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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exegesis , 註釋) ***
* 요약
성서해석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교리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여겨져 왔다. 성서의 비역사적인 글들은 거룩한 역사에 대한 비평적 해석이며, 다른 모든 성서주석의 기초를 형성한다. 본문비평은 초기의 여러 자료를 비평적으로 대조하여 가능한 한 성서의 원전을 확정한다. 문학비평은 성서본문을 문학 장르에 따라 분류한다. 전승비평은 성서 자료의 다양한 출처를 분석하여 구전전승을 찾아내고 그것의 점진적인 발달과정을 추적한다. 편집비평은 전승의 여러 단편들이 저자나 편집자에 의해 최종적인 문학작품으로 배열된 방식을 탐구한다. 역사비평은 성서 문헌들을 역사적 맥락 속에 놓고 그것을 동시대 문헌들에 비추어 검토한다. 종교사 비평은 성서 본문에 표현된 종교적 신앙과 관습을 세계 종교 일반에서 나타나는 경향과 비교한다.
* 내용
역사적으로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는 다양한 주석방법을 사용해왔으며, 교리적·논쟁적인 의도로 해석의 결과가 영향을 받을 때가 많았다.
주석의 전제와 적용 기술에 따라 주어진 본문이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한다. 이런 방법론적 원리들에 대한 연구가 곧 해석학(hermeneutics)이다. 성서해석은 항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교리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여겨져왔다. 그것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성서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거룩한 역사'에 근거한다고 자처하기 때문이다. 성서의 다른 부분, 즉 예언·시·잠언·지혜서·서신 등은 주로 이 거룩한 역사에 대한 성찰일 뿐만 아니라, 이 역사로부터 성장한 종교 공동체들에 대해 거룩한 역사가 갖는 의미를 성찰한 것이기도 하다.
성서의 비역사적인 글들은 어느 정도는 거룩한 역사에 대한 비평적 해석이며, 대개 이 글들이 다른 모든 성서주석의 기초를 형성한다.
*** 해석학(hermeneutics , 解釋學) *** 1. 요약 삶 또는 인간정신의 파악방법인 이해에 관계되는 철학 이론. 2. 성서해석학 1) 개요 2) 문자적 해석 3) 도덕적 해석 4) 우의적 해석 5) 신비적 해석 6) 현대철학에서의 해석학 *** 성서 해석학 *** 1) 개요 성서 해석의 일반적인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역사를 통해 볼 때 유대교도와 그리스도교도가 해석학과 해석에 사용한 성서주석 방법의 일차적인 목적은 성서의 진실과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성서가 신성한 책이라는 것은 그것이 신의 계시를 기록한 것이라는 확신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처럼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해함으로써 성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 하나의 일치된 해석학적 원리를 가질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명료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성서에 대한 해석은 항상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메시지와 진실은 심오한 것이기 때문에 성서의 말씀은 항상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성서에서 일부는 문자적으로, 일부는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성서 해석의 역사에서 4가지 유형의 해석학이 등장했는데, 문자적 해석, 도덕적 해석, 우의적 해석, 신비적 해석이 그것이다. 2) 문자적 해석 성서 본문을 문법적 구조와 역사적 상황에 의해 전달되는 '순수한 의미'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자가 갖는 뜻은 바로 저자가 의도하는 바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해석학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종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각각의 문자는 신이 선택한 것이므로 성서의 용어는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믿음과 관련이 있다. 이같은 견해의 극단적인 형태는 다양한 성서 저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문체와 단어의 뚜렷한 개성에 대해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비판받아왔다. 4세기 영향력 있는 성서학자인 히에로니무스(제롬)는 그가 지나친 우의적 해석이라고 간주한 것에 반대하면서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옹호했다. 문자적 의미의 우수성은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 리라의 니콜라스, 존 콜릿, 마르틴 루터, 장 칼뱅과 같은 다양한 인물들에 의해 옹호되었다. 3) 도덕적 해석 성서의 여러 부분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윤리적 교훈에 의해 성서 해석의 원리를 설정하려는 것으로, 종종 우의적 해석과 연관되어 사용된다. 예를 들어 〈바르나바의 서신〉(100경)은 〈레위기〉에 나오는 음식에 관한 율법을 어떤 동물의 살을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동물과 관련해 상상할 수 있는 악을 멀리하라는 것으로 해석한다. 4) 우의적 해석 성서의 이야기들이 본문에 분명히 언급된 사람·사물·사건의 이면에 2차적인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우의적 해석의 특별한 형태가 대표론적인 해석방법이다. 대표론적인 해석방법에 따르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주요인물들, 중요한 사건들, 중요한 관습들을 '예표들', 즉 〈신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사건·대상 들의 전조로 본다. 이 이론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는 처음부터 하느님이 의도한 그리스도교 교회의 '예표'로 해석된다. 유대교 철학자인 필론은 유대교 성서를 해석하는 데 플라톤 철학 및 스토아 철학의 범주를 사용했다. 그의 일반적인 방법들은 성서본문의 우의적 의미를 찾은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도 클레멘스에 의해 채택되었다. 