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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기록성
-에세이문학 2017년 겨울 호를 읽고-
方 旻
1. 문자는 기록을 위한 기호다. 기록은 언어 의미를 표현하고 전달하며 보존하는 기능을 한다. 기록은 이런 의미에서 현재를 정리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언어 행위이기도 하다. 이 기록이 가장 큰 빛을 발하는 으뜸 영역은 아름다운 예술성을 지향하는 문학 글쓰기다. 기록 측면에서만 보자면 문학 장르 중에서는 수필이 단연 돋보인다. 수필은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실체적 진실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대부분 작가 실제 체험을 재료로 삼는 것이라서 그러한데, 이는 역사 사실성과도 통한다. 사실은 진실을 담보하기 위한 기본 터전이라서 그렇다. 소설도 이를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체험의 허구화를 전제한 것이라서 사실적 진실성은 수필에 필적하기 어렵다. 진실 면에서 역사와 통하는 수필의 이 기록성은 그러므로 역사물을 문학의 반열에 가끔 올려놓는다.
개인사를 기록한 안네 프랑크 일기가 문학작품으로 읽히고, 개인 회고록인 처칠의 글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바로 이런 때문이다. 또 얼마 전인 2015년 노벨문학상은 인터뷰 기록을 바탕으로 작품을 쓴 작가에게 돌아갔다. 이를 보면 문학에서 기록의 역할은 심대하다. 이런 세계적 흐름 말고 우리에게도 서애 징비록이나 충무공 난중일기, 연암 열하일기 등이 바로 이러한 반열에 들 수 있다. 우리 선조는 유독 기록 전통을 소중하게 여겼다. 조선왕조실록은 오래 전에 유네스코 기록 유산에 선정되었듯이 세계적 자랑거리이다. 이 기록 전통은 글 좀 읽고 쓴다는 선비는 한두권 정도 기록 유산을 남겼다. 여성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한중록이나 계축일기 등은 우리 모두 학교에서 문학으로 배운 바도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수필에 속하는 이런 글은 셀 수 없이 많다. 따져보면 현존하는 우리 문학 중에서 전통을 가장 잘 유지하고 계승 발전시킨 장르는 수필이다. 다른 갈래 문학은 고유 전통보다 서양 근대문학과 관련성이 더 깊은 반면에 수필은 그 제재 다양성과 질 양 면에서 전통성이 다른 장르를 압도한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바로 체험 사실의 기록성이다. 이 기록성 가치를 문학에서 인정한 것이 앞서 그런 결과를 보인다. 때문에 우리가 수필문학에서 기록성을 나름 고유한 속성으로 여겨도 될 충분한 근거를 확인한 셈이다.
기록이 수필에서 문학 가치를 지닌 작품이 되기 위해선 역시 갖춰야 할 덕목이 있다. 그것은 개인 기록이 어느 사회와 한 시대 보편성과 전형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 여부다. 위에서 말한 안네는 전쟁 포화 속에서 개인 삶이 어떻게 전개되고 굴절되고 있는지 어린 소녀 눈에 비친 시대상이 거울로 보듯 드러난다. 처칠 회고록에도 다양한 개인 체험이 주를 이루지만 그 안에는 그 시대 전쟁을 둘러싼 인간들 삶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편적 시대성을 갖추고 있다. 이와 동일한 잣대를 요구할 수는 없지만, 수필 경우에도 개인 체험 기록이면서 그것이 인간 보편성과 시대적 전형성의 한 차원을 열어보여 준다면, 또는 한 사회 문제를 제기하거나 진단하고 또 시대의 가치 있는 것을 증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바로 이 기록은 개인적 기록에서 문학의 보편성과 항구성을 획득하여 바람직한 문학 가치를 담은 작품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2. 이에 이번 겨울 호에 실린 몇 작품을 대상으로 이러한 수필의 기록성 덕목 실상을 건져보기로 한다.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은 김경애의 <작은 새야 날아라>다. 민족 분단기 북녘 땅에서 벌어진 한 가족의 고난사를 다룬다. 시간으로 따지면 70 여년 전 일이다. 개인이나 세대로서도 망각의 강물로 멀리 사라졌을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데 작가에겐 “간밤에도 나는 꿈을 꾸었다. 후미진 옥이네 집 언저리와 그녀의 우중충한 표정과 어머니의 한숨소리가 군홧발처럼 나를 짓눌렀다.”고 지금도 아픈 기억이 “문신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문신이란 어쩌면 영영 벗겨버릴 수 없을 숙명의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반세기 이상 세월이 흘러 이제는 기억 지반 아래에서 단단한 망각의 암석이 되었어야 할 과거이다. 