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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인의 혈통
한국인은 백제와 신라 외에도 많은 고구려인의 피를 이어받았다. 통일 신라 시기 9주 중 3주(오늘날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일대)가 고구려의 옛 지역에 설치됐고,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고구려 왕조의 지배를 받던 고구려인이었다. 고구려인의 인구가 적어도 통일 신라 인구의 1/3 즈음에 육박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로 경주를 지키던 9서당 중 3서당인 황금서당, 벽금서당, 적금서당이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듯하다. 이 수치는 오히려 백제인의 서당 부대였던 흑금 서당 개수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통일 신라 인구 중 고구려인의 비율이 백제인보다도 오히려 많았다고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서당의 숫자로 인구 비율을 추측하는 것은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것을 분명한 논거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통일 신라 시기 고구려인들은 9주와 패강진을 제외한 통일 신라 남부 지역에도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북도 익산(금마저), 경상남도 진주(강주의 중심지)에는 당시 고구려 유민들이 상당 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보덕국왕이자 보장왕의 아들이었던 서자 고안승은 신라왕에게 김씨 성을 하사 받고 경주에 거주하였다. 이 사실은 오늘날 한국 성씨의 다수를 차지하는 김씨 성 중에도 상당수 고구려 유민 특히 고구려 왕족 안승의 후손도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발해 멸망 후에도 많은 고구려 혈통이 고려로 귀순하여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됐으며, 이후 고려, 조선조가 평안도, 함경도 지역을 수복하면서 그 지역에 살던 다수의 고구려인의 후예들도 우리 역사 무대에 다시 들어와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됐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에는 고구려인을 조상으로 삼는 성씨가 여럿 있다. ㅡ 물론 조선조를 거치며 성씨가 많이 뒤바꼈기 때문에 성씨로 조상을 따진다는 것은 아주 믿을만한 것은 아니다 ㅡ 오늘날 진주 강씨, 횡성 고씨, 봉성 온씨, 협계 태씨 등은 고구려인들을 시조로 모시는 성씨들이다. 이러한 혈연적은 계승은 한국인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직접적인 증거인 것이다.
2.한국어
한국어에는 많은 고구려어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고구려어 수사가 현재 한국어 수사와 일치하지 않는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한국어가 고구려어의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00년 임병준이 제작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어 어휘 70여개 중 50개 내외의 단어가 현대 한국어와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정도의 관련성은 한국어가 고구려어의 직접적이고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고구려어가 일본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한국어와 관련이 적다는 말은 기존의 일부의 주장은 옳다고 볼 수 없다. 한국어는 분명 고구려어를 계승한 언어이다.
3.국호 Korea
세계에 고구려의 국호를 나라의 국호로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Korea는 고려에서 나왔고, '고려'는 고구려 중엽 이후 고구려인들이 직접 사용했던 고구려의 국호였다. 오늘날 '고려'라 하면 왕건의 고려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고구려라는 단어 대신 '고려'라는 말은 고구려라는 의미로 썼고, 오늘날 한국과 중국에 남아있는 많은 지명들에서는 '고려'라는 명칭이 고구려의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한국은 오늘까지도 고려(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을 쓰는 나라이다.
