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02) 나의 시에 대한 생각과 문학적 발자취 - ② 인간다운 삶을 꿈꾸게 하는 시의 힘을 믿으며/ 시인 안도현
나의 시에 대한 생각과 문학적 발자취
② 인간다운 삶을 꿈꾸게 하는 시의 힘을 믿으며
■ 난 시 ‘쓰는’ 것보다 ‘만드는’ 걸 먼저 배운 후천성 시인
작년에 다섯 번째 시집 《그리운 여우》를 냈을 때, 시집 뒤표지에다 김용택 형은 이렇게 한 말씀 보태 주었다.
“안도현은 타고난 우리 땅의 서정 시인이다.”
그러나 그건 과찬이라기보다는 허구에 가깝다. 같은 동네에 사는 막역한 사이의 후배를 추켜세우기 위한, 사실과 전혀 무관한 수사일 뿐이다. 나는 스스로 타고난 시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정말로 타고난 시인이라면, 적어도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끙끙대며 수십 번의 퇴고 과정을 거치지는 않을 것이며, 서점 잡지대 앞에 서서 직원의 눈치를 봐가며 매달 문예지에 발표되는 시들을 거의 다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 어머니가 한 번쯤 붓이나 벼루가 등장하는 태몽이라도 꾸었어야 했다.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후천성 시인이다. 시를 ‘쓰는’ 것보다 ‘만드는’ 것을 먼저 배웠고, ‘만드는’ 데 열중하다 보니까 ‘쓰는’ 시도 가끔씩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병아리처럼 시를 따라다니다 보니까, 나중에는 시가 나를 요만큼 키워 놓은 것 같기도 하다.
■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 도광의 선생님과의 만남
1977년 봄, 대구 대건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문예반에 들어가려고 용기를 내어 문예실에 찾아갔다. 거기에는 박덕규, 권태현, 하응백과 같은 면접관들이 어깨를 떡 벌리고 앉아 있었다. 중학교는 어디를 졸업했느냐, 중학교 다닐 때 백일장에서 상 받아 본 적이 있느냐, 어떤 작가를 좋아하느냐 따위의 아무런 형식도 갖추지 않은 면접시험을 거친 뒤 나는 무사히 문예반원이 되었다. 앞으로는 문예반원이라는 명칭보다 ‘태동기문학동인회’의 동인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선배들은 나에게 근엄하게 주문하였다. 그저 《백조》니 《창조》니 하는 우리 문학사를 수놓았던 아련한 문학동인 이름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하루아침에 대단한 문사가 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태동기란, 포유동물이 어미의 뱃속에서 꿈틀대는 시기라는 설명을 듣고는 그 의미심장한 이름 앞에서 숙연해지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도광의 선생님의 이름을 선배들한테서 들었다. 한번은 습작 노트를 들고 교무실에 계시는 선생님을 찾아 뵌 적이 있었다. 내가 쓴 시들을 한참 들여다보시던 선생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슬그머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은 내 노트에다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긋기도 하고 수많은 가위표와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선생님의 빨간 볼펜이 내 노트에 적힌 시에 닿을 때마다 나는 생살이 베어지는 것 같은 지독한 아픔을 느껴야 했다. 스무 줄짜리의 시가 열 줄도 채 남지 못하고 앙상하게 뼈만 남는가 하면, 선생님의 볼펜 끝에서 아예 자신의 숨소리를 놓아 버리는 시들도 생겨났다. 내가 밤을 하얗게 보내면서 고치고 또 고치고 해서 들고 간 시가 무참하게 찢어졌다는 생각에 아예 시 쓰기고 뭐고 다 포기해 버릴까 하는 자포자기의 마음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날의 비참함이 나에게 없었다면 나는 언어를 함부로 남발하거나 혹사시키는 언어의 난봉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시인이란, 언어를 다스리면서 언어로부터 다스림을 당하는 자가 아니던가.
■ 시인을 향한 열정 하나로 갔던 전라도에서 마주친 현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문학을 향한 ‘병’은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아니 그 병은 날이 갈수록 더 깊어졌고, 새로운 합병증까지 만들어 내고 있었다. 1980년, 나는 시인이 되겠다는, 그야말로 치기 어린 열정 하나로 호남선 열차를 탔고, 만경강이 흐르는 전라도 땅 익산역에 내렸다.
풋내기 문학청년에게 다가온 현실은 감당해 내기 벅찬 것이었다. 입학과 함께 닥쳐온 이른바 학원자율화의 함성과 광주의 계엄령과 절대 침묵의 시간들을 나는 처음엔 정면 돌파하지 못하고 지냈다. 12년 동안 제도 교육의 울타리 안에서 길들여진 나약한 영혼은 어디 마땅히 깃들일 곳을 찾지 못한 채 방향 없는 책읽기와 술 마시기로 세월을 넘기고 있었다. 시인이 되겠다는 알량한 꿈 하나도 없었다면 나는 거기서 사정없이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생각난다. 시국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선배들의 목소리, 장갑차가 진을 치고 있던 정문 앞에서 착검한 계엄군에게 이유도 없이 두들겨 맞던 일,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소리 죽여 부르거나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며 김지하의 《황토》 복사본 같은 판금 서적을 돌려가며 읽던 일, 교련 시간에 결석하고 학군단에 찾아가 빌던 일, 학적부에 수없이 찍힌 ‘권총들’…… 그 속에서 나는 이 세상을 단순히 열정 하나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조금씩 배워 가고 있었다.
