 뉴잉글랜드의 시냇가로 초대한다.
그의 ‘나뭇잎과 꽃의 비교’(Leaves Compared With Flowers)란 시도 이 계절에 생각해 보기에 어울리는 작품이다. 흔히 우리가 두 대상을 비교할 때 내면의 아름다움보다는 겉모습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시인은 나무는 화려함이 없더라도 잎과 껍질만 있어도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임을 노래한다. 꽃은 낮 동안 아름답지만, 나뭇잎들은 밤이나 낮이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밤에 그 가치를 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꽃잎은 남자들이 추구하는 여성을 암시하고 나뭇잎들은 남성인 시인 자신을 나타낸다. 이 시의 화자는 꽃과 같이 화려한 삶보다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선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천박한 생활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기 극복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공허한 화려함보다는 내면으로 어둡게 침잠하기를 택하는 듯하다.
우리 중에도 꽃과 같이 외양이 화려한 ‘가진 자’와 잎과 껍질만의 ‘가난한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외양이 아무리 아름답고 힘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이 시에서와 같이 뿌리에 물과 신선한 공기와 비료를 주는 적절한 일을 그들이 게을리하면, 더 이상 꽃과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불행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곳에서 연유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그물이다. 그 순환의 여정에서 슬픔을 산출하는 고난과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도구가 시와 예술일 것이다. 흔히 우리는 사물의 겉모습에 익숙해져 내면세계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시인이나 작가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 작품은 공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 스산한 가을, 그의 시가 나의 것으로 바뀌어 간다. 불청객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불현듯 돌발성 난청이 왼쪽 소리를 앗아 갔다. 온갖 현대의학을 동원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이 연수에 이르니 의복같이 낡은 육신이 이곳저곳 찾는 곳은 한곳 뿐이다. 온 마디가 온전하지 못하니 늘어나는 것은 약봉지 더미이다. 이런 날은 신의 음료라는 넥타르와 그들의 식탁에 오르는 암브로시아를 구해서 음미하고 싶다.
10월이 풍요의 즐거움을 기리는 아름다운 달이라면, 11월은 냉혹한 겨울 준비를 위해 자신을 돌아보는 외롭고 처연한 칩거의 계절이다.
시인은 시련과 고난에도 “삶은 계속된다”(it goes on)라고 했다. 우리는 겨울 나그네 길을 멈출 수 없기에, 반갑지 않은 손님도 마다하지 않고 함께 가야 할 것이다. 더 날이 짧아지기 전에 우리에게는 서로 사랑해야 할 일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저물지 않은 빛이 남았다면 진선미를 추구해도 좋을 것이다.
붙임 1
11월의 손님
/로버트 프로스트
그녀가 나와 함께 있으면
가을비 내리는 어두운 날의 내 슬픔은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생각되네.
그녀는 앙상히 마른 나무를 사랑하여
물에 흠뻑 젖은 목장길을 걷는다네
그녀의 기쁨에 나도 함께 이끌리어
그녀는 얘기하고 나는 즐겨 귀를 기울였지
그녀는 새들이 떠나감을 즐거워했고
그녀의 소박한 회색 옷이 안개에 젖어
금방 은색이 됨을 즐거워했다네.
황량하게 버려진 나무들,
빛이 바랜 대지와 음산한 하늘에서
그녀는 진정 아름다움을 보네
그녀는 내가 이들에 대해 심미안이 없다는
이유로 내게 화를 내고 있어
눈이 오기 전, 11월의 앙상한 날들을 사랑하는 것을
어제 배워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그걸 말하기가 부질없는 것은
이 풍경이 그녀의 찬사보다 더 아름답기
때문이야
붙임 2
나뭇잎과 꽃의 비교
/로버트 프로스트
나뭇잎이란 늘 수려했다네
줄기도 그러하고 나무의 질감도 그러했지
그러나 당신이 그 뿌리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
나무는 많은 꽃과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네
그러나 난 나무에 꽃을 피우거나 열매 맺게 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인지 모르지만
나뭇잎들은 매끄럽고 가지는 거칠지라도
그 잎들과 가지만으로도 엄연한 나무라는 걸 아네.
어느 커다란 나무들이 꽃을 아주 조금 피워
전혀 꽃이 없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늙어지면 그들 나무에 고사리도 보게 되고
이끼도 곧 돋아날 것이기 때문이지
꽃과 잎 중에 누가 더 예쁜가를
난 사람들에게 짧게 말해달라고 하지
그러나 그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은
잎들은 밤에 그리고 꽃들은 낮에
그러하기 때문이라네
잎들과 줄기, 잎과 나무껍질은
서로 기대어 어둠 속에서 듣는다네
한때 난 꽃잎을 쫓아왔지만
나뭇잎들은 내게 슬픔을 산출했음을
* 서투르게 번역해 보았습니다.
첫댓글 역시 선생님의 번역은 놀랍습니다
모르고 지냈던 그 깊은 곳까지 알게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인간도 사물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살라고 만드셨음을
이 글을 통해 더 가깝게 느껴봅니다
건강 꼼꼼하게 챙기시어 좋은 글 많이 남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