그런데 그녀에겐 아직도 활화산의 마그마로 기회 있을 때마다 치솟아 꿈으로 폭발한다. 분단의 역사가 현재진행인 지금 우리에겐 이산가족의 그리움이나 북녘 땅에서 겪었던 아픔은 여전히 과거로만 정지된 게 아니라 현존하는 현실이다. 평화올림픽을 위해서 남북대화 회담을 열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이 글은 현 시대에도 연소하지 않고 작동하는 개인 체험 증언이다. 개별 사연이지만 이건 역사에서도 놓치기 쉬운 기록이다. 어쩌면 나아가서 역사가 지나칠 빈터를 채울 중요한 유물 가치로도 볼만하다. 한 개인의 단순한 체험 사실 기록으로서도 가치가 있지만 수필로 썼기에 더욱 생생한 감동적 진실을 전한다. 한편으론 숨기고 싶은 작가만의 뼈저린 아픔을 햇살에 쪼이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깊은 수렁에 묻어두었던 사연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다. 새장에 갇힌 새 한 마리가 긴긴날 접어두었던 날개를 펴려고 파닥인다.” 이제 작가는 그 악몽의 되풀이에서 벗어나고 싶다. 고통을 치유하고자 글로 써 낼 용기를 낸 것이다. 누구라도 마음 깊은 곳 사연을 스스로 드러내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다. 속담에 병은 소문을 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드러낼 때, 글로써 표현하여 기록으로 남길 때가 비로소 치유 시작이다. 분단 때문에 가족이 자유롭게 왕래하지 못해서 생긴 어린 시절, 북녘 땅에서 겪은 고통의 정신 트라우마는 한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이젠 우리 민족이 공유하고 의식하는 보편이 되었다. 아직도 치유해야 할 이 시대의 문제로 남아있어서 개인과 사회 또는 국가적으로 치유하려는 여러 시도는 그 담긴 의미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작은 새야 날아라>의 개인 기록은 시대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이로써 문학 가치를 굳건히 담아낸다.
다음엔 해외교민의 삶을 스캔한 작품 정민아의 <피카 하실래요?>다. 작가가 미국 시애틀에 살면서 아들이 이사 가는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따라가 맞이하는 현지 풍정을 가볍게(?) 스케치한 글이다. 한민족이면서 해외에 이런저런 이유로 거주하는 수가 이 시대는 몇 백만에 이를 것이다. 현재는 해외에서 거주하는 일이 그다지 새로운 뉴스는 아니다. 국제화 개방화 시대에 한둘 해외 친척과 친지가 없는 내국인은 별로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해외 동포 작가 글은 일정한 기록 가치를 갖는다. 타국에서 살아가는 고난과 역정, 향수와 이방인으로서 낯섦과 특이한 감정 등은 수필의 제재 면으로 보아서도 대단히 개성적인 독특한 글감이다. 그것이 개인의 사적私的 기록에 그치지 않기 위해선 나름의 인간 보편성과 시대 조류를 반영하거나 전형적 세태 풍정을 담아야 한다. 예컨대 ‘나는 이러이러한 곳에서 저러저러한 삶을 살았는데, 요래 저러한 생각을 했고 그러그러한 감정을 가졌다’ 정도에 그친다면 문학 가치는 별로 매길 게 없다. 다만 개인에게 중요한 기록 유산일 따름이다. 이 정민아의 작품에서 이를 넘어서는 특이함이 있어 다룰 만하다. 그것은 “피카”라는 낯선 용어와 풍습을 소개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이의 연결 고리를 “한국산 커피믹스”에서 찾아 “우리나라 다방”을 떠올린다. 나아가 화자 기억 속 아버지의 다방을 회상하여 끌어내고, 맹목적 서구문화 추종 자세에서 벗어나려 하면서 “다방 문화야말로 피카의 조상이 아닐는지”로의 사색 확장과 해석 주관성이 돋보인다. 특히 주목할 바는 몸은 한반도 공간을 떠나 타지 공간에 있어도 이 땅의 공간 인식과 시간 기억이 새로운 풍물을 접하면서 작용한다는 점을 유연하게 드러내는 점이다. 이는 일종 정신 은유에 해당한다. 다른 것에서 유사성을 찾는 인식 행위, 즉 유추가 은유의 본질 바탕이다. 누구일지라도 한국에서 일정 기간 삶을 영위한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정신 은유에 의한 사고 작용은 타국 생활을 수용하면서 갖게 되는 보편적 특질이다. 해외교민에게서 드러나는 한반도의 과거 시공 체험은 그들의 타지 삶을 일정 부분 견인하는 초석이면서 때론 방해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정민아의 글은 이런 보편성을 보여주기에 개인 기록을 넘어서 문학 가치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주목한 이유다.