■ 불확실한 젊은 날의 일기장 같은 첫 시집
첫 시집의 표제시인 〈서울로 가는 전봉준(全琫準)〉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된 후, 지금은 작고한 전주 박봉우 시인은 나를 만날 때마다, 어이 전봉준, 하면서 애칭으로 내 이름을 ‘전봉준’으로 부르곤 했다. 불우한 한 민족시인의 눈에는 전봉준 어쩌고 하면서 머리를 내민 나이 어린 후배가 참 기특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박봉우 시인의 자상한 기대와는 달리 이 시를 쓰게 된 계기는 전적으로 한 여자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햇볕이 유난히도 맑은 봄날이었던가, 어떻게어떻게 해서 그녀와 나는 눈이 맞아서 들길이며 술집이며 자취방을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마냥 쏘다녔는데, 그녀는 나와 같은 학교의 국사교육과에 다니는 처녀였다. 나는 늘 한두 권의 시집을 들고 다녔고 그녀의 손에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책들이 들려져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의 하나로 닥치는 대로 그녀의 책들을 빌려 보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주체적인 시각으로 정리한 책들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어느 날 재일 사학자 강재언이 쓴 《한국근대사》가 내 손에 들어왔다. 그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책의 뒤표지에는 한 장의 조그마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 사진을 설명하는 짤막한 한 마디,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을 내 노트 한쪽에 또박또박 적어 두었더니 얼마 후에 어렵지 않게 한 편의 시가 되었다.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全琫準)》은 등단이라는 형식적 절차를 통과하기 이전의 시들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 무렵에는 시를 쓰려고 볼펜을 잡으면 꽃 피는 봄 대신에 눈 내리는 겨울이 먼저 떠올랐고, 꼼짝 않고 누워 있는 들판 대신에 들판을 태우며 가는 들불이 선하게 떠오르곤 했다. 그런데 시집 전체의 정서보다 시집의 제목이 한 발 앞서 간 것은 아닌가, 그래서 하나의 잘 익은 과일보다는 풋과일처럼 떫은 맛이 군데군데 많이 나는 것은 아닌가. 첫 시집은 뜨거운 결의에 차 있으되 결의의 대상이 불확실한 내 젊은 날의 일기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어른동화를 첩으로 뒀지만 조강지처인 시를 홀대할 순 없다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을 거쳐 《그리운 여우》를 내는 동안 나는 무엇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퇴근 후에 어김없이 선술집을 찾던 평교사였었다. 뜨겁게 달구어진 해직 교사였다가, 불꽃을 치지직 끄고 숨을 고르던 복직교사였다. 좋은 시인이 되는 것보다 좋은 교사가 되는 게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던 시절, 나는 기꺼이 방구들을 데우고 국물을 끓여준 뒤에 하얀 재로 남는 연탄이 되기를 원했다. 내가 쓰는 시도 그런 연탄과 같은 뜨거움을 간직해 주었으면 싶었다.
그런데 1997년 봄, 나는 가르치는 일보다 오직 글 쓰는 일에 매달리겠다는 각오로 교직을 그만두었다. 나 혼자만 전쟁터에서 쏙 빠져 나온 것 같아서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그동안 내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쌓고 무너뜨려 온 모든 것들을 근원부터 다시 점검하는 기회로 삼기로 하였다. 그리고 혹시 현실에 안주할지도 모르는 나 지신을 벌판 한가운데로 내팽개쳐 보자는 속셈도 없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요 몇 년 사이에 쓴 《연어》나 《관계》 같은 ‘어른을 위한 동화’ 쓰기에 재미를 붙인 게 아니냐고 미심쩍은 눈총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나는 소설가도 아니고 동화작가는 더더구나 아니다. 나는 시인으로서 그런 글을 썼을 뿐이다. ‘어른 동화’를 행복하게도 첩으로 두기는 했지만 조강지처인 시를 어떻게 홀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오로지 시인이다.
나는 시의 힘을 믿는다. 더러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시의 위기와 종말론을 꺼내 보인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인간이 좀 더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한, 시인은 시가 가진 창조적인 기능, 즉 시라는 형식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 밤을 새울 것이다.
< ‘시 창작 강의 노트, 나를 바꾸는 시 쓰기(유종화 엮음. 새로운눈, 2019)’에서 옮겨 적음. (2020.10.29.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02) 나의 시에 대한 생각과 문학적 발자취 - ② 인간다운 삶을 꿈꾸게 하는 시의 힘을 믿으며/ 시인 안도현|작성자 화룡이의 행복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