클레멘스는 성서의 교훈 및 평범하게 들리는 이야기에서 깊은 철학적 진실을 발견했다. 그의 후계자인 오리게네스는 이같은 해석학적 원리들을 체계화했다. 오리게네스는 문자적 의미, 도덕적 의미, 영적 의미로 구분하면서 영적 의미(즉 우의적 의미)를 최고의 것으로 인정했다. 중세에 와서 오리게네스의 3가지 의미는 영적 의미를 우의적 의미와 신비적 의미로 세분함으로써 4개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5) 신비적 해석 이 해석 방법은 성서의 사건들을 앞으로 올 세상과 관계되거나 예시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성서에 대한 이런 접근 방법은 히브리 문자와 용어의 수값(數値)에 대한 신비적 의미를 알아내려고 한 유대교 카발라에 의해 행해졌다. 유대교에서 그런 신비적 해석을 한 중요한 예가 <조하르 Zohar>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마리아론과 관련된 해석의 대부분이 신비적 해석에 속한다. 다른 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현대에서도 성서 해석학의 조류는 폭넓은 학문적·철학적 경향을 반영한다. 20세기에는 역사비평적·실존적·구조적 해석이 지배적으로 나타났다. 일부 그룹은 비학문적인 수준에서 성서의 자료들을 현재의 사건들과 관련해 예언적이고 묵시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6) 현대철학에서의 해석학 철학에서의 해석학은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를 통해서 인문과학의 방법문제와 관련해서 새로운 철학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에 있어서 해석학은 우선 해석법으로서 성서나 기타 고전들의 가장 정당한 이해를 위한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간의 이해(das Verstehen) 자체를 문제삼았다. 그는 처음으로 이해 자체의 현상을 주목하고 이해의 보편법칙을 파악하려고 했으며, 이해의 과정을 의식적으로 직접 구체적인 언어와 결합시켰다. 그에 의하면 "해석학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다만 언어이고 가장 먼저 발견되어야 할 것도 언어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해석학의 과제는 언어의 과제였다. 슐라이어마허의 뒤를 이은 딜타이는 우선 이해라는 개념을 인문과학의 방법적인 특수성을 논하면서 사용했다. 즉 "자연은 설명하고 정신생활은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연과학과 구별되는 인문과학의 방법론으로 해석학을 생각했지만 삶에 대한 철학적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인간의 삶 자체가 해석학적이며 이해한다는 것이 인간의 삶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학자가 성서를 해석하듯이 철학자는 역사적으로 주어진 삶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딜타이의 사상을 이어받은 하이데거는 이해를 존재론적 문제로 다루면서 인간존재의 실존적 구성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시한 이해의 순환구조의 존재론적 분석을 기초로 H. 가다머는 그의 주저 〈진리와 방법 Wahrheit und Methode〉(1960)에서 인식의 지평성, 이해의 역사성을 제시하고 근대적 방법지(方法知)의 진리 개념을 비판했다.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 * 출생 : 1900년 * 사망 : 2002년 * 국적 : 독일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 체계는 부분적으로 빌헬름 딜타이, 에트문트 후설, 마르틴 하이데거의 개념에서 나왔으며, 20세기 철학·미학·신학·비평 등에 영향을 끼쳤다. 화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브레슬라우·마르부르크·프라이부르크·뮌헨 대학에서 인문과학을 공부하고 1922년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하이데거의 지도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3년 마르부르크대학, 1934~35년 킬대학에서 미학과 윤리학을 강의한 뒤, 다시 마르부르크에서 강의하다가 1937년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2년 뒤 라이프치히대학 정교수로 취임했다. 그뒤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1947~49)과 하이델베르크대학(1949 이후)에서 가르쳤으며, 1968년 명예교수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저서인 〈진리와 방법〉(1960)은 해석학 이론에 관한 20세기 최고 철학서로 꼽히기도 한다. 다른 저서로는 〈논문집〉(1967), 플라톤에 관한 8편의 논문을 담은 〈대화와 변증법〉(1980), 독일어판에서 뽑은 논문을 모아 영역한 〈과학시대의 이성〉(1982) 등이 있다. | 폴 리쾨르Paul Ricoeur * 출생 : 1913년 * 사망 : 2005년 * 국적 : 프랑스 프랑스의 현상학 철학자·역사학자. 20세기 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생존하였을 때에는 자크 데리다, 위르겐 하버마스와 함께 살아있는 철학의 3대 거장으로 꼽혔다. 독일군의 포로로 수용소 생활을 하는 동안 독일 철학에 눈을 떴고, 이후 현상학을 기반으로 폭 넓은 철학적 모색에 나서면서, 당대의 주류였던 구조주의에 대항했다. 스트라스부르그 대학, 파리 대학, 낭테르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고, 미국의 시카고 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강의했다. |
성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히브리 성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이 성서에 〈신약성서〉(〈히브리 성서〉의 〈구약성서〉와 대조됨)를 추가했다.
대부분의 〈신약성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예수 경험에 비추어 〈히브리 성서〉를 해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일부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들의 성서에 외경(Apocrypha:'감추어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을 포함시켰다. 외경은 〈히브리 성서〉에서는 제외되었지만, BC 2세기경에 편찬된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Septuagint)에는 수록된 책들이나 그 일부를 말한다. 70인역은 히브리어 원전(예를 들면 〈집회서〉·〈토비트〉)을 번역한 것과 원래 그리스어로 쓰인 책들(예를 들면 〈솔로몬의 지혜서〉)을 포함하고 있다.
