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원래 정장공은 주환왕에 대한 위협용으로 중군 진문을 열고 군사를 내보냈다.
주환왕(周桓王)이 이끄는 군대를 직접적으로 공격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 다시는 정나라를 우습게 여기지 않도록 하라.
이런 뜻에서 중군 장수 축담과 원번에게 명을 내렸다.
그런데 축담이 그 뜻을 잘못 알아 들었다.
진문을 나선 축담은 오로지 주환왕(周桓王)이 탄 수개 수레만 바라보고 병차를 몰았다.
그의 마음속은 주환왕을 사로잡겠다는 공명심으로 가득 찼다.
그는 나는 듯이 주환왕의 수레를 뒤쫓았다.
이윽고 활을 쏠 수 있는 사정거리까지 육박했다.
활을 꺼내 화살을 걸었다.
시위를 만월처럼 당겼다.
'이번 수갈 전투의 제일 공훈자는 바로 나다!‘
축담은 시위를 놓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주환왕(周桓王)이 타고 있는 수개 수레에 가서 꽂혔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수레를 덮고 있는 비단 덮개를 뚫고 주환왕의 왼쪽 어깨에 가서 꽂혔다.
속에 갑옷을 받쳐입은 덕분에 깊이 박히진 않았으나 통증은 극심했다.
"아악!“
주환왕(周桓王)의 입에서는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러한 모습을 왕사군 쪽에서는 괵공 임보가 보았고,
정나라쪽에서는 정장공(鄭莊公)이 보았다.
"앗!"
"아!“
각기 다른 의미의 외침소리가 터져 나왔다.
괵공 임보는 주환왕(周桓王)이 위급한 상황에 빠진 것을 알고 왕을 구하기 위해 병차를 돌렸다.
망루위에 있던 정장공(鄭莊公)은 얼른 징채를 들고 징을 쳐댔다.
징소리는 후퇴신호이다.
활을 쏘아 주환왕(周桓王)을 맞춘 축담은 그 여세를 몰아 주환왕을 사로잡으려다가 징소리를 들었다.
축담은 아쉬었으나 군령은 엄중하다.
병차를 돌려 영채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환왕(周桓王)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 여간 아쉽지가 않았다.
"신(臣)이 왕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바야흐로 큰 공을 세우려 하는데,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징을 쳐서 군사를 거두신 것입니까?"
영채로 돌아온 축담은 불만부터 터뜨렸다.
주환왕(周桓王)에게 큰 변이 생기지 않았고,
또한 싸움에서 크게 이긴 터라 정장공은 굳이 축담을 야단칠 마음은 없었다.
다만 빙그레 웃음지으며 군사를 거둔 자신의 의도를 밝혀 주었을 뿐이었다.
"본시 천자가 밝지 못하여 천하 제후들의 원망을 자주 사기에
우리 정나라도 어쩔 수 없이 병차를 모아 싸운 것이다.
이기려기 보다는 지지 않으려고 한 싸움일 뿐이었다.
다행히 여러 장수의 힘을 빌려 별탈은 없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만일 그대 말처럼 주환왕(周桓王)을 사로잡아왔다면
나는 다시는 주왕실과 세상사람들을 대할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그대가 열심히 싸웠지만, 천자를 향해 활을 쏜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었다.
만일 왕이 중상을 입어 운명했더라면 나는 천자를 죽였다는 누명을 영원토록 면치 못할 뻔 했다."
정장공의 이같은 말에 축담은 시무룩하니 입을 다물었다.
주환왕(周桓王)은 천자이기도 했지만 총사령관이기도 했다.
전투에서 적의 총사령관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정장공(鄭莊公)은 주환왕을 활로 쏘아 맞힌 축담을 칭찬하기는커녕
핀잔만 주고 있으니 섭섭한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은 곧 여러 장수들 사이에서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 제일 공훈자는 축담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장수가 있는가 하면,
- 축담이 활을 쏨으로 해서 주공의 입지가 곤란해졌다.
라고 말하는 장수들도 여럿 있었다.
의견은 반반으로 갈렸다.
별일이 아닌 듯하지만 어떻게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앞으로 정장공(鄭莊公)의 처신방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럴 때 모든 장수들 앞에 나서서 명쾌한 언변으로 논란을 가라앉힌 사람이 있었다.
정나라 제일의 모신 제족(祭足)이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금은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권위와 명분만으로 여러 제후를 제압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부터는 힘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환왕(周桓王)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옛날의 권위만 가지고 우리 정나라를 치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왕사군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오로지 힘입니다.
오늘의 패배로 이제 주환왕(周桓王)도 우리 정나라의 힘과 위세가 어느 정도인가를 정확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시는 우리 정나라를 치려는 마음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고 하여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닙니다.
천자(天子)는 천자이고 제후는 제후일 뿐입니다.
아직은 그런 시대입니다.
이런 면에서 제후군의 장수가 천자를 향해 활을 쏘았다는 것은 비난의 소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우리 정(鄭)나라는 강합니다.
강한 자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상대의 체면을 살려줄 줄 아는 것이 진정한 강함입니다.
우리는 주환왕(周桓王)에게 사자를 보내 문안을 아뢰고 충성의 뜻을 밝혀야 합니다.
또한 왕의 어깨를 쏜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해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정나라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제족(祭足)의 웅변은 폭포수와도 같았다.
힘차고 강하고 도도했다.
정확히 시대를 꿰뚫고 있는 안목이었다.
뭇 장수들은 제족(祭足)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장공(鄭莊公) 역시 머리를 끄덕거렸다.
"제족의 말이 옳다.
우리 정나라는 그 어느 제후국보다도 천자를 천자로 예우해야 한다."
그는 그 날 저녁 제족(祭足)을 시켜 소 열두 마리와 염소 한 쌍, 양곡 1백 수레를 주환왕(周桓王)의 진영으로 보냈다.
아울러 활을 쏘아 어깨를 맞힌 것을 정중히 사죄했다.
이에 주환왕(周桓王)은 괵공 임보를 시켜 정장공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보내 온 물건을 모두 받은 후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그는 죽을 때까지 정나라에 관해 일체 입을 열지 않았으니,
후세의 사관들은 주환왕(周桓王)의 경솔함과 정장공에게 당한 치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評)하고 있다.
모름지기 귀한 구슬로 새를 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어찌 천자(天子)가 친히 싸움터에 나갔던고.
사방에 격문을 보내고 벼슬까지 빼앗았으나,
정나라는 오히려 천자(天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