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 직관(의미) ▶ 창조
현 인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경제이다. 우리 시대에 경제관념이 없으면, 삶을 살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 이 시대에 걸맞는 주제로 베스트 셀러가 된 캐서린 폰더의 『부의 법칙』,(2022)을 읽어보면, 여러가지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한 단어로 조야하게 말하면 '정신의 법칙'이다. -정신이 어떠한 경우에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신의 법칙이 '그런' 속성(책 내용)을 가졌다. 그러므로 책 내용 대로 하면 정신을 활용하는 것이다. 정신을 활용한 결과 물질인 부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부가 아닌 다른 것, 예컨대 음악이라도 정신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만약 다른 시대에 그 시대에 걸맞는 것(?)을 이루고자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정신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 이 책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사용한 정신의 힘은 '상상'에 가깝다.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정신요법 '로고 테라피'를 창시한 빅터 프랭클이 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2012)』에서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삶의 의미를 가진 자는 어떤 어려운 환경도 이겨낸다는 것이다. 반면 그런 삶의 의미를 갖지 못한 사람은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삶의 의미는 인간이 자신의 정신의 힘을 활용해서 찾는 것이다.
현재 점점 많이 일어나고 있는 '묻지만 범죄' 역시 온전하게 발달하지 못한 정신이 근본 원인이다. 내가 정신을 활용해서 환경을 이겨내야 하는데 정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되는 것이다. 어려움은 정신이 드러나는 아주 좋은 환경이다. 그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정신을 활용할 수 있었고 다행히 의미를 찾아서 살아남았다. 이는 빅터, 프랭클의 정신이 온전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반면 묻지마 범죄자는 자신의 정신을 올바르게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빅터 프랭클이나 묻지마 범죄자의 정신은 같은 정신이며, 문제는 누구의 정신이 온전하게 발달했느냐이다. 누구든 자신의 정신이 온전하게 발달하지 못하면 그와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발달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발달단계는 3단계이다. 0-7, 7-14세, 14-21세로 그 단계에서만의 발달이 있다. 문제는 그 시기에 인간의 정신이 온전하게 발달하지 못하게 외부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관점에서 보면 마치 무수히 많은 지뢰가 깔린 지뢰밭을 헤치는 형국이다. 요행히 정신이 상처를 받지 않으면, 그건 '참으로 요행이다'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여담으로 필자의 정신을 말하면, 필자는 초등 2학년 시기에 필자는 필자의 내부를 스스로 닫았다. 그 당시 닫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닫았을 것이다. 이 시기(초등 2학년)에는 누구나 자신의 내부가 외부와 소통을 하면서 정신이 발달하는 시기이다. 즉 내부가 외부를 받아들여서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내부를 닫았으므로 앞으로의 삶이 어렵게 될 수밖에 없다. 내부를 닫는다는 것은 이 시기의 발달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부를 닫는 요인은 아주 사소하다. 외부가 강압을 하면 외부에 마추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내부를 닫게 된다.
그 당시(초등 2학년)를 돌이켜보면, 필자는 다소 개구쟁이, 장난끼가 있었던 듯하다. 이것은 이 시기라면 누구나 같은 단계에 있다. 이 시기 아이들은 외부 대상에 공감을 하는 시기이다. 공감이란 외부 대상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외부 환경이 나와 같은 존재이므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하게 된다. 당연히 수업 중임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을 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유가 필자가 만 6세에 입학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결정적인 순간은 어느 날 2학년 선생님이 필자를 굉장히 혼냈다. 그 순간 필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더 이상 내부의 느낌대로 내부의 상황에 따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었다. 내부의 느낌에 따르지 않을려면 내부를 닫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스스로 내부를 닫았고, 이 이후로 외부로만 삶을 살았던 듯하다. 결과는 내부의 도움, 정신이 발달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지식만을 받아들인 것이다. 예로 음악을 들어도 음악의 느낌 , 음악의 정서를 알지 못했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로, 그래서 뭔가가 있는데, 그것이 뭘까를 탐구하게 된 것이다. 후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정신이었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로 우리 문화재의 판을 새롭게 깔았다는 평을 받는 유홍준 선생님의 책을 읽어보면 문화재를 보는 시각이 참으로 창조적, 독창적이다. 책을 읽으면, 그 분이 하신 말씀 '아는 만큼 보인다'가 실제로 느껴진다. 2018년 발행한 '추사 김정희'에도 그런 문장이 많이 있다. '우선 이상적'이 유배지 추사에게 변함없는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그린 그림, 세한도에 대한 유홍준의 글이다.
