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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과 현실 2012 하반기호]
문자시조의 미래
권갑하
1.
시조의 형식미학을 필자는 정형성, 유연성, 세련성으로 정리한 바 있다. 정형성은 시조 한 수가 갖는 고정 불변의 “3장 구조”를, 유연성은 각 장이 지닌 신축성 있는 “4음보의 율격구조”를 일컫는다. 세련성은 예술적 격조를 지닌 “종장의 전환구조”를 의미한다. 이러한 미학을 바탕으로 21세기에도 시조는 활발히 창작되고 있으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시조 형식을 운용하는 시인들은 이론가와 달리 예민한 감각으로 시대 변화에 반응하며 창작의 촉수를 작동한다. 이러한 능동성이야말로 시조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사멸되지 않고 시대와 독자로부터 외면당하지 않는 예술 양식으로 생명력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조선 초중기에는 성리학적 시대정신에 부응해 단시조 형식이 부흥했고, 후기에는 유흥적 사회 분위기에 음악적인 요소가 활성화되면서 사설시조가 대중적 종합예술로 한 시대를 풍미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시조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까. 중요한 것은 시대 정서에의 부응이다. 시조는 박제된 문화유산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는 물론 미래 진행형의 문학 장르여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 시조성을 구심력으로 오늘 이 시대의 자유정신의 수용이라는 원심력을 발휘해야 하는 이유다. 실제 창작 현장의 경향도 시조가 갖는 양식상의 한계를 극복하는 자유시성을 만끽하면서도 전통 시조성의 내적 질서를 잃지 않는 현대 시조시학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 100년의 현대시조 모습을 압축해보면, 서구에서 들어온 자유시와 길항하면서 문자시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시와 노래가 한 몸이었던 옛시조가 ‘현대’라는 대변혁에 부딪히면서 창(唱)과 분리되어 현대 시문학의 한 갈래로 자리 잡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시조를 노래와 분리해 시문학의 장르로 자리매김하는 것만이 현대와 미래에 제대로 부응하는 길인가 하는 점이다. 자칫 자유시를 의식한 21세기의 성급한 자기규정은 아닌지 의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필자는 ‘시조’라는 명칭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시조(평·엇·사설) 명칭, 이대로 쓰도 되나」(《나래시조》 2007 여름호)라는 글을 통해 오래 전 지적한 바 있다. 시조 시인들은 문학의 영역 안에서 활동하다 보니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시조’라는 명칭은 현재 음악상의 시조와 문학상의 시조로 혼용되고 있다. 한 쪽에서는 시로, 다른 한쪽에서는 음악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시조’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지 못하므로 ‘시조’라고 하면 노래로 부르는 창을 말하는 것인지, 시문학으로서의 시조를 말하는 것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어쨌든 ‘시조’의 명칭 속에는 노래성이 내포되어 있다. 옛시조는 평시조든 사설시조든 읊조리거나 가창이 동반되어 그 시대에 유행하는 창법으로 다양하게 노래로 불려졌다. 그런 점을 생각해볼 때, 설사 시조가 창과 분리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하더라도 18세기에 유행하던 창법으로 오늘날의 시조를 노래하지는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만일 오늘날에도 시조가 노래와 한 몸이라면 오늘날에 유행할 시조 노래는 18세기 스타일의 창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대중들이 좋아하는 노래 형태일 것임은 불문가지다.
그런데, 이런 인식 없이 21세기에도 18~19세기 창법으로 시조를 노래하는 현실은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조가 시와 노래의 복합장르로 진화해 가야 한다면 지금이라도 현대인의 정서에 맞는 노래를 작곡해 부르면 되는 것이다. 18세기에도 그 당시 정서에 맞는 창으로 불려 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자명하다. 21세기는 20세기와도 다르게 이미 문자시에서 소리와 영상이 결합하는 융복합 멀티미디어 환경에 진입하고 있는 만큼 현대시조 또한 현대인이 선호하는 음조로 노래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 관점에서 필자는 시조를 노래로 만들 때 현대가요로 작곡할 것을 권한다. 가곡도 이미 한물간 가락이라 생각하기에 가급적 피하려 한다. 지난 7월 6일, 시조를 현대가요로 만들어 대표적인 문화의 거리인 홍대 앞 롤링홀에서 시노래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이승현, 김민정, 권갑하 시인의 시조 10여 편을 현대가요로 작곡해 공연한 것이다. <나래시조>가 2003년부터 시노래패 <울림>과 시조를 현대가요로 만들어 매년 여름시인학교 때 발표 공연을 해왔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에 홍대 콘서트를 기획한 것이다.
