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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하는 의미와 차이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중심으로
<시인. 문학평론가> 박철영
1. 차이라는 인식들
관점이 다른 도시적 이미지는 자아의 억압을 전제한다. 우선 구도에서 보여주는 직선은 수직의 방향을 지지하여 고도를 지향한다. 성장과 확장적 도시 구조는 은연중 수평적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정치를 닮았고, 수평적 사고로 억압된 의식은 주체에서 배제된 타자임은 분명하다. 대다수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사유가 보편적 세계의 정서로 사물화 되고 대도시 하위문화에 종속 편입된다. 주체들이 사용하지 않은 언어를 수습한 말의 존재들이 억압된 시적 무의식으로 회귀해오는 순간을 우리는 새로운 시의 도래점이라고 한다. 도시적 삶에서 탈 신화화된 자연은 비시적非詩的 경계에서 어떤 지점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알레고리적 기호로 대체되는 1980년 대 이후를 살고 있다. 성장 일변도의 도시 환경에서 생명의 원천인 흙과 분리된 게임 마니아들인 오타쿠의 감각에 익숙해진 신세대들의 낯선 시 의식에 대한 호감 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시 유형의 출현과 신 사유에 내장된 매혹마저 전통적으로 익숙한 시의식과는 인식의 ‘차이’를 감안한다 해도 대단한 흥미를 부정할 수 없다. 시의식이 자아라는 세계 속에 축적되어 발아하는 것이라면 시의 근본에 충실한 것일 테고, 대다수 타자 의식 속에 실존하는 주체를 자아라고 인식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은 들뢰즈의 ‘차이생성’이 전통적 사고에 대한 부정적 차이를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관계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철학적 사고로 접근한다면, 문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문학적 호기심을 유발한 신 시류詩類의 시 의식을 이해하려는 관점에서 본다면, 긍정의 여지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어차피 시란 형식을 빌어 전달하는 언어 체계로 명암의 농도를 표현의 ‘차이’라고 한다면 도시 속에 엄폐된 어둠은 대다수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은 타자적 공간이 되어야한다. 그 주체라는 자아가 탈각된 타자의 보편성을 빌어 다수의 공감을 확보할 수 있는 시적 언표로써 기능한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문학의 범주에 들 수밖에 없다. 허수경이 “박준이 선택한 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서정(Lyric)’이다”고 한 언급도 참고할 만하다.
2. 거세된 시적 의미의 발화들
인간의 본능에서 배제될 수 없는 시적 세계에 내재된 윤리인 보편성은 자아 인식과 화해할 수 없는 것인가를 고민해볼 때, 박 준 시인의 심층적인 부면에서 발현되는 타자 인식의 관점에서 생성된 시의 무의식은 새롭게 도래하는 시류임은 물론이거니와 전통적인 정서와 맞닿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적 사고에서 잉태된 시어의 인위적 수사와 전술적인 변용은 시미학과 전통의 서정과도 크게 다르지 않고 시 윤리를 함의 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시 윤리라는 의미의 해명이 좀 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의 기반이었던 농촌의 급격한 붕괴와 산업화에 따른 도시의 팽창과 더불어 성장한 신세대들의 의식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서 기존의 가치 체계에 혼란을 초래하였고 시적 가치에 대한 좌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그렇지만, 시에 대한 정서에서 전통과 단절되거나 상반된 변용이 아니라면 시의 방향에서 진화라고 볼 수 있다.