두 페이지에 걸쳐 있는 글을 순서대로 읽으면 읽는 사람의 머리에 그대로 정리가 된다. 그 중간 부분을 간략하게 인용하면 "이 그림이 우리를 참으로 감동시키는 것은 그림 그 자체보다도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다. 추사 해서체의 대표작으로 예서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반듯한 이 글씨는 필획이 강하면서도 엄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서 가슴에 박히는 울림을 준다(추사 김정희 2018, 288)." '필획이 강하면서도 엄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서 가슴에 박히는 울림을 준다', 유홍준 선생님이 발문의 글을 표현한 부분인데 발문을 보면 실제로 그런 느낌이 전해진다. 또 추사체 글씨의 발달과정이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사실과 중국 고대의 문헌을 모두 통달한 결과 나온 글이라는 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방대한 문헌을 읽고 이해하고 나아가 예술적인 시각, 우리나라의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안목 등등 어느 한 부분도 빠짐이 없다. 고래로 내려오는 우리 민족 정신을 이해하고 싶다면 유홍준 선생님의 책을 읽어보면 된다. 유홍준 선생님은 이러한 것을 어떻게 알수가 있었을까?
정신은 상상 ▶ 의미 ▶직관 ▶ 창조의 단계로 발전해 나아간다. 이를 인간의 정신과학적인 요소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상상이다. 에테르체는 상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0-7세 사이는 에테르체가 인간의 육체를 만든다. 7세 이후 이갈이가 시작되면 에테르체가 인간의 육체를 만드는 일에서 풀려나 독립을 한다는 표시이다. 이후 에테르체는 자유롭게 자신의 역할을 하게 된다. 에테르체는 리듬을 받아들여서 리듬에 반응하면서 우리 몸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에테르체는 생명체를 영위하는 힘으로 우리 몸을 만들었듯이 무엇인가 만들고 조각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에테르체의 생명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음악과 조각, 그림을 그리면 에테르체가 굉장히 발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힘이 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 상은 아스트랄체의 도움으로 상을 이해하게 된다. 즉 아스트랄체가 발달하지 않으면, 에테르체가 만든 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상의 가까운 예로 아스트랄체의 느낌, 음악으로 말하면 음악의 정서이다. 에테르체가 상을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음악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직관(의미)이다. 직관이 곧 의미이기도 하고, 문득 떠오르는 정신세계의 통지이다. 에테르체가 상을 만들면 아스트랄체가 그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는 영혼의 역할에서 찾아야 한다. 영혼은 감각혼, 오성혼, 의식혼이 있다. 감각혼이 육체와 에테르체의 도움으로 감각을 오성혼에 전하고 오성혼은 이를 토대로 생각을 한다. 계속 의미를 찾다보면, 의식혼이 정신세계에서 오는 진리를 파악하게 된다. 이것이 직관(의미)이다.
셋째, 창조이다. 직관은 창조가 아니다. 창조는 직관에서 나아가 자아가 정신세계에서 머물며 거기서 얻는 정신세계의 물질의 본질을 내가 표현해야 한다. 에테르체의 상을 아스트랄체가 파악하고 나아가 이 상(물질의 본질)을 자아가 표현하는 것이다. 자아의 표현은 자아의 성향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물질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 우주 에테르이고 예술의 본질이다.
이를 위에서 말한 세가지 책에 적용한다면 『부의 법칙』은 상상에 가깝다. 에테르체가 만든 상을 아스트랄체가 표현한 것이다. 두번째,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는 직관에서 의미를 찾은 것이다. 물론 의미를 확장시켜서 창조로 나아갔지만, 그 창조는 우주세계에 노닐면서 우주 에테르의 상을 가져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추사 김정희』는 인간 정신의 진수, 우주 에테르의 상을 가져온것에 나아가 민족정신까지 드러냈다.
우주 에테르는 인간 정신의 진수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태어날 때 우주 에테르를 편취해서 가져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문화재는 그 나라의 민족정신이 표현되어 있다. 문화재를 통해서 민족정신을 본다는 것은 우주 에테르에서 민족정신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먼저 인간 개인의 에테르체가 우주 에테르에 연결되어야 한다. 공상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자신의 에테르체가 우주에테르에 연결되면 이해할 수가 있다. 그리고 나아가 민족정신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틀린 것은 더욱 아니다. 우주세계에 노니는 것, 이것이 우리나라 엣 선비들의 풍류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음악가라면 음악으로 우주 에테르, 우주의 감성을 표현해야 한다. 예를 들면 호로비츠가 83세에 그동안 망명으로 가지 못한 조국 모스크바에서 연주한 '슈만의 트로이메라'를 들으면 알 수가 있다. 들어보면 호로비츠가 꾼, 조국에 대한 꿈을 그대로 표현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꾸는 꿈이기도 하다. 호로비츠에 의해서 표현되었기 때문에 호로비츠의 꿈이지만, 그것은 우주 에테르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결론은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정신이 온전하게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의 힘을 쓸수가 없다는 것이다. 묻지마 범죄자도 정신이 망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묻지마 범죄자의 정신이 망가진 것은 물론 그 사람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우리 사회의 책임도 분명있다. 따라서 인간의 발달시기에 아이들의 정신을 망가뜨리고 상처를 입히는 일은 곧 범죄가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