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오솔길
설핏 잠이 들었을 즈음에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 3시. 모르는 번호였지만 나도 모르게 소리에 반응했다. 상대는 아버지의 위독을 알렸다. 곧 가겠습니다. 현실감이 없어 잠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자 그제서야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806호.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는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숨을 얕게 얕게 쉬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의 손은 이미 끝부터 파리하게 식고 있었다. 주물러도 온기가 돌지 않는 아버지의 두꺼운 손. 이제 커버린 내 손이 그 차가운 손안으로 모두 들어가지 않는다. 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 여기까지 오느라 퇴모한 심장은 모니터에서 마지막 작고 야트막한 푸른 산을 넘다가 이내 수평선을 그렸다.
아버지를 안아 봐도 괜찮을까요.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의사 선생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드랑이와 어깨너머에 손을 넣어 아버지를 안았다. 아버지의 감은 눈에 물기가 맺혀있다. 사랑해요. 아버지의 심장이 수평선을 잠시 흔들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버지는 말없이 푸른 선으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가없는 죽음과 바닥이 드러나는 생이 엉켜 있는 공간이 마치 뒤틀린 꿈의 한순간 같다. 죽음의 주변을 떠도는 이들이 모여 있는 이곳. 문 입구는 죽음에 가장 근접했던 환자, 아버지 생의 마지막 자리가 되었다. 아버지 침대 주위로 빙 둘러져 있는 커튼 너머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새벽임에도 기침이나 신음, 그리고 고함 같은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아버지 죽음을 선고하는 의사의 메마른 목소리에 어느 환자의 거친 신음이 얹혀 죽음이 닿은 시간을 듣지 못했다. 간호사들이 도파민, 혈액 봉지, 코줄, 산소호흡기, 카테터를 정리했다. 밖으로 나가 계세요. 고인은 3층으로 모십니다.
쫓기듯 떠밀려 나온 복도의 불빛이 너무 밝았다. 창밖의 어둠과 복도의 빛은 마치 삶과 죽음처럼 경계가 너무나 확실했다. 삶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죽음에 닿는다고 인공조명은 말했다. 눈 시린 인공 불빛 아래에서 내다본 어둠은 마치 아버지의 죽음처럼 막막하다.
창밖의 뿌연 겨울 하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처럼 멀기만 하다. 슬픔만큼 아득한 거리는 눈에 가득 담아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방금까지 만졌던 아버지의 두꺼운 손, 두꺼운 가슴팍이 아직 또렷하다. 올렸던 시선을 내리자, 창문 너머로 앞산이 어슴푸레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저 산 어딘가에 아버지와 걸었던 작은 길이 있다. 약수터로 이어진 그 오솔길을 찾을 수 있을까.
초등학교를 가기 전 여름께였던 걸로 기억한다. 무슨 이유였는지 아침마다 빈 프리마 병을 하나 들고 아버지와 앞산 약수터에 갔다. 어려서부터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아침마다 따라가지 않으려고 이불 속에서 밍기적거렸지만 결국은 고사리손을 모두 감싼 아버지의 두꺼운 손에 이끌려 흙길을 밟았다. 오솔길을 오르면서 우리는 무슨 얘기를 했을까. 아버지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나를 일으켜주기도 했을 것이고, 나는 휘파람을 부는 아버지를 흉내 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말이 없는 아버지 대신 내가 줄곧 무언가를 얘기했을 것이다. 시간 속으로 사라진 기억이 아버지의 걸음을, 그리고 약수터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약숫물의 감각을 되살렸다.
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발아래를 보면서 느리게 걷곤 했다. 아버지의 팔자 걸음걸이는 서툰 이불 시침질처럼 느슨했다. 폭이 좁기에 속도를 낼 수 없는, 그리고 호젓한 기분을 자아내는 오솔길에 맞는 걸음걸이였다. 좁기에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가 없고, 조용해서 적막한 오솔길. 아버지의 인생은 어쩌면 그 오솔길과 닮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의 인생도 한 때는 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도로를 덜컹대며 달리기도 했을 것이고, 속도를 내어 고속도로를 위험하게 달리며 처자식을 건사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천성이 보드라워 남을 앞지르고 위협할 생각이 없었던 아버지는 사람을 믿고 몇 차례 호된 일을 겪었다. 사람에게 질린 아버지는 시끄러운 세상에서 비켜나 오솔길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혼자서 바둑을 두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안타까웠지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가는 길은 내게 언제나 열려 있었다. 아이 문제로 남편과 다투다가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집을 나왔다. 새벽 시간이었다. 돈도 없었고, 갈 곳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생각난 것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주무시다 말고 나를 데리러 왔다. 뭐라고 말하기도 머쓱하여 어둑어둑한 길바닥만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손을 잡으면서 괜찮아질 거라 했다. 아버지라면 이 시간에 이유를 묻지도 않을 것이고, 나를 감싸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늘진 나무 사이로 잘게 햇볕이 쏟아지는 따뜻한 곳. 아버지의 그 길에 들어가 며칠 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니까 정말 괜찮아졌다. 그러고는 한동안 그 길에 들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치매 증상이 보이기 시작해서야 나는 그 길에 자주 들어갔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걸음은 촘촘해졌다. 촘촘한 걸음은 균형이 쉽게 무너져 나는 아버지의 두꺼운 손이 아니라 팔짱을 끼고 작은 길을 걸었다. 함께 걷는 동안 계절은 바뀌었고 아버지의 촘촘했던 걸음은 길을 잃은 것처럼 자주 머뭇거렸다. 그리고 걷는 동안 그토록 말이 없던 아버지가 주로 말을 했다. 이번에는 내가 듣는 역할이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나면 아버지는 나를 보면서 후련하다고 했다.
느린 걸음으로 나를 맞춰주고, 나를 기다렸던 아버지를 더 자주 찾아야 했다. 길은 언제나 내게로 열려 있었는데, 필요할 때만 이 길을 걸었다는 사실에 괴롭다. 눈꺼풀 너머로 일렁이는 빛처럼 눈물이 차올랐다. 덜어내고 지워보아도 가벼워지지 않는 그리움은 곧 비라도 내릴듯한 납빛의 어두운 새벽하늘 같다. 무거운 한숨에도 새벽하늘이 서서히 밝아왔다. 경계가 명확해 보이던 어둠이 빛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눈 감은 아버지가 울먹이는 나를 토닥이듯이.
아버지를 그리워할 때마다 아버지와 걸었던 순간을, 들었던 이야기를, 그리고 풍경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도꼬마리가 바짓단에 들러붙는 야트막한 마른 흙길이었다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줄지어선 길이었다가, 파리한 가로등이 비치는 컴컴한 밤길이었다가 순간 이슬이 맺힌 풀들 사이로 젖은 흙길이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거기에는 아버지와 내가 손을 잡고 걷고 있다.
첫댓글 주물러도 온기가 돌지 않는 아버지의 두꺼운 손
아버지를 안아 봐도 괜찮을까요.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의사 선생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바둑을 두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안타까웠지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말하기도 머쓱하여 어둑어둑한 길바닥만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손을 잡으면서 괜찮아질 거라 했다.
거기에는 아버지와 내가 손을 잡고 걷고 있다.
축하,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