4.계승 의식
고구려 멸망 후 통일 신라, 발해 시대에도 고구려 계승 의식을 유지했고, 이는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어 오늘날 한국에까지 이어졌다. 고구려 계승 의식이 계속 전승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진 고구려 유민들이 통일 신라 사회, 발해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귀족의 지위를 어느 정도 유지했다는 점이다. 발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통일 신라에서도 고구려 귀족은 백제 귀족들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 백제 귀족이 4, 5두품으로 몰락한 반면 고구려 귀족은 6두품 신분을 계속 유지했고, 고구려인의들의 탄탄한 세력은 이는 결과적으로 태조 왕건의 고려라는 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고려 건국의 주축 세력이 과거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패서 출신이었다는 점을 본다면 적어도 초기 고려의 귀족들은 상당수가 고구려 혈통을 지닌 사람들이었다고 보아야 옳다. 패서 지역은 고구려 시기 고구려 3경(평양, 국내, 한성) 중 한 곳이었던 한성(재령, 장수산성)이 있었던 곳이고, 고구려 계승 의식이 매우 강했을 수도 평양과 강 하나를 두고 있는 지역인 만큼 순수 고구려 혈통을 지닌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이들은 고구려 변방의 고구려 계승 의식이 적었던 거란, 말갈(여진)인들과는 달랐다. ㅡ 이런 까닭에 오늘날에도 만주족들은 발해에 대한 계승 의식은 밝힐 지언정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은 거의 갖고 있지 않다. ㅡ태조 시기 황해도 평산, 봉산 지역을 뿌리로 삼으며 등장하여 이후 고려의 귀족들이 된 성씨들의 경우 고구려인의 혈통과 상관이 있다고 보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발해 멸망 후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 귀족들에 합쳐지면서 이런 고구려의 계승 의식은 한층 강화되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4.평양이라는 도시
평양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구한 전통을 지닌 도시이다. 고조선 시기 왕검성이 있었던 곳이고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켰을 때 낙랑군의 중심지를 두어 한반도에서 가장 중시했던 도시이기도 하다. 평양은 동천왕 시기 일시적으로 고구려의 수도인 적도 있었고, 고국원왕 시기에도 잠시 수도로 삼은 적이 있었다. ㅡ 물론 고국왕왕 시기 평양 동황성을 오늘날 평양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ㅡ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를 한 후 평양은 한국 역사상 최강국이던 고구려의 전성기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고구려의 유명인들인 연개소문, 을지문덕, 온달, 영양왕, 보장왕, 연남생 등의 고구려인들은 평양을 무대로 활동했고, 고려 시대에는 평양을 수도 중 한 곳인 서경으로까지 삼아 매우 중시하게 됐다. 조선조에도 평안도 지역에서 오늘날로 치면 광역시, 거점 중심 도시일 '부'(평양부)의 자위를 받은 평안도 지역의 유일한 도시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서는 오늘날 한국인에게까지 고구려의 수도이자 북방 지역의 중심지 '평양'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분단된 북한 지역의 수도가 평양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양이 한반도 북방의 중심지였던 것은 적어도 수천년 전인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서경 시기와 그 연원이 닿아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평양은 분명 고구려가 한국에게 물려준 큰 고구려의 유산임이 분명하다.
5.거문고
한국 국악의 양대 현악기는 거문고와 가야금이다. 가야금이 남방의 가냘프고 여성적이며 섬세한 음률은 내는 악기라면, 거문고는 북방인의 단단하고 거칠고 투박한 음을 내는 악기이다. 왕산악이 만든 이 악기는 고구려의 소리를 전해주는 악기이다.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은 거문고를 한국의 중심 전통 악기로 계승 발전시켜왔다. 고구려 멸망 후 거문고는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 거주하던 고구려 유민에게서 전수돼 온 한반도로 퍼져나가 계승됐다고 한다. ㅡ 출처 : 위키백과 ㅡ 옥보고는 고구려의 거문고에 많은 곡들을 붙여 명실상부한 한반도 전체의 악기로 확립하는 역할을 했다. 고구려의 악기를 사용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오직 한국뿐이다. 한국은 분명 고구려의 음악을 계승한 나라이다.
6.해서탈춤(복식)
한국의 황해도 일대에서 전승돼 오는 봉산 탈춤과 같은 춤들은 본래 해서 탈춤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봉산탈품은 약 200년 전 생겼지만 그 연원은 훨씬 오래 전인 고구려까지 추측해볼 수 있다. 봉산 탈춤의 춤사위는 무용총에 그려진 한삼을 손목에 잡고 춤을 추는 고구려인의 춤사위와 매우 닮아있다. 한국 춤에만 남아있는 한삼은 부드러운 선을 표현하는 춤 도구로서 한국 이외에는 없는 매우 독특한 춤 도구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인의 느린 3박자의 전통 춤사위는 고구려인의 춤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7.온돌
오늘날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온돌은 본래 부여와 고구려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쓰이던 난방 장치였다.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전파됐다. 이 특이하면서도 매우 효율적인 장치 온돌은 일본이 빼앗아간 조선 건물에 하룻밤을 묵던 미국인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난방을 하는 조선 건물의 온돌이라는 장치를 보고 오늘날 현대식 보일러의 영감을 얻었다고도 알려져있다. 전 세계인이 지금은 향유하는 이 온돌은 중국, 일본에는 본래 없는 고구려인의 요소를 계승한 한국의 전통적인 난방 장치이다.