이 책들은 70인역이 초기 교회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번역본이었기 때문에 교리적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 70인역(Septuagint , 七十人譯) (고대 그리스어: Ἡ μετάφρασις τῶν Ἑβδομήκοντα, 라틴어: septuaginta, '70'을 의미, LXX) *** ( 요약 )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의 번역본으로 히브리어 성서 원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70인’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뽑은 72명의 번역자들이 각각 독방에 들어가 <구약성서>를 번역했는데, 그들의 번역이 모두 동일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사실 토라(율법서)와 후대의 번역본은 문체와 용례가 많이 다르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사용한 언어는 주로 그리스어였으며,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성취했다는 예언들을 70인역 본문에서 인용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성서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70인역 사용을 중단했다. 히브리 정경은 토라·느비임(예언서)·케투빔(성문서)의 3부분으로 나뉘는 데 비해, 70인역은 율법서·역사서·시가서·예언서의 4부분으로 나뉘며 외경들도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 번역본이다. 히브리어 성서 원문을 번역한 것으로 그리스어가 국제 공용어일 때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들이 사용하도록 제작한 것 같다. 언어분석 결과 토라, 즉 모세 5경(처음 5권)은 BC 3세기 중반에, 나머지 부분은 BC 2세기에 번역되었다고 한다. '70'을 뜻하는 라틴어 septuaginta에서 유래한 '70인'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뽑은 72명의 번역자들이 각각 독방에 들어가 〈구약성서〉 전체를 번역했는데, 그들의 번역이 모두 동일했다는 후대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사실 토라(율법서)와 후대의 번역본은 문체와 용례가 많이 다르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엘레아자르가 문학의 후원자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BC 285~246)의 요청으로 번역자들을 알렉산드리아로 보냈다는 전승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처음 보이는데 별로 신빙성이 없는 자료이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사용한 언어는 주로 그리스어였으며,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성취했다는 예언들을 70인역 본문에서 인용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성서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70인역 사용을 중단했다. 3세기에 오리게네스는 70인역에 끼어든 필사자의 오류들을 바로잡으려고 시도했는데, 당시 사본에 따라 여러 가지 많은 오류가 있었다. 다른 학자들도 70인역을 좀더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히브리어 본문을 참조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대한 고대 라틴어역·콥트어역·에티오피아어역·아르메니아어역·조지아어역·슬라브어역, 그리고 아랍어역 일부의 주요근거가 된 것은 히브리어 성서가 아니라 바로 70인역이었다. 그리스 정교회는 70인역을 〈구약성서〉 표준역본으로 인정해왔으며, 예로니모는 이 역본을 가지고 불가타 〈구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권에서 보존한 70인역은 히브리 정경의 모든 책 외에 소(小)예언서들과 몇몇 책들을 구분했으며, 개신교도들과 유대인들에게는 외경으로,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는 제2정경으로 알려진 부수적인 책들을 덧붙였다. 히브리 정경은 토라·느비임(예언서)·케투빔(성문서)의 3부분으로 나뉘는 데 비해, 70인역은 율법서·역사서·시가서·예언서의 4부분으로 나뉘며 외경들도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오늘날 서방세계 대부분의 성서 역본들은 계속 이런 식으로 구분되었으나 개신교 역본들의 경우에만 외경을 빼거나 따로 묶는다. 70인역의 본문은 몇몇 초기의 사본들에 실려 있지만, 그 사본들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이 가운데 잘 알려진 사본들은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바티칸 사본'(B)과 '시나이 사본'(S), 그리고 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사본'(A)이다. 그밖에도 이전에 제작된 수많은 파피루스 단편들과 후대의 많은 사본들이 있다. 최초의 70인역 인쇄본은 '콤플루툼 학파 대역성서(對譯聖書)'(1514~22)에 실려 있다. | 70인역(七十人譯) 조각 |
성서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가 신성한 언어로 취급되는 경우가 있고, 본문이 전하는 역사가 '통상적인' 역사와 다소 상이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있지만, 근대에 채용된 대부분의 성서주석 형식들은 여러 다른 문학작품에도 적용 가능한 것들이다. 본문비평은 이용 가능한 초기의 여러 자료를 비평적으로 대조하여 가능한 한 성서의 원전(原典)을 확정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히브리 성서〉의 경우 이러한 자료들은 9세기 이래의 히브리어 사본들과 BC 5~AD 2세기에 작성된 사해 쿰란 공동체에서 나온 히브리어 사본들이다. 다른 자료들로는 히브리어 원문의 그리스어 번역본 〈70인역〉, 라틴어 번역본(불가타), 시리아어 번역본(페시타)이 있다. 2~15세기에 작성된 그리스어 사본들과 시리아어·콥트어·아르메니아어·조지아어·에티오피아어 등의 고대 번역본들과 초기 그리스도교 작가들의 인용문들이 있다.
이런 사본들은 대개 단일 전승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사본군(群)으로 나누어진다.
