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녘에선 벼를 나락이라 부르기도 한다. 몸, 이, 등, 팔, 발, 손, 배, 눈, 귀, 코, 목, 뼈, 혀, 위, 간, 폐와 같이 한 글자로 된 말이 몸에 많이 붙었다. 언어 생성기의 단음절이었을 것이다. 밀, 콩, 조, 팥, 쌀, 벼의 곡식 이름도 하나이다가 다리, 머리, 쓸개, 감자, 귀리, 수수, 나락과 같이 점점 음절수가 늘어났다.
여기서 나온 쌀로 지은 뽀얀 밥이 그리 맛있다. 밀, 보리, 조, 기장, 콩, 옥수수, 감자, 도토리 밥보다 낫다. 깨끗하고 맛좋은 입쌀로 지은 이밥은 퍼석한 잡곡밥과 달리 찐득하고 고소한 단맛이 감도는 게 감칠맛이 나 먹어도 먹어도 질리질 않는다. 이 멥쌀과 찹쌀이 우리 민족에게 한없는 희망이었다.
배고플 때 간절히 생각나는 쌀밥은 어려울 때 잡곡밥에 시달린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기대였다. 명절이나 제사 때 얻어먹던 밥이었다. 보리나 좁쌀 밥에 감자가 들앉아 한 그릇 채워졌다. 어른들은 보리밥에 쌀알이 조금 들어가는데 다들 꽁보리나 조밥을 먹는다. 밀 보리가 익고 감자가 나는 봄과 조나 옥수수 나는 가을에는 햅쌀도 나지만 우리에겐 껄끄러운 음식이 끼니였다.
봄과 겨울에 양식이 잘 떨어지는데 대가족이 파 먹다보면 이리 모자란다. 산나물을 캐 먹거나 도토리를 주워 먹는다. 다 한 때다. 도토리는 빨리 거두어야지 늦으면 다람쥐가 가져가고 눈이 오면 덮어버린다. 명이인 산마늘, 우산나물, 수리취, 배배추, 곰취, 드릅 등 초목의 잎은 거의 먹지만 산중턱 위 참나무 숲에 향긋한 빈대냄새가 풍기는 참나물이 제일 맛있다. 양이 적어 날 것으로 된장에 찍어 그냥 허기진 배를 채운다.
도토리는 떫은맛을 없애려 물에 넣어 우려내 가루를 쪄서 먹는데 목마르고 텁텁하다. 당원을 넣어야 아이들도 먹기가 좀 낫다. 여유가 있으면 묵을 써 먹기도 한다. 먹다 남은 것을 개에게 주면 먹지 않아 개밥에 도토리라 한다. 늘씬하게 얻어맞거나 깨지는 것을 묵사발이라고도 한다.
구황식물로 송구와 칡도 있는데 소나무가 많이 휘어진 것은 봄날 물오른 가운데 햇순을 잘라 먹었기 때문이다. 긁어 송구떡도 해 먹었다. 힘든 것은 암 칡뿌리를 캐 짜 흰 가루를 내어 먹는 일이다. 국수도 해 먹는데 가족이 다 먹자면 양이 많아야 함으로 만만치 않다. 곧게 울퉁불퉁 뿌리를 내려 파내자면 엄청 힘들다. 장만하는 일도 되게 번거롭다.
이러니 보리밥이 어떻고 조밥이니 감자니 타박할 수 없다. 여기에 벼 나락에서 나온 반투명한 쌀로 지은 하얀 밥은 말해 뭣하나. 우리의 기를 다 죽이는 천상의 음식이다. 요즘은 귀하지 않아 너나없이 먹는 행복한 시절이다. 아이들이 강구연월 태평세월을 구가했던 요순시절이 좋다하지만 이즈음만 했을까.
더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데 다 배고픈 시절의 얘기다. 쌀도 맛있는 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어서 골라 먹는다. 말 타면 종 거느리고 싶다고 값도 들쭉날쭉하다. 비싼 맛좋은 도정을 찾게 된다. 우리가 먹는 것은 일본형(자포니카)으로 끈기가 있다. 안남미인 인도(인디카)와 열대 나락인 인도네시아 자바섬(자바니카)의 미질은 풀기가 적다. 풀어져서 젓가락질을 하기가 어렵다. 근기가 없고 식으면 맛도 덜 하다.