참가자들은 다들 놀라워했다. 젊은 열기의 콘서트라 그 자체로 신선했으며 멜로디도 하나 같이 밝고 아름다워 일반인들도 쉽게 따라 부를 정도였다는 것이다. 함께 한 시인들도 다들 만족해했다. 이 정도라면 기획하기에 따라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끄는 시조 노래를 탄생시킬 수도 있겠구나 하는 가능성을 읽었다고 했다.
시조가 젊어져야 한다는 것은 그 시대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판소리처럼 소수의 전승자만이 연행할 수 있는 박제된 전통 장르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현대 장르라는 인식을 심지 않으면 시조 또한 사멸의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 시조를 너무 문학 장르 안에만 가두려 하거나, 문자시 중심의 서구 이론으로 재단하려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자 중심의 자유시도 이미 시의 위기 속에서 소리, 영상 등과 융합하려 몸부림을 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시조 노래 또한 오늘 이 시대에 맞는 노래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 18세기의 시조창법을 다시 배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문자시조든 시조창이든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시조가 현대 장르이기 때문이다.
2.
시조를 읽을 때 필자는 먼저 가락의 운용을 보고, 그 다음에 내용을 본다. 시조라는 정형의 틀 속에서 활달한 보법이 전제되지 않으면 마치 죽은 물고기를 만지는 것처럼 맛이 나지 않는다. 보법이 긴장되면서도 여유가 묻어나는 그런 시편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특유의 흥취에 빠져들게 된다. 그 다음은 내용이다. 신선한 시적 발상, 대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 등을 살피게 된다.
이번 계절에는 혀에 관한 시편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사실 ‘혀’를 시의 소재로 삼기는 쉽지가 않은데, 공감 깊은 시를 만나게 되어 기뻤다. 정공법으로 ‘혀’를 제목으로 올린 시편부터 읽어본다.
장돌뱅이 허생원의 늙고 지친 나귀 같은
십년 넘어 기력 다한 트럭을 토닥이며
하루만 더 달려보자 편자에 못을 고른다
눈 한번 흘겼다고 떨어지는 하눌타리 꽃
주야장천, 불문곡직 맥 놓고 서버리는 차
더 이상 맡겨두는 일 부질없다 이르는데
언제부턴가 혈관 속 가로막은 노래기 하나
뒤엉킨 다리를 끌고 되똑되똑 지정지정
트럭이 멈춰 서기 전 내미는 꼭, 혀 같다.
-김윤철, 「혀」(《시조시학》 2012 여름호)
자고로 명시는 쉬운 시라는데,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 만취한 다음날 휘두르는 무념무상의 필법이라고나 할까. “장돌뱅이 허생원의 나귀”라는 공감 깊은 서정적 장면을 첫 문장에 끌어들인 노련미도 돋보인다. 허생원의 낭만적 스토리에 가슴 뭉클해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첫수 종장도 선명하다. “하루를 더 달려보자”는 메시지에다 “편자에 못을 고르”는 장면이 손에 잡힐 듯하기 때문이다. 적확한 묘사가 펼치는 공감의 폭은 이렇듯 크고 넓다. 아마도 시인은 이 첫수를 완성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 같다. 어쨌든 “장돌뱅이 허생원의 늙고 지친 나귀”와 “십년 넘어 기력 다한 트럭”의 절묘한 이미지 합치는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 시가 가락의 묘미를 살리며 재미를 더하는 것은 둘째 수의 “주야장천, 불문곡직”이라는 사자성어와 “되똑되똑 지정지정”이라는 우리말 의태어의 신선함에 있다. 사자성어가 지닌 딱 떨어지는 의미도 그렇지만 작은 물체나 몸이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자꾸 기울어지는 모양을 보여주는 “되똑되똑”과 곧장 내달아 가지 아니하고 조금 한곳에서 머뭇거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지정지정”이 무거운 짐을 싣고 겨우 앞으로 나아가는 작은 트럭의 모습을 너무나 실감나게 그리고 있는 탓이다. 셋째 수에 이르면 ‘혈관’이라는 시어를 통해 한순간 트럭이 작가 자신 또는 우리들의 몸으로 환치되면서 의미가 확장된다. ‘혀’가 고단한 삶에 지친 모습을 상징한다면 ‘트럭’은 우리의 몸통이 되어 늙고 지친 나귀처럼 헐떡인다.