*** 구약성서의 초기 역본 (목차) 1. 아람어 타르굼 2. 70인역성서 3. 아퀼라역본 4. 테오도티온의 개정본 5. 심마쿠스의 역본 6.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 7. 70인역 성서 사본들과 인쇄본 사본 8. 콥트어 역본들 9. 아르메니아어 역본 10. 조지아어 역본 11. 에티오피아어 역본 12. 고트어 역본 13. 고대 라틴어 역본 14. 불가타 역본 15. 시리아어 역본 16. 아랍어 역본들 1. 아람어 타르굼 BC 5, 6세기경부터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아람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고, 팔레스타인 유대 사회와 디아스포라(여러 나라로 흩어진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아람어를 쓰게 되자, 유대인 회당에서는 예배 때 통역자(메투르게만)가 등장하여 예배 때 낭독되는 율법서와 예언서 관련 본문 등을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통역했다. 처음에는 구두로 통역되고 전승되던 것이 후대에 이르러 통역 내용이 일정한 형식으로 굳어졌고 드디어 기록으로 정착되었다. 율법서 타르굼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온켈로스의 타르굼으로 알려진 바빌로니아 타르굼(Babylonian Targum)이다. 이것은 본래 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거기에서 개정되고 크게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9세기 직후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 다른 여러 종류의 타르굼들을 제치고 독자적 위치를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문자적인 번역이면서도 랍비들의 주석을 번역에 반영시키고 있다. 팔레스타인 타르굼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요나단의 타르굼이다. 요나단은 14세기경부터 생긴 이름으로서 예루살렘 타르굼(Targum Jerusalem)을 뜻하는 히브리어 약자 'TJ'를 요나단의 타르굼(Targum Jonathan)으로 잘못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위요나단 타르굼). 이것은 옛 팔레스타인 타르굼(Old Palestinian Targum)과 온켈로스의 초기 번역을 뒤섞은 것이다. 랍비들의 주석·설교·교훈 등이 번역에 많이 첨가되어 있다. 사마리아 5경을 번역한 타르굼도 있다. 유대인의 타르굼이 문자적인 번역인 데 비해 이것은 좀 자유스러운 번역이다. 본문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적은 없다. 예언서 타르굼도 본래는 팔레스타인에서 나왔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최종적으로 개정되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완성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BC 1세기말에서부터 AD 1세기초까지 활동한 유명한 랍비였던 힐렐의 제자 요나단 벤 우지엘의 번역으로 본다. 이것이 엄격한 문자적 번역은 아니지만 온켈로스에 의존한 증거가 많이 나타난다. 성문서의 아람어 역은 모두 5세기 이후에 나온 것들이다. 2. 70인역성서(LXX)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배경에 관해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언급되어 있다. 이 편지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BC 285~246)가 이집트를 다스릴 때 기록된 편지임을 드러내려고 당시 관리로 있던 아리스테아스라는 그리스 사람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편지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요청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학자들이 와서 히브리어 율법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된 사정을 언급하고 있다. 같은 이야기가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여 필로·요세푸스·〈탈무드〉·교부들의 글에도 나타난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 편지의 저자가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으로서 율법서 번역이 끝난 다음에 이와 같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70인역이란 BC 3세기 중엽에 번역된 구약의 모세5경 곧 율법서 부분을 일컫는다.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모두 그리스어로 번역되기까지는 그후 1세기 이상이 걸렸다고 보고, BC 1세기까지는 번역이 완료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하여 70인역 성서는 한편으로는 유대교를 이방 세계에 알리는 통로가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70인역을 자기들의 성서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유대교에서는 70인역을 버리고 자기들의 히브리어 본문성서를 다듬는 일에 더 열성을 보였다. 제2성전 파괴 이후 새로운 히브리어 본문이 편집되면서, 히브리어 본문과 70인역 사이의 차이점들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게 되자, 그리스어로 〈구약성서〉를 읽던 사람들 쪽에서 최신 히브리어 본문을 대본으로 하는 새로운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3. 아퀼라역본 아퀼라는 소아시아의 폰투스 출신으로 유대교인이 된 사람으로서, 랍비 아키바의 지도를 받으면서 130년경에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는데, 극도로 직역을 했다. 전체 역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인용된 부분들과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Hexapla : 6개 언어 대조성서)에 그 단편이 남아 있고, 카이로의 고본 서고에서 나온 재활용 양피지(palimpsests : 한 번 쓴 양피지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에 단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4. 테오도티온의 개정본 그리스어 번역본의 2차 교정이 70인역을 개정한 것인지, 아니면 70인역 외에 다른 그리스어 역을 개정한 것인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2세기 후반에 테오도티온이라는 사람이 개정했다. 히브리어 음역의 빈도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5. 심마쿠스의 역본 2세기말 심마쿠스가 번역했다. 번역자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번역은 우수하지만 영향력은 미미했다. 예로니모가 그의 불가타 역에서 심마쿠스의 번역을 활용하긴 했으나, 오늘날 그의 번역은 '헥사플라'를 통하여 단편만이 알려져 있다. 6.