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 성다영
너무 작은 숫자 / 성다영
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다 이 풍경은 낯설다 도로에 돌무더기가 있다 이 풍경은 이해된다
그린벨트로 묶인 산속을 걷는다
끝으로 도달하며 계속해서 갈라지는 나뭇가지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공학자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기에 더 중요합니다 너무 작은 숫자에 더 작은 숫자를 더한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비유다
망할 것이다
한여름 껴안고 걸어가는 연인을 본다 정말 사랑하나봐 네가 말했고 나는 그들이 불행해 보인다는 말 대신 정말 덥겠다 이제 그만 더웠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하면 너는 웃지
그런 예측은 쉽다
다영 씨가 웃는다
역사는 뇌사상태에 빠진 몸과 닮았다
나무 컵 받침이 컵에 달라붙고 중력이 컵 받침을 떼어낸다
물이 끈적인다 컵의 겉면을 따라 물방울이 아래로 모이는 동안 사람과 사물은 조금씩 낡아간다
조용한 공간에 금이 생긴다
되돌릴 수 없다
[당선소감] 낯선 변방에서 시를 쓰겠다
한 사람씩 부르며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하는 것만큼 촌스러운 수상소감이 없다고 누군가 말한 적 있습니다. 수상소감은 평생 남는 건데 멋있게 쓰라고 그랬습니다. 어떤 자세로 시를 쓸지 태도를 보여주라고 그랬습니다. 저는 사랑하고 고마운 사람에게 사랑하고 고맙다고 말하는 게 가장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 가장 소중한 것을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저의 태도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하고 고마워요.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제가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없어도 지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한아 사랑하고 고마워. 고운 언니 사랑하고 고마워요. 시현아 사랑하고 고마워. 양지야 사랑하고 고마워. 규찬, 광록, 현, 스터디 친구들 사랑하고 고마워요. 파랑새 친구들 사랑하고 고마워요. 김혜순 선생님, 이원 선생님, 송승환 선생님, 김언 선생님, 이광호 선생님, 김승일 선생님 사랑하고 고맙습니다. 부족한 작품을 읽어주시고 조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당선 소감은 2018년 7월 30일 서울에 폭염경보가 내려진 날 미리 썼습니다.
그리고 2018년 7월 30일 이후에 만난 준수에게 사랑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매년 그렇듯이 올해도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무기력한 순간에도 시를 썼습니다. 그때마다 미리 써놓은 당선 소감을 꺼내 읽으며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는 시가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를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시를 씁니다. 문학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 같아서 실망할 때에도. 시를 쓰다가 실패할 때에도. 삶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어서 깜짝 놀랍니다. 살아있다는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전화를 받고 사람들에게 당선 소식을 알렸습니다.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매우 놀라거나 그저 그런 반응. 매우 놀라는 사람은 대체로 시인을 위대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카프카가 말했듯이 시인은 사회의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보잘것없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지상 생활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느낍니다. 시인이 연약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저도 미래를 걱정합니다. 20년 후에 임플란트 비용을 어떻게 낼 수 있을지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감각은 깨끗하게 포장된 안전한 길 위에 있지 않습니다. 저는 길을 잃기 시작하면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설렙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낯선 것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낯선 것은 변방에 있습니다. 변방에는 소위 정상이라는 괴상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변방에는 나이, 지역, 국적, 인종, 질병과 장애 여부, 학력, 가족 형태, 성적지향, 성정체성이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시를 쓰겠습니다.
[심사평] 쓰고자 하는 것을 쓰는 힘
적어도 시에서 고유한 세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세계를 향해 가는 ‘언어적 의지’일 것이다. 언어적 의지는 시인의 의지가 아니라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에 숨어 있는 힘에 가깝다. 그 힘으로 인해 우리는 시가 만드는 특별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언어는 동시대 시인들에게 마치 공통감각처럼 통용되기도 하는데, 그 유행에 시인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방법론에 휩쓸린 나머지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심사 마지막 단계에서 ‘흰 토르소와 천사의 나날’ 등 5편을 보낸 김혜린의 시를 더 기다려보기로 결정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김혜린은 유려한 연결 속에 특유의 정서를 끌어내는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박다래, 김지미, 서귀옥, 유승아 등에게 지적된바, 시상의 전개가 인식의 과도한 관여로 자연스러움을 잃거나 언어적 질감을 해치는 단점을 감각적으로 극복한 사례였다. 그러나 그 감각이 가진 정서적 울림만큼이나 자신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모두가 잘 쓰고자 한다. 하지만 ‘쓰려는 것을 잘 쓰는 것’과 ‘잘 쓰기 위해 쓰는 것’은 다르다. 시가 고유한 세계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언어의 장르이면서 또한 진실의 장르이기 때문이다. 성다영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선작 ‘너무 작은 숫자’는 침묵과 수다를 격정 속에 교차시키고 딴청과 응시를 침묵 속에 빠뜨리면서, 이러한 언어의 불균질성이야말로 상실 앞에 선 마음의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한다. 비록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사라짐의 의미를 깨달을 수는 없지만, 그 순간에 동참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들이 겪는 상실의 필연적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컵에 달라붙어 있던 컵 받침이 무심하게 다시 떨어지는 일에서조차도 말이다. 그것이 성다영 시가 가진 언어적 의지이다. 막 등장한 신인에게 그만의 세계를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하지만 시의 세계란 언제나 유예되는 것이어서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그 세계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야 한다는 믿음을 성다영은 가졌다. 신인에게 그보다 중요한 태도는 없다.
심사위원 장석남·김민정·신용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