꿈을 꿨다,
풀 한 짐 지고 우두커니 서 있는
고요해서 슬펐다
풀 한 짐이 시들었다
천 리길 만리 떠나는 워낭소리 들렸다
핏물 배인 풀 뜯어먹다 배가 고파 울었다
붉은 흙을 뒤집어 쓴
어미 소가 걸어왔다
다 헐은 혓바닥으로 연신 핥아 주었다
-이태순, 「따뜻한 혀2」(《나래시조》 2012 여름호)
이태순의 “혀”는 원초적 사랑과 위무의 모성성을 핏빛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풀 한 짐 지고 우두커니 서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로부터 시작되는 이 시는 슬픔을 안개처럼 드리우고 있다. “풀 한 짐이 시들었다”는 구절은 슬픔을 더욱 안개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 위로 워낭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진다. 그것은 “천리 길 만리 떠나는” 죽음의 이미지다. 이미지스트답게 진술을 배제함으로써 상상력은 고조된다. 둘째 수에 오면 배가 고파 우는 새끼소가 등장한다. 그런데, 핏물 배인 풀을 뜯어 먹다 배가 고파 운다니! 아버지의 죽음 뒤의 현실이 아프게 그려진다. 그 슬픔 위로 “붉은 흙을 뒤집어 쓴/ 어미 소가 걸어”와 “다 헐은 혓바닥으로” 새끼소를 핥아준다. 너무나 애절한 장면이다. 우리 민족의 한의 정서가 ‘혀’라는 이미지를 통해 이토록 강하게 표출될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시의 전면에 깔린 붉은 색은 ‘혀’의 색깔과 합치되면서 한의 정서는 더욱 고양된다. 생명의 숭고함을 노래하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이 시편은 읽을수록 가슴이 찡해지는 수작이다.
어머니는 빨랫줄에 젖은 옷을 내가 걸곤
사람에게 하는 말엔 발이 달려 있다고
하늘 문 한 켠을 열고 우물우물 뱉으셨다
그럼에도 그런 말이 맨몸으로 떠돌다가
때로는 가랑비로 어느 때는 먹구름으로
수시로 찾아와서는 얇은 옷을 적셨다
-김삼환, 「구설」(《시와문화》 2012 여름호)
이 시는 제목이 제시하는 것처럼 “사람이 하는 말엔 발이 달려 있다”는 어머니의 말에 집중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말씀의 무대로 빨래는 여는 장면을 설정했다는 점이다. “젖은 옷”의 물기가 “우물우물 뱉”는 과정을 거쳐 가랑비나 먹구름으로 떠돌다 마침내 다시 지상의 얇은 옷을 적시는 순환과정을 사람의 입을 돌고 도는 ‘구설’의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했다는 점이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내 얇은 옷을 적신다는 이 ‘구설’의 감각화는 놀랍기만 하다. 어머니가 말씀을 들려주는 모습도 “하늘 문 한켠을 열고 우물우물 뱉”는 것으로 조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하늘을 향하고 있어 그 어떤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그런데 이 시가 더욱 깊이를 지니는 것은 어머니가 빨랫줄에 내다 거는 “젖은 옷”과 시인 자신의 “얇은 옷”의 절묘한 대비다. 젖은 옷은 구설에 휘말린 것을 내포하며 그래서 빨랫줄에 너는 행위는 구설을 털어내고 말리는 행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의 “얇은 옷”은 아직은 깨달음이 부족한, 구설에 휘말릴 소지가 큰 대상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혀”의 시적 상상력은 이렇게 다양하고 깊다. 혀가 삶의 고단함을 상징하는 매개물이 되는가 하면 상처를 보듬고 생명을 위무하는 모성성의 원초적 이미지로 승화되기도 한다. 김삼환은 더욱 확장된 시상으로 ‘구설’에 대한 깨달음의 세계까지 열어 보인다. 하나의 대상을 이렇듯 다양한 시각으로 펼쳐 보임은 현대시조의 외면이 그만큼 넓어졌음을 반증한다.