8.별주부전
별주부전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서사 작품이다. 이 이야기는 김춘추가 연개소문을 만나러 평양을 방문하여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건질 수 있게 귀띔을 해준 고구려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별주부전이 고구려에서(아마 신라에서도)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별주부전은 한국 서사 문학 작품으로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 한국에까지 이어져왔다.
이밖에도 문학면에서 고구려는 한국 한문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시 황조가, 여수장우중문 시 등 뛰어난 고구려의 한시 작품은 오늘날 한국 한시의 거의 시조격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다. 한국인들의 고려, 조선 시대 시기 뛰어난 한문학 실력은 고구려인에게도 물려받은 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고구려인은 매우 문학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이 입으로 아님 글로 남긴 여러 서사 문학 작품들과, 벽화에 나타나는 별과 천체에 대한 고구려인의 상상력은 한국인의 우수한 언어 감각, 과학적 상상력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9.한국성의 '치'
조선조까지 한국 성에는 ‘치’라는 독특한 구조물이 있었다. 치는 본래 고구려의 성에 있는 시설로 적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이러한 시설은 조선조 시기 지어진 수원 화성에도 잘 나타나는데, ‘치성’이라는 구조물로 남아있다. 한국 축성술에는 과거 우수했던 고구려의 축성 기술이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으며, ‘치’와 같은 축성법은 중국, 일본성과는 차별되는 한국의 전통 축성 기술이다. 이러한 축성술의 계승은 당연히 통일 신라, 고려 시대 고구려 축성술을 아는 고구려인들을 통해 전수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10.씨름, 태권도(수박도)
고구려 각저총 벽화에는 현재 한국의 전통 투기 종목인 씨름으로 보이는 힘겨루기 경기 장면이 나온다. 각저총에 나오는 자세로 겨루기를 하는 경기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한국의 씨름이 거의 유일하다. 세계에서 고구려의 각저총에 나오는 씨름을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요새 침체기를 맞고 있는 전통 씨름은 본래 한반도 전역에서 널리 행해졌던 전통 투기 종목이었다. 한국의 전통 씨름은 분명 고구려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국의 국기 태권도의 기원 역시 고구려에서 찾을 수 있다. 안악3호분 벽화에는 마치 오늘날 택껸을 하는듯한 자세로 손으로 무예를 겨루는 장면이 나온다. 수박도는 고려, 조선 시기에도 행해졌고, 오늘날 태권도의 성립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삼국, 삼한 -역사기록
중국, 일본의 어느 전통적인 사서도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기술한 역사서는 없다. 한국의 삼국사기, 제왕운기, 삼국유사 등 고려 시대 쓰여진 사서에서는 고구려를 분명한 한국사의 일부로 기술하고 있다. 이렇듯 사서에 고구려를 자국사로 서술한 것이야말로 고구려가 한국사의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일부이며 20C 후반에 들어와 중국에 내새운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분명히 꼬집는 증거이다. 이런 사서의 증거 때문에 중국에서도 고구려가 한국사가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가령 중국인들이 쓴 중국어판 위키백과를 보니 조선의 역사의 일부로 고구려를 분명히 기술해 놓았더라.