3. 임진옥의 <마른 꽃>은 이 시대 노년 문제를 다룬다. 장수 시대에서 필연인 후속 세대가 감당할 부양 문제와 건강한 노년도 후진에게 짐으로 다가서지만 질병은 더 큰 희생과 살핌을 요구한다. 이젠 사회 복지 제도의 발달로 개인이 전적 부담하는 시대는 아니다. 하지만 이럼에도 실상은 이러저러한 문제가 잠복해 있다. 이 문제를 <마른 꽃>은 직시한다. 요양병원에 시어머니를 입원시키고 방문한 병실에서 작가가 마주치는 현장, 네 명의 경우를 하나씩 돌아본다. 병실에서 넷이 보여주는 행태는 각기 다르다. 그것도 그들을 처음 볼 때와는 다르게 조금씩 변해가는 현재 모습이다. “초점 없는 눈을 떴다 감는다.”거나 “사 년이 넘는 세월을 그 자리에 누워 사위어간다.”하는 것을 보고 “주름진 노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가슴에 묵직한 돌 하나 매달아 놓은 것 같다.” 이것은 동정이나 비애감이기도 하고, 안쓰러움과 연민으로도 부를 감성적 반응이다. 작가는 “요양 병원에 갔다 나오면 한참을 생각 없이 걷는다.” 라고 하지만 생각할 수 없거나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 현실을 알고 느낀다한들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해서 해답이 없다고 외면하거나 문제로 삼을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문제를 발견하고 기록하는데 문학의 역할이 있다고 보는 게 옳다. 물론 적극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도 있을 수 있으나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고, 문학은 충실한 기록만으로 제몫을 다할 수 있다. 이 지점에 문학인의 사명과 책임이 있다. 문인이 한 사회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살아가면서 시대와 외따로 떨어져 골방이나 벽지에서 삶의 근본적 구도 행위를 할 수도 있고, 그런 글을 작품으로 남길 수도 있으며 그 나름의 가치도 엄존하지만, 그런 문학은 결코 바람직한 문학의 길은 아니다. 그것은 문인으로서 사회적 책임감을 일정 부분 회피하는 일이다. 누구나 금전 소득이 있으면 정해진 세금을 국가에 납부해야 하는 의무와 같다. 임진옥이 수필가로서 제기하는 이 시대 노인 요양 문제는 그녀 시어머니를 통해서 삶의 실체로 다가왔다. 냉정하게 보면 극히 개인 가정사 문제다. 그러나 작가 의식은 이 문제를 개인 문제로 국한하지 않고 다른 환자들로 시선을 넓혀서 한 집안만의 문제가 아닌 오늘 우리가 함께 부딪고 해결해야 할 공통 문제로 보편화시킨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은 그들이 “한없이 애잔하고”,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고 “한 때는~향기로운 꽃”이었으나 이제는 “시간에 갇힌 마른 꽃”이라는 최종 인식인데 퍽 애상적 감성 관점으로 마무리한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이를 지나치면 자칫 이 대목에서 노인 요양 문제의 잘못과 해결 대책을 제시하고 주장한다면 문학의 품을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은 사회문제를 다룬 칼럼이나 논설로 되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의견 제시와 주장이 아니라 문제를 공감하고 동정하는 인간다운 정서의 펼침이다.
이현수의 <밭에서 일군 생각>은 이 시대 교육을 걱정한다. 말도 많고 전문가도 많은 교육 분야는 우리나라가 이 부문에서 아마 세계 대회 금메달감이라 말해도 될 정도다. 그만큼 지나친 자녀 교육열은 득보다 실이 많아 삐뚤어진 길로 갈 가능성도 높다. 옛말에 교육은 백년을 앞두고 세우는 계획이라 했다.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백년을 살지도 못하는 인간에겐 언제나 풀기 어려운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육에 대한 각자 의견은 어쩌면 모두 맞거나 모두 빗나간 것으로 보아도 하등 잘못된 판단은 아니다. 이처럼 어지럽게 얽혀든 어려운 교육 문제에 관해 이 작가는 자기 의견을 낸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 의견에 대한 찬반 동의나 문제점을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사람 수만큼 너무 많은 의견이 난무하여 합의를 이루기는 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 문제인데 주목하는 것은 작가 의견이 머릿속에서 나오지 않고 일테면 아마추어 농부가 밭을 가꾸면서 유추한 교육론이란 점에 나름 의미가 있어서다. 정리하자면 공론이나 추상이 아니라 삶의 체험을 거친 땀내 진한 땅에서 얻은 생각이란 점이다. 이 시대 교육에 관한 문제의 심각성을 농부 체험이란 거름종이를 거쳐 기록하는 것으로도 수필이 할 수 있는 문학 역할로 볼 수 있겠다.
