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10) 화자와 시의 종류 - ③ 분리·무화되는 주체/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 진
화자와 시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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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분리·무화되는 주체
자아의 정체성이라거나 주체라는 것을 확신하는 일은 근대적 인문학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말 니체에 의한 권위의 해체와 갱신(更新)의식, 20세기 초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후에는 주체라거나 자아라거나 하는 건 종잡지 못할 정신적 에너지일 뿐이라는 인식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진실은 무의식 속에 있다는 논리를 이어받은 라캉(Jacques Lacan)에 이르러 생각하는 ‘나’ 자체는 믿을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주체적인 나와 실재하는 나는 원천적인 불일치 속에 있다는 논리는 더욱 구체화된다. 라캉은 이 불일치를 ‘주체의 균열, 갈라진 틈, 입 벌림’ 등으로 표현한다. 나와 나의 주체는 근본적으로 균열된 상태이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는 내가 아닌 상태를 생각하는 타자(他者)적 존재.’라는 명제가 성립된다. 주체의 분리, 나는 언제나 차이 나는 나를 안고 있는 셈이다. 이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인간학에도 닿아 있다. 내가 아닌 타자(the other)란 자기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아닌 존재인 셈이다. 나는 나를 신뢰할 수 없다.
나무 그림자에 등을 기댄다
기댄 것은 나인가 그림자인가
배우처럼 분칠을 한다
언제나 웃는 얼굴은 슬퍼지는 얼굴을 데리고 산다
움직이는 순간마다 서로를 바라본다
울며 웃으며 끌어안는다
물들지 않는 단풍나무 잎사귀 떨어진다
가본 적 없는 숲에서 날아온 먹그늘나비가 손톱 위에 앉는다
그림자를 끌고 가는 왼쪽 얼굴이
햇빛 드는 오른쪽 얼굴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얼굴을 접는다
두 개의 얼굴이 네 개가 되는
귓속의 귀 열리고 입속의 입 겹친다
천천히 느리게 걸어가는 두 발과
가슴 두근거리며 허둥대는 두 발을
누가 묶어 놓았나
사거리에 세워진 바람인형이 다시 넘어진다 다시 일어선다
밤이면 의문부호 같은 비가 지붕과 지붕을 덮어
한 명, 두 명, 세 명의 내 모습이 잠에서 깬다
얼굴과 얼굴 사이
아무도 모르게 잠시 파랗게 물드는 것은
또 다른 그림자를 가진 여러 겹의 얇은 옷
아침은 다시 시작되고 그 절반은 붉거나 푸를 것이다
―안효희, 「그림자에 등을 기댄다」 전문
주체는 다면의 얼굴로 존재한다는 현대심리학의 문제의식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시의 화자는 주체의 분리 현상을 일상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라캉이 그리스 신화의 예를 들어 인간에게는 양성 합일, 자웅 공동체적 존재 형태를 그리워하는 본능이 있다고 한 바, 그 양성적 본능을 심미적 차원에서 떠올리게 한다.
나의 행위가 그림자 즉, 타자의 행위이기도 하다거나, 때 아니게 떨어지는 단풍잎과 미지에 대한 불안함, 세상살이는 배우처럼 분칠을 하고 사는 것이라거나,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 두 개의 얼굴과 네 개의 얼굴이 동일시, 세 명의 내 모습, 의지와 상관없는 바랑과 빨강 등등이 그렇다.
“그림자를 끌고 가는 왼쪽 얼굴이/ 햇빛 드는 오른쪽 얼굴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를 위시한 이미지들은 화자의 미적 수준을 읽게 한다. 1인칭 관찰자 전망의 차분한 어조에 심리학 논리의 간접 체험이 실제 생활에서 이어지고, 타자적 주체를 객관화하여 관찰하는 데서 미적(美的) 실마리를 찾는 시라 할 것이다. 나와 그림자, 웃는 얼굴과 슬픈 얼굴, 왼쪽 얼굴과 오른쪽 얼굴, 두 개의 얼굴이 네 개가 되고 귀속의 귀가 열리고 입속이 입이 겹치는 데에서 20세기의 입체파적 기하학성을 읽을 수도 있다.