감성의 잉여가 없는 적절성으로 소환되는 시편은 도시라는 성장기 체험 의식에 편향되지 않았다 해도 부당하게 억압된 다양한 사회의식은 정치적 사유와 불가피하게 맞물려 있다. <유성고시원 화재기>에서 “총무는 채점을 하다 말고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매년 이차에서 떨어졌던 그도, 탈출해 나왔다면 내년쯤에는 아마 이등병이 되었을 겁니다 그나저나 왜 결핍의 누대(累代)에는 늘 붉은 줄이 그어졌는지 알고 계실까요?”라며 소수이면서 우월한 권위를 향유하는 사회적 주체들에게 질문하고 있다. 사실 고시원은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우리 사회 사슬의 마지막 수단이라고 볼 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는 것이고, 그 물음은 견고한 사회 계층간 불화가 일방적으로 세습되는가에 대한 부정이며 이해불가를 제기한다. 모든 결과에 대한 사회적 책임으로 전가된 약속 이행을 강요하는 통념을 기록한 서약서에서 “위의 사람은 유성고시원 화재 사건에 관하여 이와 같이 진술하는 바이며 진술 내용이 목격 사실과 다를 경우 어떠한 처벌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증거를 피해갈 수 없다. 증언된 사회적 언술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인식일뿐더러, 자본주의의 불평등한 허구성을 가감 없이 환기시킨다. 그 <당신이라는 세상>은 좌절이라는 매 순간을 타자라는 자아로 회귀시킨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술을 마셔야하고 주변 사람들과 단절을 서슴없이 행하면서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환각성을 가진 술에서 깨어날 때마다 “온통 내 세상”일 수밖에 없는 숙명의 선택은 <세상 끝 등대>에서 의지의 “너머를 너머”로 확인하는 방법은 관념에 그친 것이 아닌 “손끝으로 먼바다를 짚어가며”인식하는 감각으로 확인한다. 그것마저 서정의 발화가 기존의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시인은 사실적 체험이자 시의 발화를 유발하는 서사를 담담히 <가족의 휴일>을 통해 회고한다. 그것마저도 감정이 거세된 풍경의 서술로 지루한 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아버지는 “밀린 신문을 읽고”, 시인인 ‘나’는 극히 개인적인 생각에 잠겨있는 일상이 따분하고 지루하다. 그런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누나의 부재를 신파적 서정으로 유도하지 않았고 개체화된 정물적 풍경처럼 감정이 거세된 언술은 매우 건조하다. 어차피 사람 사는 이야기가 곧 시詩기 때문이다. “‘이번 주도 오후반이야’ 말하던/누나 목소리 같은 낮달이/길 건너 정류장에 섰다”라고 말해버림으로써 화자는 타자로 자리 매김 된다. 어차피 자아의 인식으로 사유된 시적 세계의 상상적 발화가 시의 형태라면, 일정한 형상으로 존재하는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감정이 거세된 시인의 시 의식은 절대적으로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런 서사의 일편을 엿보게 하는 <누비 골방>에서도 가난에 찌든 삶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 류의 시가 무수히 쓰여 졌기 때문 금방 식상할 수 있겠지만, 박준의 시에서는 사물화된 정물의 풍경처럼 감정 유입은 최대한 절제된다. 그렇다고 딱히 긍정하는 위안으로 충족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누비’라는 것은 겹으로 덧대어 만들어질 수 있는 형상을 의미하고 은연중 가난한 남루를 상징한다. 누비가 된 ‘골방’도 그렇다면 시어로써 충분히 확장의 여지는 가능하지만, 절대 들뜰 수 없다.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이 방”에서 “눈이 가장 먼저 붓는” 신문지의 활자 사이로 “바람이 터져 나오기 전에 헌 방을 덮어야 한다”는 행위마저도 철저하게 감정이 배제된 시적 진술임을 알 수 있다. “방은 다시 공복”이라는 울음 같은 낯빛을 띄지만, 삼류 같은 눈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박준의 시에서는 사랑이나 눈물이 울컥하도록 자극하는 기제로 활용되지 않는다. 집요하게 수사적修辭的으로 변용되거나 정치하게 삽입한 시어가 아닌 욕망을 배제한 일상적인 시 언어일 뿐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에고의 감정이 타자화된 자아에서 비롯될 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오늘의 식단_영(暎)에게>은 ‘벽제’라는 의미어로 망자와 죽음 그리고 이별을 준비하게 한다. 이어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는 것마저 보편적 위로에 그치고 ‘울음’이라는 슬픔의 곡진함을 “곡과 곡 사이/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숨의 소리였다”며 그마저 호흡작용으로 감정을 소화한다. 죽음도 결국은 먹고사는 일상의 연장이라고 볼 때 ‘색(色)’조처럼 계절의 변화로 인식하고 “망자의 모발을 마당에 심고/이듬해 봄을 기다린다는/중국의 어느 소수민족을 생각하는 오늘”로 규정하여 죽음이라는 것을 특별하지 않는 지구적 일상처럼 보편적 슬픔으로 희석시킨다. 망자를 의미하는 ‘벽제’에서 죽음은 살아있음과 큰 의미가 없다는 <연화석재>다. 