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 여러 가지 상이한 번역판을 갖게 된 3세기에 이르러서 성서 본문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함으로써 혼란이 생겼다. 230~240년경에 카이사리아에서 활동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헥사플라'를 편집했다. 히브리어 본문, 히브리어 본문의 그리스어 음역, 아퀼라 역, 심마쿠스 역, 70인역, 테오도티온의 개정본을 평행으로 편집하여 비교해볼 수 있게 했다. 오리게네스의 주요관심은 70인역이었다. 그는 70인역 본문을 히브리어 본문과 비교하여,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데 70인역에만 있는 첨가된 본문에는 의구표(疑句標)를 했고, 히브리어 본문에는 있는데 70인역에 그 본문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곳에는 다른 그리스어 번역에서 그 부분을 가져와서 70인역에 삽입시키고 앞뒤에 의구표를 붙여 놓았다. 의구표란 고사본의 의심스러운 본문이나 재생시킨 본문을 표시하던 단검표(+), 마이너스표(-), 나누기표(÷), 별표(*) 등을 일컫는다. 헥사플라의 원본은 600년경까지는 존속되었던 것 같으나, 오늘날에는 단편만 남아 있다. 7. 70인역 성서 사본들과 인쇄본 사본편의상 파피루스 사본, 대문자 사본(Capitalletters : Uncials), 필기체 소문자 사본(Cursive script : Minuscules)으로 나뉜다. 파피루스 사본의 수는 수백 개에 이르고, 크기는 다양하며, 70인역이 형성되던 초기에서 7세기 중엽의 것까지 있다. 특히 이집트에서 발견된 〈신명기〉 파피루스는 기원전의 것이다. 파피루스에 씌어진 것이 아니고 양피지나 가죽에 씌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쿰란에서 발견된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단편 조각 사본들, 그리고 나할 레베르에서 발견된 그리스도교 형성 초기시대의 두루마리 사본도 중요한 고대 사본들이다. 가장 중요한 파피루스 사본은 구약에 속하는 9권의 단편들을 보여주고 있는 11개의 코덱스로 되어 있는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이다. 이 사본이 만들어진 것은 2~4세기경이다. 그후 300여 년 동안 파피루스 본문들이 급증했고 현재 200여 개의 사본들이 남아 있다. 대문자 사본들은 4~10세기에 나온 것들로서 모두 코덱스(책 모양)로 되어 있다. 괄목할 만한 것들로는 4세기의 바티카누스 사본(Codex Vaticanus : 〈구약성서〉 전체), 4세기의 시나이티쿠스 사본(Codex Sinaiticus : 〈구약성서〉 일부),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누스 사본(Codex Alexandrianus)이다. 이 셋은 본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다 포함한 것들이었다. 이밖에도 성서의 일부만 보여주고 있는 사본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예언서를 보여주고 있는 6세기의 마르칼리아누스 사본(Codex Marchalianus)은 값진 것이다. 필기체 소문자 사본은 9세기 이후부터 나타난다. 11~16세기에 1,500여 개의 사본들이 발견되었으나 그들은 모두 같은 본문을 반영하는 사본들이다. 비록 후대의 것이지만 좋은 본문을 간직한 대문자 사본을 베낀 것일 때에는 가치가 있다. 가장 먼저 인쇄된 70인역은 '콤플루툼 학파 대역 성서'(1514~17)이다. 이것은 1522년에 비로소 유포되었으므로, 1518년에 베네치아에서 나온 알다인판(版)이 실제로는 맨 처음에 나온 인쇄본이라고 할 수 있다. 1587년 로마에서 식스토(교황 식스토 5세) 판이 나왔고, 19, 20세기에 들어서서 여러 가지 비평적 편집본들이 나왔다. 8. 콥트어 역본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어권 밖으로 퍼져가면서 그곳 언어로 성서가 번역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콥트어 성서이다. 3세기말 4세기초에 번역된 것으로 보이며, 번역 대본은 그리스어 성서이다. 부분적으로는 고대 라틴어 역본과 유사성도 보인다. 9. 아르메니아어 역본 5세기초까지 아르메니아 민족 교회는 그동안 문학과 예배 의식에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를 함께 사용해왔으나, 성 메스로프(361~439)가 아르메니아어 알파벳을 만들어 아르메니아 민족 문학의 기반을 닦았는데, 이때 성서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었다. (아르메니아 문학). 첫 번역은(414경) 시리아 역 페시타(Peshitta)를 대본으로 번역했고, 곧 이어서 개정했다.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최종적인 공인 번역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지만 여기에도 페시타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10. 조지아어 역본 아르메니아의 전승에 따르면 조지아어 역본도 메스로프의 번역이었다고 한다(조지아 문학). 그러나 조지아어 〈구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부분인 〈시편〉도 5세기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지는 않는다. 사본들은 그리스어 역본이나 아르메니아 역본에 근거해 있다. 11. 에티오피아어 역본 4, 5세기경에 에티오피아에 그리스도교가 자리잡으면서 성서 번역이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것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되었다(에티오피아 문학).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13세기의 것이다. 14세기 이후의 사본들에는 아랍어 역과 콥트어 역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많은 부분이 히브리어 본문과 일치하고, 70인역 본문과는 큰 차이를 나타낸다. 12. 고트어 역본 고트족은 오늘날 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로 알려진 지방에서 살았다. 4세기 중엽 그리스도교 선교사였던 울필라스가 고트어 알파벳을 발명하여 성서를 번역했다(고딕 문학). 〈구약성서〉 번역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극히 일부 단편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다 없어졌다. 그리스어 역을 대본으로 번역했다. 고트어로 기록한 문헌이라고는 성서 단편적 사본뿐이다. 13. 고대 라틴어 역본 2세기 중엽 라틴어 역 〈구약성서〉가 북아프리카와 갈리아 지방에 유포되고, 3세기 초에는 로마에도 유포된 흔적이 있다(라틴문학). 아프리카의 로마 점령지에 살며 라틴어를 쓰던 유대인들이 번역한 것을 그리스도교에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원본도 히브리어가 아니고 그리스어 역이다. 고대 라틴어 역본은 '라틴어 옷을 입은 70인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70인역과 관계가 깊다. 고대 라틴어 역본에는 오리게네스가 개정하기 이전의 70인역의 상태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본문비평에 있어서 고대 라틴어 역의 비중이 크다. 3세기까지 여러 종류의 라틴어 역들이 유포되고 있었다. 그 번역이 하나의 번역본에서 나온 개정판들인지,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번역된 것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382년경 교황 다마소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정리했다. 14. 