강호형의 <개 팔자>는 이 시대 조류를 증언하는 테마로는 맞춤하다. 한국에서 애견 인구가 날로 늘어나면서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다. 올해부터 개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의 다양한 문제를 다루기 위한 관련법도 강화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애견을 넘어서 견공, 반려견 혹은 자녀(?)의 반열에까지 올라선 개 문제는 각자 관점에 따라 아주 폭넓은 의견이 우리 사회에 넘쳐난다. 옛말에도 있듯 ‘개 팔자가 상팔자’가 정말로 이 땅에서 지금 실현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여러 작가가 이를 제재로 다룬 글을 써 발표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이 제재는 다소 식상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개에 관한 시대 조류에 따른 매우 놀라운 소식이 넘쳐 나고 있는 마당에 개의 처지 변전을 비판하는 시선이나 풍자와 조롱하며 조감하는 일은 어느 작가라도 수필 제재로 당연히 다룰 만하다. 다만 이런 시류를 반영한 유행 테마 글에서 중요한 것은 개성적 시각 여부이다. 이 글에선 잘 나가는 개 팔자에 견주어 작가의 반성적 관점을 주목한다. “개, 고양이에게까지 베푸는 애틋한 사랑과 정성을 나는 친척이나 이웃은커녕 부모님께도 바쳐보지 못했다.”고 자성함으로써 단순한 세태 기록이나 고발에 그치지 않고 자아 삶의 일부와 연결시킨다. 이점이 주목할 수필로 환승하는 걸 가능케 한다.
류창희의 <법 & 밥>은 법치주의 국가의 법 이상과 밥벌이를 해야 하는 현실의 얽히고 꼬인 실상을 보여준다. 대통령도 탄핵으로 권좌에서 내리는 법의 엄정성이란 이 시대 모토에 작가는 신호위반을 염려하여 운전도 더욱 조심한다. 그녀는 시민도서관 강사로 스무 해 동안 활동 중이다. 자칭 ‘밥벌이’라 하지만 심리적 비하일 뿐 실제는 자원봉사 또는 재능기부가 더 잘 어울린다. 그럼에도 “비정규직 강사”로서 당국의 관리를 받는데 수강생의 “인터넷 민원”으로 “졸지에 블랙리스트 해당자가 되었다.” 그는 “이런 굴욕 앞에서도 계속 일을 할 것인가.” 자괴감에 빠진다. 이 글에서 우리는 시대를 증언하는 몇 개 단어를 읽는다. 그걸 구체화하여 깊이 말한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의 등장만으로도 독자는 내막을 짐작하거나 문제에 공감할 수 있다. 예컨대 “탄핵인용, 인터넷 민원, 블랙리스트, 비정규직, ‘김영란법’, 대통령”들이다. 요즈음 이 사회의 복잡하게 얽힌 실상을 대표하는 이 말들은 이 글이 시대적 보편성 지평 어딘가에 자리를 잡는다는 말이다. 놀라운 것은 성격이 다른 말들이 한 개인의 작달막한 체험 이야기에 다 관련된다는 현실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복합적인 문제에 얽혀서 개인과 사회, 국가의 문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한 개인이 온전히 “밥값”하기 위해 걸어야할 길에 여기저기 시한폭탄이 매설되어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진단하는 셈이다. 개인의 “밥벌이”에서 시작한 사소한 사건에도 거미줄 이상의 촘촘한 사회 문제의 각종 사태에 얽힌다. 그럼에도 엄중한 삶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현재 우리 사회는 저마다 격동의 몸살을 앓아가며 ‘밥벌이’를 하며 찌들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엄혹한 모멸적 어둠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희망의 봄을 노래하고 “법도”와 “밥맛”을 삶의 핵심으로 삼아 양자를 조화시키는 긍정의 태도를 보여주어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왕린의 <‘혼술’하는 사람들> 또한 사회 문제를 진단하고 그 실상을 증언한다. 