죽은 자를 위해 돌을 쪼는 석공의 감각으로 “저녁이면 벽제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의 의미는 모든 행위가 산 사람을 위한 위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동지(冬至)>는 절기상 특별한 날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보통의 하루다. 그런 날 동지 팥죽 대신 라면을 끓이며 귀신처럼 팥죽이 싫어 안 먹는 다는 시인의 궁색한 변명마저 소박하다. 거기다 배 아플 때 바늘로 손가락 끝을 따 피를 흘리도록 하는 방법은 일부 주술행위 같지만, 소시민적 가정에서 흔했던 것이어서 거부감으로 다가오지 않는 보편적 일상이라는 것이다. 시인에게 그런 심리적 위안이 되는 행위를 수행해 주는 대상은 여러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미인’이나 ‘애인’ 또는 ‘당신’으로 구체화된다. <미신>에서 “나는 애인의 손바닥,/애정선 어딘가 걸쳐있는/희무끄레한 잔금처럼 누워” 미래를 고민해보지만, 알 수없는 운명에 대한 불안함은 “아직 뜨지 않은 칠월 하늘의/점성술 같은 것”처럼 매우 불확실하다. 그런 위안이나마 절대적 구원을 향한 초월적 의지는 아니다. 최소한의 위로처럼 보일 듯 말 듯 그림자처럼 맴도는 “아름다울 가(佳) 자나 비칠 영(暎) 자를 적어볼 때” 꿈에서처럼 보인다는 ‘당신’은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박준의 시적 발언이 매번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도시 환경과 친숙한 정서에서 체험한 과거라는 공간이 단단히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라는 기억 속 회로를 짚어 가보면 보편적 정서와 단절되지 않았기에 시의식의 세계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시인의 말>은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 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는 전언은 그 어디에도 전위적인 돌출을 엿볼 수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유의 표현을 조금 다른 형태의 서정으로 풀어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좀 더 신세대적이면서 도시적 사고로 무장한 세련된 시적 인식일 뿐이다. 시란 장르는 생애 체험적 세계를 전위적으로 표출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는 온 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할 때 가슴을 아리게 하는 저녁이거나 미리 물들어버린 노을빛 충만한 갈대밭의 어스름으로 태고의 슬픔을 잉태하듯 적막하다. 그 사람들 가슴으로 언젠가는 찾아들 따스한 저녁은 그렇게 매번 파고들었고 이야기처럼 세계 인식으로 퇴적되었을 것이다. 생애 딱 한번뿐이라는 조건으로 찾아들 마지막 만찬이 될 저녁은 낮 시간의 “강물로 뛰어들던 동생들로 강가는 분주”하였지만, 아직껏 오지 않는 그런 <동생>들을 안타깝도록 기다린다. 누구나 꿈꾸는 저녁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도시와 비 도시적 삶은 크게 다를 바 없다. <해남으로 보내는 편지>를 통해 시인은 “사람의 울음이나 사람의 서러움이나 사람의 분노나 사람의 슬픔같은 것들을” 가슴에 마냥 묻어둘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잡다한 세상을 위안해줄 희망을 애타게 기다리는 어둠의 여백이 아직도 덜 어두워진 가족의 얼굴을 비춰줄 수 있다면, 욕망과는 거리가 먼 반딧불이의 불빛처럼 환하게 드러나는 길을 따라 집으로 찾아든 사람들을 상상하게 된다. 수저를 들지 않아도 따스한 국물 같은 시편들이 말라있는 우리의 목젖을 촉촉이 적셔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런 시집을 기꺼이 펼쳐야 한다. 저녁 풍경 속으로 박준 시인이 다가왔다. 도시의 건조한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시인들에게서 보기 드문 서정성의 농도는 우리들이 오래전 잃어버린 저녁 풍경의 원형을 닮아 있고, 미래파란 부류의 시에서 보기 드문 ‘슬픔’과 ‘눈물’을 행간에 끌어다 사랑의 의미로 전환하는 기미機微는 작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시란 함의는 개별적 내면의 발화로부터 시작하지만, 긍정적인 공적 언어의 기능을 일부 수행하고 있고 그 영향은 불특정의 사람들에게 오래토록 사유의 공감을 불러내는 지시적 기능까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시적인 것으로 전환되는 사유는 단순하게 과거라는 기억일 뿐이지만, 불편한 과거를 외면하지 않았을 때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는 긍정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폐가 아픈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이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부분
놀이를 놀이이게 하고 겨울을 겨울이게 하는 놀이터에 봄이 와도 너는 오지 않 았으니 나는 풀어
놓은 아픈 말들을 한데 몰아 노트에 적는 놀이를 시작했다 흙이 흙을 낳고 말이 새 말을 하는 놀이,
그 말을 자작나무 껍질에 옮겨 적지 않아도 되는 놀이, 흙에 종이를 묻는 놀이