불가타 역본 신학적 토론과 전례에서 사용되는 통일된 본문이 필요하게 되자, 다마소가 이 일을 에우세비우스 예로니모에게 맡겼다. 예로니모는 라틴어와 히브리어 실력을 고루 갖춘 그리스도교 성서학자였다. 그는 3종류의 라틴어 〈시편〉 개정판을 낸 바 있다. 첫번째 개정은 70인역에 근거하여 개정되었으므로 '로마 시편'이라고도 한다. 2번째 개정은 팔레스타인에서 펴낸 것인데, 헥사플라 70인역에 입각하여 라틴어 역을 히브리어 원문 쪽에 가깝게 개정했다. 갈리아 지방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으므로 갈리아 시편이라고도 한다. 후에 이 시편이 불가타 역에 그대로 들어간다. 3번째 개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정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번역이다.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된 것이지만 널리 유포되지는 못했다. 이것을 준비하는 동안 예로니모는 고대 라틴어 역을 다만 그리스어 역에 근거하여 개정한다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로니모는 라틴어 성서를 히브리어 원문 성서에서 직접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390년에 시작하여 405년에 끝냈다. 그러나 이미 서방교회에서는 그리스어 70인역이 굳게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예로니모의 라틴어 역은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정착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그의 라틴어 번역이 70인역의 내용과도 달랐고 고대 라틴어 역과도 다른 곳이 많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읽어오던 본문과 다르다고 하여 오히려 라틴어 역의 권위가 도전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노 같은 지도자는 예로니모의 라틴어 역 성서로 인해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가 갈라지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걸렸지만 결국 예로니모의 새 라틴어 역은 우수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8세기에 비로소 그의 번역은 라틴어 불가타가 되어서, 종교개혁 때까지 서방교회의 성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후로도 상당 기간 고대 라틴어 역과 예로니모의 불가타 역을 손으로 베껴서 보급하는 과정에서 번역문에 많은 변화가 가해져 일종의 종합 본문이 되고 말았다. 손으로 베끼는 과정에서 본문의 변화까지 겹치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8, 000여 개의 사본들 사이에 이독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 중세기에 불가타 역 회복을 위한 몇 번의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하다가,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불가타 역을 공인하게 됨에 따라 개정본의 필요성이 더 절실해졌고, 15세기 중엽부터 인쇄술이 발달하자 번역 본문을 정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식스토판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으므로 교황 클레멘스 8세가 1592년에 새 판을 간행했는데, 이것이 로마교회의 공인 불가타가 되었다. 15. 시리아어 역본 시리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시리아 역 성서는 '페시타'(단순한 번역)라고도 알려져 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누가 언제 번역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번역은 본래 1세기경에 번역되었던 것 같고,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아리아베네 지역에 있던 유대인 사회에서 번역하여 사용했던 것 같다(시리아 문학). 페시타는 문체도 다양하고 채택한 번역 방법도 다양하다. 모세5경 부분은 마소라 본문과 아주 가깝지만, 다른 부분은 70인역과 가깝다. 마소라 본문과 가까운 본문은 유대교인들이 번역한 것이고, 70인역과 가까운 본문은 그리스도교 쪽의 개정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5세기 시리아 교회가 네스토리우스파(동시리아)와 야코부스파(서시리아)로 나뉘면서 페시타의 본문사도 2갈래로 갈라진다.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그 교회가 간직하고 있던 사본이 덜 손상되었을 것으로 본다. 6세기초에 마북의 감독 필록세누스가 70인역의 루시아 개정본을 근거로 페시타를 개정했다. 617년에는 헥사플라에 들어 있는 시리아어 역을 텔라의 주교인 파울루스가 헥사플라 70인역에 근거하여 개정했다. 지금 단편만 남아 있는 팔레스타인 시리아 역은 에데사의 야코부스(708 죽음)가 새롭게 개정한 것이다. 현존하는 페시타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442년에 나온 것이다.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4권의 코덱스는 5~12세기 때의 것이다. 아직 비평적 편집본은 없으나, 국제구약학회가 준비하고 있다. 16. 아랍어 역본들 최초의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역본은 사디아 벤 요세프(892~942)가 히브리어에서 번역한 것으로서 히브리어로 씌어진 아랍어 역본이다(아랍 문학). 이 번역은 이집트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아부 알 하산이 이것을 대본으로 모세5경을 번역했으며, 11~12세기에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으로 받아들여졌다. 또다른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은 아부 사이드가 13세기에 번역한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다른 여러 번역들 중에 10세기에 야피트 이븐 알리가 번역한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946년 스페인 코르도바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벨라스케스의 아들 이삭이 복음서를 라틴어에서 번역했다. 아랍어 역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본으로는 16세기에 번역된 것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관되어 있다. 19세기의 것으로 파리와 런던에 있는 '대역성서'(Polyglots)에 아랍어 역이 보존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랍어 역 사본들은 히브리어·그리스어·사마리아어·시리아어·콥트어·라틴어 중에서 번역된 것 등이 함께 전해져오기 때문에 번역판들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 만큼 아랍어 역은 본문비평 자료로서는 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19, 20세기에 개신교와 가톨릭이 번역한 현대 아랍어 역들이 있다. |
<언어학 비평>은 문법·어휘·문체와 관련된 성서언어에 관한 연구로 이 언어들이 가능한 한 충실하게 번역될 수 있는가를 확인한다(성서비평).