작가는 남산 하산 길에 친구와 들린 술집에서 낮술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다소 어색한 풍경인 “휴일 대낮에 ‘혼술러’”를 접한다. ‘혼술’, ‘혼밥’ 따위는 일인 가구의 증가 추세와 함께 이 시대 꽤 익숙한 말이다. 이해의 폭을 넓히면 “신세대들의 요즘 생활 방식”이다. 작가의 시선도 이런 세태를 문제시하거나 어색하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각자 혼술 하는 사정은 다를지라도 집 근처가 아닌 특정 장소에서 혼술 하는 이 시대 한 풍경이다. 진짜 여기서 주목할 바는 작가가 술집에서 만난 그들이 신세대로 보이지 않는 데 있는데, 이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진단이다. 작가와 동년배 일 듯한 그들에겐 이 혼술의 장소와 시간이 문제다. “일요일 낮”의 시간이고, “을지로 3가 노가리 골목”에 있다. 이 시각은 가족과 함께 보내야 마땅한 아니 익숙한 시간이고, 장소도 집이나 가족과 함께 하는 곳이어야 하는데, 그들이 혼술 하는 시간도 그러할 뿐, “인쇄업이 성행할 때, 노동자들이 퇴근 후에 한잔하던 곳”이란 데 있다. 말하자면 이 시각과 그 장소는 매우 예외적이다. “앞 테이블의 남자는 마누라와 한판 붙고 왔을까. 연신 맥주잔을 비워내며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남자는 마음의 허기를 술로 채우는 중인가. 구석에 앉은 남자는 또 왜 저럴까. 어깨가 너무 쳐졌잖아.” 그러다 보니 “홀에 들어섰을 때의 들뜬 기분은 사라”지고 상상은 “내 오빠 내 남편도 어디선가 저들처럼 혼자 술을 마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빠진다. 가까운 사람간의 소통 부재와 소통 불능, 혹은 사람 사이의 시류적時流的 소외를 넘어서 자발적 소외의 사회 현상을 보인다. 어쩌면 지금은 다소 낯설지라도 얼마 뒤엔 이런 풍경이 더욱 익숙해져 주류가 될 때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전망하게 한다. 성큼성큼 변해가는 시대의 뒷골목을 르포 작가가 의도와 목적을 분명히 하여 취재하러 탐방하듯 간 것이 아니지만 결과는 시류 변혁의 현장을 고스란히 증언한다. 이 말은 이 글이 시대 사회적 보편성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4. 수필은 일반 신문과 기록 형태면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신문 기록은 사건 체험 당사자가 아닌 기자, 타자 시각이다. 사건의 기록 주체가 타자라는 면에서 자아가 주체인 수필과 다르다. 그뿐 아니라, 체험의 구체성에서도 다르다.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면서 객관 시각으로 관찰하거나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하여 전달한다. 물론 어떤 기록물에도 기록자 주관이 배어들기 마련이다. 객관성을 지향하는 신문기사에도 어느 정도 기자의 주관 시각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수필의 경우는 신문 기사와는 질과 양 면에서 차이가 많은 주관을 드러내고 보여준다. 그게 바로 문학과 신문의 기록면의 다른 점이고, 이 다름에 문학의 의미가 배어있다. 결국 수필은 작가 자신이 겪은 사건은 물론이고 그가 듣거나 관찰한 것이라도 그만의 독특한 주관 시각으로 분석하고 해석한 그만의 관점을 담는다. 작가 스스로 파악하고 인식한 것으로서 그의 인생관 또는 세계관이 관찰 대상과 해석에 녹아들어있다는 점이다. 즉 작가의 인생이 직간접으로 연결된다. 이를테면 한 인간과 다른 인간의 인생 스파크가 일어났을 때 수필 작품으로 탄생한다는 얘기다. 이점은 신문기사 또는 역사와 외형상 동일한 기록이면서도 다른 문학만의 특성이다. 이로써 수필의 기록성은 문학으로서 온당한 제 몫의 의미를 지니고 나름의 가치를 차지한다.
첫댓글 방민 교수님, 졸작<작은 새야 날아라>를 이리도 극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살면서 잊을만 하면 불쑥불쑥 되살아나곤 했던 기억을 수필 한 편으로 빨아 말렸더니 곰팡냄새도 희석되었고
이젠 햇볕 아래서 작은새가 배시시 웃어도 되겠다 싶습니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