-<천마총 놀이터> 부분
시의 발화점은 과거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 시인만의 자기 체험이고 어차피 시인이 추구하는 시적 근원도 일반적인 보편의 정서에서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 감각적 선험이 도시거나 도시의 변방이거나 그 어디에도 포함될 수 없는 하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화라 해도 시적 세계라면 개의치 않아야 한다. 그것마저도 몸이라는 감성의 소화 작용으로 만들어진 상징이기에 그렇다. 시는 시인의 시적 세계라는 감각으로 수수되어 몸으로 쓰는 개별성을 고유하게 증거한다. 감각의 상위라는 이성으로 무장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감성으로 발기된 감각의 관념에 대하여 표피를 발라내게 된다. 그런 이후에야 시는 전위의 미학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폐가 아픈 일도/자랑이 되지 않는다”는 시인의 진폐적 환각에서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는 이성적 발화까지 우위를 보상받는다. “폐가 아”프거나 “눈물이 많은 일”마저 이성의 하위 감각이라는 낡은 사유로 인식하지 않고 자랑이 되어주는 슬픔은 비 주체로 남을 수밖에 없는 타자들에게 정당성으로 감전된다.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좋기도 하였다”는 인내에서 비롯된 아픔이 때로는 슬픔이라는 각성제가 되어준다. 심리적 긴장을 감당하지 못해 오는 불안감도 슬픔이다. 누구나 심야택시에서 톡톡 튀듯 올라가는 미터기 소리를 들으면 은근히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택시 기사와 같은 마음으로 즐거워하지 못한 까닭이다. 승객의 심리를 불안하게 하는 경범죄라는 인식은 아주 오래전의 어린 마음에 상처에서 비롯된다. 유년기 경주 <천마총> 가는 수학여행에 동참하지 못했던 상처다. 그 추억의 한 때 친구들은 “첨성대를 돌아 천마총으로 향하고 있었을” 시간 동네 놀이터에서 시인은 슬픔 같은 저녁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수학여행을 함께 하지 못해 불안한 알리바이는 감각으로 변명되지만, 스스로 경범죄의 조건에 빠져들고 만다. 놀이터의 신발 속 모래와 경주의 바닷가 모래는 엄연한 시간과 공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천마총으로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아픔이 슬픔으로 전이되는 시간은 여직 길기만 하다. “이게 꼭 거리의 문제만은 아니어서요 결국 무엇을 묻어든다는 것은 시차(時差)를 만드는 일이었고 시차는 그곳에 먼저 가 있는 혼자가 스스로의 눈빛을 아프게 기다리는 일”은 누구에게도 처벌할 수 없는 가해자는 수학여행이었고 시인은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 아픔은 때로 “나무를 더 넣지 않아도/여전히 연하고 무른 것들이/먼저 떠 올랐다”는 <당신의 연음(延音)>처럼 떨림으로 “맥박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시인은 감각으로 다가오는 세계가 아직은 난감하다. <용산 가는 길_청파동 1>은 시인에게 잊을 수 없는 향수로 남는다. 서울이라는 곳에서 청파동은 고유한 지명으로 기록될 수 있지만,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향유할 수 있는 감각의 촉수지대다. 누구나 자신만의 성장기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나는 병(病)을 얻”어 아픔이 깊어졌지만, 누구도 그 아픔을 수반하는 슬픔을 대신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지는 해의 일몰을 보면서 “그대가 나를 떠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픔의 간절함을 깨닫게 된다. 그래도 <2:8_청파동 2>에 대한 미련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다. “열흘에 이틀은 아프고 팔 일을 앓았”다는 것과 그 청파동에 남은 사람들마저 떠나 “이제 열에 둘은 폐가고 열에 여덟은 페허였다”는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기억 공동체는 해체를 거듭하면서 도시적 낯섬 즉 익명의 페허 속에 스스로 유폐된다. 그 유폐된 기억은 오로지 시인의 것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기존의 시적 정서에서 익히 보았던 것들처럼 낯설지 않다. 불치의 공간 <관음(觀音)_청파동 3>에서 “너의 음악을 받아 적은 내 일기들은 작은 창의 불빛으로도 잘 자랐지만, 사실 그때부터 나의 사랑은 죄”가 되었고 <꾀병>처럼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죽고 사는 것마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감정은 슬픔도 피할 수 없는 아픔으로 긍정한다. 자아로 인식된 아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남의 아픔도 자기 것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타심에 닿을 수 있다. 그런 시인의 곁에는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어 실존을 고민하게 된다.