3.
현대 시조에서 새로운 화법 구사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형의 시조라 해도 개성을 중시하는 현대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시조의 율격을 지키면서도 신선한 현대적인 기사법의 구사는 필수적이다.
전라도
보성
벌교
저 갯벌이 종교다
날름
날름
주워 먹는
꼬막은 구휼금이고
널배가
넓은 신전을
헌금도 없이
지나간다
-변현상, 「벌교」(《나래시조》 2012 여름호)
화법이 활달하고 내용 또한 신선하다. 어디에서 이런 신선함이 나오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현대시조에서 3행 기사법이 강조되지만 한두 편만 읽으면 단조롭게 느껴져 시의 맛이 반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3행 기사방식에 대한 ‘창신’은 절실한 현대시조의 과제 중 하나다. 문자 표기법만 해도 현대와 그 이전은 차이가 엄청나다. 특히 조선시대는 한글의 사용과 표기가 정착되지 않은 시기로 세로쓰기와 줄글이 중심이었다. 반면 현대는 한글 전용인데다 인쇄술의 발달로 가로쓰기와 함께 대부분의 글이 인쇄체화 되고 있다. 더구나 21세기는 영상시대라 문자 자체가 영상의 한 요소로 인식될 정도로 바뀌고 있다. 현대 시조에서 행갈이의 다양화는 그런 점에서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벌교라는 지명에 나오는 “교”라는 음절에 모티브를 두고 있다. 전라도-보성-벌교로 이어지는 지명 전개가 자연스러워 단숨에 갯벌로 이어지면서 “저 갯벌이 종교”라는 단정을 가능하게 한다. 실제 목숨 줄이 붙어 있는 가난한 어민에게 펄은 희망이요 젖줄이다. 그러니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둘째 수에서는 앵글을 더 좁혀 꼬막에 집중한다. 그런데 꼬막을 주워 먹는 모습인 “날름/ 날름”이라는 어태어가 동적인 이미지를 잘 살리고 있다. 더 놀라운 수사는 펄에서 나온 꼬막이 가난을 구제하는 구휼금이라는 은유다. 초장의 ‘종교’에 호응하는 대구여서 더욱 그렇다. 종장은 어떤가. 넓은 신전 같은 펄을 널배가 헌금도 내지 않고 지나간다니! 압권이다. 오랜 만에 만나는 명품이다.
벽을 향해 돌아누운 너의 등이 낯설다
구석으로 밀리고 밀려 쪼그라든 풍선처럼
터질듯 팽팽하던 시간 바람이 다 빠져 있다
그랬다 너나 나나 피가 너무 뜨거웠다
상처내지 않고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제 몸이 타는 줄 모르고 불속으로만 뛰어들었다
너는 어찌 나였고 그런 나는 또 너였을까
아침상을 보다가 난 그만 눈물이 난다
맺는 일
홀로 서는 일
그 깨달음을 얻는 일
아이 방 문틈으로 뒤척이는 소리 들린다
그래, 언젠 이만큼 가져본 적 있었니
아주 긴 꿈을 꾼 거야 우리 더는 잃지 말자
* 자비송-빠알리(pali) 경전의 게송으로 자비관의 수행과정을 담고 있는 노래. 업을 벗고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한다.
-김영주, 「자비송-결혼이야기」(《열린시학》 2012 여름호)
“결혼 이야기”라, 솔깃해진다. 한 구절 한 구절 따라가다 보니 공감이 깊다. 속내를 이렇게도 드러낼 수 있구나.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 사실 짧은 정형의 양식 안에 서사를 담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떤 시조를 읽을 때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작품은 명시조일 가능성이 크다.