<문학비평>은 다양한 성서본문을 문학 장르에 따라 분류한다.
또한 다양한 성서본문의 연대, 저자, 염두에 둔 청중을 밝히기 위해 성서의 내증과 외증을 이용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모세5경(〈구약성서〉의 첫 5권)의 서로 다른 전승계통은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발달 과정의 서로 다른 단계와 관계되어 있다. 〈신약성서〉에서 문학비평은 마태오·마르코·루가의 저작으로 간주되는 복음서들의 관계에 연구를 집중한다. 이 복음서들은 대부분 예수의 사역에 관한 동일한 전승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공관(共觀:같은 관점에서 봄) 복음서라고 불린다.
전승비평은 성서 자료의 다양한 출처를 분석하여 그 배후에 있는 구전전승을 찾아내고 그것의 점진적인 발달과정을 추적하는 방법이다.
<양식비평>은 어느 정도는 전승비평에서 얻은 성과인데 금세기의 주요 주석방법이 되었다. 양식비평의 기본 전제는 기록되거나 구전된 문학자료는 그것을 보존한 공동체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가에 따라 특정한 양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의 내용은 그 이야기의 양식(예를 들면 기적·논쟁·회심 이야기)뿐만 아니라 공동체 생활 내에서 그 이야기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어떤 이야기는 한동안 여러 삶의 정황에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를 제대로 분석하면 그 이야기가 최종적인 양식에 이르기까지 발달한 과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해석학 (철학) *** 해석학(解釋學, Hermeneutics)이란 해석의 이론과 방법론이다. 특별히 성경 텍스트, 지혜문학, 그리고 철학 텍스트를 해석하는 이론이며 방법론이다. 성경 해석학을 포함하여 전통적인 해석학은 기록된 텍스트 특별히 문학, 종교 그리고 법의 분야에 있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대 해석학은 기록된 텍스트와 관련된 문제만을 포함하지 않고, 해석하는 과정에 있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이것은 의사소통의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 형식들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전제, 전이해, 언어와 의미를 다루는 철학, 그리고 기호학과 같은 의사소통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관점도 포함한다. 철학적 해석학은 첫째로 진리와 방법에서 발전된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의 지식이론 그리고 때때로 폴 리쾨르와 관련된다. (목차) 1. 해석 1) 어원 2. 전통적인 해석학 3. 성경 해석학 4. 신학적 해석학 5. 슐라이에르마허 1) 신 해석학 2) 에네스트 푹스 3) 게하르트 에벨링 6. 현대 해석학 1) 철학적 해석학 1. 해석 1) 어원해석학을 뜻하는 “헤르메노이틱(Hermeneutik)”의 어원은 원래 헬라어 “헤르메뉴”(ἑρμηνεύω, 해석하다)에서 왔다. 동사형과 명사형으로 사용된 이 헬라어는 이미 고대 헬라 저술가들의 문헌에서 발견되는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크세노폰, 플루타르크, 에우리피데스, 루크레티우스 같은 이들의 작품이 그것이다. 이 단어는 원래 헬라 신화에 나오는 신의 사자인 '레르메스'에서 파생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헤르메스가 “인간의 이해 능력을 초월해 있는 것을 인간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도록 전환시켜 주는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34). 즉 헬라인들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이 어떤 사건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인 언어는 날개 달린 헤르메스의 작용이다. 2. 전통적인 해석학 전통적인 해석학은 쓰여진 텍스트의 의미에 관심을 갖는 해석이론을 포함한다. 그런 이론들은 저자와 독자 그리고 텍스트 사이에 발견된 관계들에 초점을 둔다. 히쉬(E.D. Hirsch)가 주장하기를 한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를 넘어서, 독자의 지평과 저자의 지평이 만나는(융합하는) 지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폴 리꾀르(Paul Ricœur)는 텍스트는 저자의 의도와 원래의 독자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가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3. 성경 해석학 성경 해석학은 일반적인 해석학과 특수한 해석학으로 2 분류로 나뉜다. 일반적인 해석학은 문법적, 역사적-문화적, 문맥적, 언어구문적, 신학적 관점을 포함하여 모든 성경 본문을 해석을 통제하는 규칙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특수한 해석학은 비유, 알레고리, 모형, 그리고 예언과 같은 특별한 장르에 적용하는 규칙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성경 해석학은 가끔 하나의 과학과 하나의 예술로 정의된다. 미리 정해진 규칙들과 관련해서 과학으로, 의미가 기계적이며 엄격한 규칙들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면에서 하나의 예술로 인정된다. 4. 신학적 해석학 성경 해석학과 같은 의미로 쓰일 수 있지만, 좀 더 신학적인 요소를 포함하여 성경본문을 해석한다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신학적 해석학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며, 성령의 조명을 인정하며, 기존의 성경해석자들의 해석들을 참고하여 성경 본문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는 학문이다. 예를 들면 칼빈의 해석학은 칼빈의 신학적 해석학으로 연구될 수 있다. 