태백중앙병원의
환자들은
더 아프게 죽는다
아버지는 죽어서
밤이 되었을 것이다
자정은
선탄(선탄)을 마친 둘째형이
돌아오던 시간이다
미담이문을 열고
드러내 보이던
형의 누런 이빨 같은
별들이 켜지는 시간이다
-<태백중앙병원> 전문
‘태백중앙병원’은 과거의 어느 지점을 긍정해 들어가야만 가능하고, 체험적 인식으로 내면화시킬 수 있는 특수한 저점이자 좌표다. 채탄을 위해 깊숙한 채굴지까지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부가 아닌 생애를 피해갈 수 없는 모진 파동이었다. 탄광노동으로 얻은 질병중 진폐증이나 장애의 고통을 가진 사람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더 아프게 죽”음을 맞는다. 죽음을 어둠의 세계라고 볼 때 밤은 또 다른 죽음을 예고한다. 그런 밤이면 탄광에서 걸어 나오는 둘째 형이 위태롭다. 대물림되는 죽음을 차단하려는 저항 의지는 슬프도록 왜소하다. 겨우 별이 뜨는 시간을 염원하며 “형의 누런 이빨 같”은 탄광촌의 밤은 병색이 깊다. 우리는 시를 통해 한 시대의 자화상으로 남겨질 유산을 스크린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것은 극도의 슬픔을 수반하지 않아도 가능한 거울의 반사이며 ‘태백중앙병원’의 존재 이유기도 하다. 통렬한 아픔 같은 시대의 이야기지만, 담담한 표정에서 발화된 시적 감정은 이내 잠잠해진다. 그뿐으로 끝나야 할 이런 일들은 현대 사회의 명암으로 이반되다 이내 어둠에 묻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태백중앙병원’같은 우리 사회의 치유 불가능한 곳들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을 먹었다>는 통증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를 우리 사회에 질문하고 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사람과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은 어디까지나 텍스트 속에서만 가능한 사치일 수 있다. 며칠이면 나을 수 있는 처방전은 그 어떤 시로도 불가능하다. 그런 때에 우리는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을 상상해본다. “미인을 생각하다 잠드는 봄날, 설핏 잠이 깰 때마다 나는 몸을 굴려 모아둔 열(熱)들을 피하다가 언제 받은 적 있는 편지 같은 한기를 느끼며 깨어”난다. 비록 슬픔이 사랑처럼 아픈 것이지만, 더는 아프지 않아야 한다. 사람 사는 것이 조금만 들여다보면 별 것 아니라는 것이다. <언덕이 언덕을 모르고 있을 때>에서 처럼 “저녁 찬거리는 있냐는 물음에 조금 머뭇거렸습니다 민박집 주인은 턱으로 언덕 채마밭을 가리킵니다//나는 주인에게 알부민 양철통을 재떨이로 쓰고 계시던데 혹시 간(肝)이 안 좋으시냐고 물으려다 말고 언덕을 올랐습니다 근처에 분명 고추밭이 있을 것 같은데 언덕에서 헤매”지만, 조금 늦거나 조금 다른 생각의 차이일 뿐 관점이 같다면 방향도 비슷할 것이라 본다.
3. 시의 저점과 지점의 방향
박준 시에서 드러나는 주조는 낯설지만, 낯설지 않는 모호함이 매혹이다. <미인의 발>을 빌면 골목 안 미용실 풍경처럼 낮은 지점에서 발화되고 그 지향하는 지점은 더욱 우리 사회가 외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1980년 대 이후 급격한 사회 변화에도 편향되지 않는 인식은 시적 의식으로 투영된 세계였으며, 관념화되거나 인위적 수사로 변위된 시적 우월성을 지향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또한 호감을 위한 의도적 언술로 시 미학의 세계를 왜곡하는 전위 시詩 지향은 아니었음도 기인한다. 또 서정적 주조에서 표출된 언어의 전개가 급격한 변화에서 다양해진 사회 주체들의 분열의식과 해체의 신 시류를 형성한 황병승이나 김민정 이민하 이외 또 다른 소수처럼 탈 서정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박준의 시가 많은 사람에게 호감으로 읽히는 것은 시 전부에 대한 이해 가능하여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시 일부에서 호흡을 더 진전시킬 수 있는 저산소증 같은 전언의 모호성은 얼마든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예측은 충분히 감안해야하고 전통적 시의 서정에서 일탈이라고 볼 수 없는 감각적 사유이고 치열한 타자를 지향하는 자아인식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봐야할 것이다. 문학에서 소수이면서 다수에 거스르는 새로움의 차이가 있다 해도 서정적 매커니즘에서 볼 때 시적 윤리는 엄연하다는 것을 매번 충동하고 있다.
첫댓글 좋네 좋아. 수고 많았구만!!
시인은 시처럼 ~~^^
순작 회장님 관심과 격려에 감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