부부 싸움에는 끼어들지 말라고 가르친다. 빙산의 일각처럼, 그 사정과 속내를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만난 부부가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녹록치가 않다. 부부인연을 가장 원수 같은 인연으로 표현하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르겠다. 전생에 억겁의 인연이 있어야 맺어지는 게 부부라는데…. 정일근의 시에 따르면 “겁은 아득한 시간/ 둘레 사십 리 되는 성 안에 개자(芥子)를 가득 채워 넣고/ 장수천인(長壽天人)이 삼 년마다 한 알씩 가져가서 모두 없어지거나/ 또는 둘레 사십 리 되는 돌을/ 하늘 사람이 무게 삼 수(銖) 되는 천의로 삼 년마다 한 번씩 스쳐/ 그 돌이 다 닳아 없어지는 세월”(「나는 겁을 기두릴 수 없네요-경주남산」)이란다. 그런데, 억겁이라니. 그 세월을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 오랜 세월에 걸쳐 만난 인연인데, 번민과 갈등이 웬 말인가.
시인은 이 오묘한 인연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게송을 끌고 온다. 업을 벗고 해탈을 바라는 게송시법이랄까. 그러나 현실 묘사는 아픔이 묻어난다. 이렇게 가다 시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걱정이 앞선다. 벽을 향해 돌아누운 낯선 등, 바람이 다 빠진 팽팽하던 시간, 상처내지 않고는 숨을 쉴 수 없게 뜨거웠던 가슴…, 독자의 정서에 공명되는 회한들이다. 아침상을 보다가 그만 눈물이 나는 그 순간까지 밀고 나가는 뚝심이 부러울 정도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눈물에서 깨달음이 돋는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눈물만큼 인간적인 것도 없다. 그래서 냉혈인을 “피도 눈물도 없는 x”이라 했던가. 아이의 뒤척임도 전환의 매개물이다. 이렇듯 깨닫고 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법이다. “우리 더는 잃지 말자”는 깨달음과 다짐은 그래서 매우 현실적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설화가 연상되는 시편이다. 점 하나만 찍으면 님이 남이 되는 아슬아슬한 무촌의 관계. 그래서 옛 어른들은 유리 그릇 다루듯 조심하라고 가르친 것 같다.
상중에도 호상이라 싱글벙글 웃고 있던 상주들도 잠이 들어 김빠진 상가 집에 액자 속 망인만 살아 혼자 웃고 있는 저녁,
아아 그 고요 속에 난데없이 와글와글 천의 청개구리 떼 애고 애고 우는 소리
뒹구는 술병 몇몇도
총궐기 해
우는 소리
-이종문, 「문상」(《시조세계》 2012 여름호)
이종문의 시법은 판에 박힌 행갈이와 내용의 엄숙주의에 빠져 있는 시인들에게 새로운 시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 통쾌함마저 선사하는 이종문 시조의 마법은 특유의 상상력과 해학으로 무장한 재미에 있다. 장군 멍군하는 3·4조의 보법 뒤에 드리우는 웃음의 미학은 긴장을 일순 무장 해제시킨다. 지극히 교훈적인 주제임에도 가르치려하지 않는 천진한 능청 앞에서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된다.
문상은 자못 엄숙하고 경건한 의식이다. 그런데 이 공간이 한순간 “싱글벙글”과 “와글와글”하는 난장으로 바뀐다. 장례의식 중에서 문상은 삶의 한 행위로서의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에 세태를 빗대는 이종문의 해학과 풍자가 이입한다. 사람이 돌아간 슬픈 순간임에도 ‘호상’이라는 규정 속에 ‘싱글벙글’이라는 어휘가 배치되고 그러니 “김빠진 상가집”이란 웃지 못 할 표현도 가능해진다. 호상이라며 상주들이 일찌감치 잠에 든 영안실에 망인만 혼자 살아 웃고 있다는 이 낯익은 장면의 설정 또한 많은 여운을 거느린다. 그런 웃지 못 할 장면 속에서 갑자기 애고애고 하는 청개구리 떼가 등장해 대신 울어주고 문상객들이 마시고 간 빈 술병들이 입을 벌리고 우우 따라 운다는 종장의 진술은 이 시를 가벼움에서 건져 올린다. 상주 대신 술병이 울어주는 문상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권갑하 / 1958년 문경 출생. 1992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박사과정 수료. 시집『세한의 저녁』『외등의 시간』 등 4권과 평론집 『현대시조 진단과 모색』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한국시조작품상, 한국문협작가상 등 수상. 계간 《나래시조》회장 겸 편집주간. 농민신문사 출판국장.
첫댓글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현대시조 현대적 음악에 동감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