오래 먹어 우리 몸에 익숙한 곱슬곱슬 복슬복슬 쫀득한 맛이다. 오대미와 이천미, 청주미, 수원과 밀양, 산청, 봉하, 해남, 옥천, 강진, 상주, 괴산, 김해 등지의 쌀을 좋아했다. 임금표와 메뚜기, 유기농, 우렁이, 오리, 한눈에 반한 쌀 등 브랜드도 다양하다. 자잘하고 맛좋은 일본 아끼바리와 고시히카리, 만주나락을 심다가 개량한 유신, 밀양, 만석, 조생, 새누리, 신동진, 호품, 온누리, 남평, 일품, 새일미가 있고 안남미 교배종인 통일 품종 쌀이 있다. 기계화 대량생산으로 저렴한 미국산 칼로스도 선호한다.
쌀은 전분으로 대부분 탄수화물이다. 방앗간 도정에서 백미와 현미, 발아현미, 쌀눈을 두고 쌀겨인 미강을 떼낸 쌀눈 쌀을 만든다. 요즘에는 한창 쌀눈에 많이 들어있다는 가바라는 성분이 주목받고 있다. 무엇보다 이려먹던 쌀을 석발기가 생겨 돌 없는 밥을 먹으니 참 좋다. 분도는 현미인 5분도와 7분도, 일반미인 백미 10분도 이상이다.
안남미 생산이 대다수이고 자포니카 차진 쌀은 1할 정도이다. 일본과 우리나라, 중국 북부 사람 일부가 고작이다.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가 인디카인 안남미 쌀 수출국이다. 3모작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도 캘리포니아에서 일본형과 인도형을 재배해 각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보릿고개를 넘기려고 고심 끝에 서울농대 교수들이 통일벼를 만들어냈다. 인디카와 자포니카 원연교감 품종이다. 인디카에 가까운 안남미로 소출이 많아 기적의 벼로 불렸다. 풀기가 적고 맛없어 우리 입에 맞지 않자 점차 사라져갔다. 50원 동전에 그림으로만 남아있다. 밭에서 재배하는 육도 나락도 있었는데 역시 맛이 딸려 밀려났다.
처음 나락 재배는 8천 년 전 양자강 유역이라 한다. 우리나라에는 2천 년 전쯤 들어온 걸로 본다. 무논에 재배한 수도는 수확 때까지 많은 손이 가는 나락 농사이다. 팔십여 회(米)나 돌봐야 거둘 수 있다. 논바닥에 엎드려 살아야 한다. 볏짚은 초가지붕을 잇거나 소 사료로 쓰고 겨는 베개와 땔감으로 쓴다. 속껍질을 벗긴 등겨는 동물 사료로 사용하다가 근래에는 건강식으로도 먹는데 말이 많아 주춤하다.
씨 뿌려 백일이면 수확함으로 동남아에는 연작을 한다. 우리처럼 못자리와 이앙으로 하지 않고 그냥 씨 뿌려 물댄 뒤 크면 끝만 잘라 수확한다. 마르면 논바닥에 불 놓아 잿거름을 그대로 갈아엎어 물대고 또 씨 뿌린다. 예전엔 풀을 베 넣어 썩혀 거름으로 했지만 비료가 생기면서 퇴비를 대신하고 있다.
기생하는 병충도 많아 달려들면 소출이 줄어든다. 조선조 때 적은 인구인데도 해마다 흉년이어서 가난했던 것은 병충해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료와 퇴비, 농약을 개발하고 영농기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근래 전쟁이 없고 수재 화재 전염병이 줄어들었으며 벼 병충해를 잘 막아 지난날과는 달리 해마다 풍년이다.
모심기한 무논에 산 그림자 어리는 게 보기 좋고, 가을 나락 익는 연둣빛이 어쩌면 그리 곱게도 아름다울까. 석양이 깃들면 넋을 잃고 바라본다. 얼마나 이밥이 그리웠으면 이팝나무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