이 시에서 주체란 잃어버린 주체를 찾아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화자는 모든 현상의 중심과 목표를 두지 않고 시간과 공간에 내재하는 모든 차이와 흔적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차연(Différance)의 삶’을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예 자아가 무화(無化)되고 따라서 세상에는 진지함이나 귀 기울일 만한 의미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며, 미적 감각에 몰입하는 화자의 시도 있다. 의미를 따르는 동안에는 자기 자신의 관념에 사로잡혀 그 관념 또한 무수한 얼굴을 가진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해 버리게 되는 이유에서일까? 구체적인 삶의 의미망 밖에서 심미적 감성을 곤두세운다.
아침 비비비 새소리를 받아본다
비가 미끄러진다
나팔꽃 줄기에 새소리가 방울방울 매달린다
S라인으로 다리 꼬고 하늘로 치솟고 있는 나팔꽃
진보라색 꽃우산 펴들다 초록하이힐이 벗겨진다
지렁이를 신은 빗줄기
자목련건반 스타카토로 두르리다 나동그라진다
아침 비비非非 새소리
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간다
―송시월, 「아침 비비비」 전문
기본적으로 모든 개념적 의미나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리다 식의 의미 중심의 부재, 의미가 부재하는 장소의 흔적을 좇는 시라 할 수 있다. “비비비”는 새소리이기도 하고 빗줄기를 가리키기도 하고, 아닐 비(非), 세계에 대한 내적 부정의 감정이기도 하다.
새들의 지저귐, ‘비비비’를 손으로 받아보면 비(雨)가 미끄러진다. 이어서 나팔꽃 줄기의 비는 비비비 지저귀는 새소리가 되고, 나팔꽃은 다시 꽃우산 아래 초록 하이힐을 신은 화자의 모습이다.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비오는 날의 이미지도 기억 속에서 불려나오고 자목련 꽃을 마구 두드리는 비의 이미지에 비비非非 아닐 비(非)의 반복은 세속으로부터 자연의 언어적 미감으로의 해방감이다. 세속을 탈출한 비 내리는 아침의 새소리에 시적 주체를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삶의 의미를 끄집어내는 대신 소제들의 시각적 청각적 근육 감각적 측면을 미적으로 즐기며 관찰하고 있다. 모든 의미는 한낱 격식에 지나지 않고 기표들은 저들끼리 몸을 비비거나 연계되는 미감(美感)의 대상일 뿐이다.
「그림자에 등을 기댄다」나 「아침 비비비」와 같은 시들에 대해서는 심리학적 또는 문예사조적 미학에 시적 언어의 옷을 입혔을 뿐, 실제 삶에서 오는 감흥에서는 너무 멀리 있는 것이 아닌가, 독자의 감흥이나 호응을 이끌어내기는 어렵지 않느냐 하는 질문이 따를 수 있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 시단에는 이런 추상을 감각화 하는 미학의 시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그 중에는 예시들과 같이 이미지 배치가 저 나름의 매력을 갖춘 시도 적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할 밖에는 없다 하겠다.
시인의 현재적 자아에서 차이가 나는, 시적 자아가 개진해 나아가는 지경은 무궁무진 다채롭다. 현실적인 자아인 경우만 해도, 탐구적-비판적-논리적-도피적 자아가 있을 수 있고, 영역에 따라 내면적-개인적-사회·역사적-우주적-자연적 자아가 있을 수 있고, 그 성향에 따라 감성적-이성적-본능적-미학적-철학적-현실적 자아가 있을 수 있고, 내면적이라 해도 원형(집단무의식)적-무의식적-전의식적-의식적-초자아적-유아적 자아, 근대적-포스트모더니즘적-다면적 자아가 있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연동 상태에 따라 다르고 시편마다 처한 현실마다 미적 국면마다 시적 자아는 다른 모습으로 개입한다. 물론 시적 자아는 ‘화자’로 대체될 수 있는 말이다.
아무튼 시의 화자와 그 어조와 전망은 다른 시와의 차이성, 존재의 변별적 가치와 방향을 결정하는 동시에 내적 통일성과 지향의 체제를 구비하는 밑바탕이 된다. 이들은 시인의 의지와 체질의 반영이기도 하고 시적 능력에 따라 그 세련미를 갖추게 된다.
부언하자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성 세계와 문화에 대한 전복을 꾀하는 시라 할지라도 그만큼의 방향과 호소력을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현실에서 그에 마땅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진정성을 공유할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한다.
< ‘차이 나는 시 쓰기, 차유의 시론(신진, 시문학사, 2019)’에서 옮겨 적음. (2020.10.06.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10) 화자와 시의 종류 - ③ 분리·무화되는 주체/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 진|작성자 화룡이의 행복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