요새 들어 고구려와 동북공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다소 시들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역사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한국은 고구려를 더 알고 한국이 계승해온 고구려적인 것들을 잘 계승하려고 노력해 나가야 할 것이다. 최근 고구려를 주제로 만들어지는 드라마가 많은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일본과 중국 백과사전에 고구려를 주제로 한 드라마 ‘연개소문’, ‘태왕사신기’, ‘주몽’, ‘광개토태왕’ 등이 한국에서 제작됐다는 사실이 상세히 실려있었다. 아마 중국인, 일본인들은 그것을 보면서 무의식적으로나마 한국이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인 것을 느꼈을 것이다. 고구려를 주제로 한 문학, 영상 매체, 음악, 미술 등 문화 활동이 활발히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역사는 기억하고 계승하려는 의지를 가진 자의 것이다.
첫댓글 이런 분명한 사실이 있음에도 고구려와 한국의 관계를 부정하는 이종욱 같은 부류가 있다는 것이 문제죠.
우리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고구려를 우리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반대로 중국의 역대 국가들은 고구려를 자국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구요. 淸代 末까지 수많은 역사서가 쓰였지만 고구려는 늘 장성 밖의 동이국가로 되어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증명합니다.
귀거래사님 말씀처럼 고구려사가 한국사라는 사실은 한국사 전체를 통해 우리 조상들 스스로가 끊임없이 인정해왔고, 중국인들도 인정해온 사실입니다. 고구려사 연구를 계속 꾸준히 해나가면서 우리 국민들이 고구려에 더 관심을 갖고 특히 고구려가 한국사인 것을 문화적인 방법들을 통해 계속 전파해나간다면 중국의 어용학자들이 동북공정을 아무리 해도 고구려사가 한국사라는 진리를 바꿀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국에 중국 정부가 시키는대로 하는 어용학자가 아닌 양심있는 진짜 학자가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네요. 중국 학자들도 속으로는 고구려가 한국사라는 사실을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을 터인데 말이죠
최치원은 왜 마한이 고구려라고 했을까요?
처음에 삼한은 마한, 변한, 진한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의 한족만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통일 신라 때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지칭하는 말로 바뀐 것 아닐까요. 삼국사기에 고구려 장수를 '마한 장수'로 표현하는 구절이 고구려 본기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고구려인 스스로 고구려를 마한으로 생각했다는 주장도 어디선가 본 것 같네요.
제가 몇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일단 7번의 온돌, 그건 이미 초기철기시대 연해주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옥저 문화권에서 먼저 쓰던 것을 고구려가 차용했다고도 볼 수 있습죠. 즉, 엄밀히 말하면 고구려 남겨줬다고 자신있게 말하기 곤란합니다. 9번의 치도...중앙아시아 쪽의 치 문화가 고구려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거론되었던 것도 사실이며, 최근에는 홍산문화권(신석기문화)의 치 문화가 고구려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냐 하는 언급도 있습니다. 즉, 이 역시 고구려가 최초로 전해준 것은 아닙니다. 이밖에 고고학계에서는 고구려 토기의 영향이 오늘날 옹기에 전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도 포함시키면 좋을 듯 하네요~
예전에 여휘님이 출산후 미역국을 먹는 문화에 관한 글을 올려주셨는데, 고구려인들이 고래의 습성을 보고 출산후에 미역을 먹었다는 기록으로 기억합니다. 놀랍기도 하고 신기했었죠.
마지막 구절이 인상 깊내요. 그렇습니다, 역사란 것은 끊어지지 않고, 계승이라는 인식이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
중국 쪽에서 발해사를 자국화 했던 첫 시도가 60년대인가, 70년대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건, 현재의 우리들 이전의 과거의 이 땅의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였느냐겠죠.
고구려의 부활을 외치며 일어난 500년 왕조의 정통성을 지닌 고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누구처럼 다민족 복속, 영토 분쟁, 역사 문제 등의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걸 모두 고려한 후 천년도 더지난 후에 자신들의 역사라며 박박 우겨대는 누구들 하곤 대조적이죠.
정작 과거의 그들은 그런 기록을 하나도 남겨주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ㅡㅡ
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끊임없이 기억하고 조상들의 업적을 우리의 것으로 이으려는 노력이 있는한 고구려는 한국 역사입니다. 우리가 더 분발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