신학적 해석학은 역사적 문접적 해석학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현대 철학적 해석학까지 사용하여 성경의 본문을 연구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이나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학, 그리고 푹스나 에벨링과 같은 신 해석학과 같은 것들이 있다. 5. 슐라이에르마허 슐라이에르마허는 해석학이란 본문으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는 이해의 학 또는 이해의 예술(the art of understanding)로 정의한다. 여기서 이해는 이해되고 있는 과정이 중요하며, 예술이란 하나의 기술이며, 주관성을 말한다. 이해 자체에 해석학의 관심을 두고 이해가 일어나는 조건을 분석하고, 이해가 성취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해란 저자의 정신적 과정의 추체험으로 규정한다. 객관화 된 고정된 표현을 통해 그것이 연원한, 저자의 정신적 삶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본다. 오해를 피하는 기술로서 해석학을 정의하며, 문제의 전적인 발전은 텍스트 보다는 저자에 집중되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문법적 심리적인 규칙을 제한한다. 1) 신 해석학(New Hermeneutic) 신 해석학(New Hermeneutic)은 루돌프 불트만 이후 해석학이 실존주의를 통하여 성경을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 점에서 출발한다. 신 해석학의 핵심은 언어의 실존적 이해에만 그치지 않고 언어가 개인의 삶의 역사에서 언어의 사건화되는 것에 강조를 한다. 대표적으로 어네스트 푹스와 게하르트 에벨링이 있다. 2) 어네스트 푹스(Ernst Fuchs) 어네스트 푹스(Ernst Fuchs)는 에벨링과 더불어 신 해석학파(New Hermeneutic)의 주창자이다. 그의 관심은 인간 존재에 대한 방해 받지 않는 언어를 듣는 법을 배울려고 한다. 이것을 언어사건이라고 한다. 후기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을 적용하는데, 루돌프 불트만이 예수의 사적(史的) 문제에 있어서 전혀 도외시하기에 예수의 말씀과 케리그마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게 된다. 예수의 행동과 케류그마의 연 속성을 말한다. 초대 기독교의 성찬이나 예수가 세리와 음식을 나눔의 행위는 구속사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이 구속의 의미를 이해하게 해주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초기 기독교의 탄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행동과 케류그마의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3) 게하르트 에벨링 게하르트 에벨링은 어네스트 푹스가 주장한 언어사건이라는 말 대신에 '말사건'을 주장한다. 에벨링은 "해설되어야 하고 해설이 필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본문이 아니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목적이 그 자체가 해설하고 조명하고 창조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본문은 거기에 그 자체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기원이며 미래일 말 사건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언어사건(말 사건)은 계속적으로 일어난다고 한다. 해석자가 텍스트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텍스트가 해석자를 주장한다는 것이다라고 한다. 6. 현대 해석학 현대 해석학은 계몽주의 이후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인 슐라이에르마허를 시작으로 태동되었다. 좀더 철학적인 관점이 강조되면서 성경본문의 해석보다는 철학의 주제로서 정신과 심리에 관심을 가졌던 딜타이로 발전되었다. 1) 철학적 해석학 철학적 해석학은 이 세계를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완벽하게 해명해 내고자 하는 시도를 비판하고, 정신과학이 지닌 고유하고 독자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실존주의 영향속에서 현존에 관심을 가진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학(Ontological hermeneutics), 그리고 지평의 융합을 강조한 가다머에서 꽃을 피운다. 철학적 해석학의 관심사에 대해 한스게오르트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과학적 방법론의 지배 영역을 넘어서는 진리 경험을 도처에서 찾아내어 그 고유한 정당성에 관해 물으려는 것이다.”라고한다. 자연과학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그 가치가 정당하게 평가될 수 없는 예술, 종교, 도덕 등의 영역은 철학적 해석학을 통해 그 자신의 독특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
<편집비평>은 전승의 여러 단편들이 저자나 편집자에 의해 최종적인 문학작품으로 배열된 방식을 탐구한다. 이런 전승 단편들의 배치와 수정된 것을 살펴보면 저자의 의도와 그 의도를 이루기 위해 저자가 사용한 방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역사비평>은 성서 문헌들을 역사적 맥락 속에 놓고 그것을 동시대 문헌들에 비추어 검토한다. 종교사 비평은 대개 동일한 방법에 따라 성서 본문에 표현된 종교적 신앙과 관습을 세계 종교 일반에서 나타나는 경향과 비교한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종교의 특징을 다른 고대 중동 종교의 특징과 비교하기도 하고, 초기 그리스도교를 영지주의(1~2세기에 보편화된 신비적 종교철학으로 악한 물질과 선한 영의 절대 이원론에 기초했음)와 비교하여 검토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