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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인성(人性) 문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인성(人性)이
"우리와 같은" 죄 있는 육신이냐, 아니냐라는 다툼은
기독교계 안에서 매우 오래된 신학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와 같은 죄있는 인성인가?
아니면 우리와 같은 연약한 육체로 오셨지만 죄가 없는 인성인가?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는데,
그 육체와 인성이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인성인가?
아니면 범죄 후의 인성인가?
예수님은 죄의 성향을 가진 본성인가 아닌가?
이 문제로 왈가왈부 옥신각신 등 말도 탈도 많습니다.
특히 생애의 빛이나 SOS TV, 11시 교회 손계문 목사 등은
예수님이 만일 죄의 성향이 없는 육신으로 오셨다면
예수님은 결코 죄를 승리하는 우리의 모본이 될 수 없으며
이러한 주장은 신신학이 재림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인성 문제를 곡해하고 왜곡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이들은 예수님의 "우리와 같은 죄있는 육체"를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라며 다음 성경절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 7)
그러나 위 성경절은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하는
예수님의 인성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구절입니다.
요한서신에 사도 요한이 주의를 환기시킨 적그리스도의 '예수님이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것"은 그 당시 "그리스도가 물질(육체) 없이
태어났으며, 생전에 그가 겪은 고통, 십자가 수난은 모두 환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부정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假現說,Docetism)에 대한 말씀이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지만
그 육체에 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와는 본질적으로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루는 예수님의 인성 문제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느냐 아니면
영으로 오셨느냐를 다루는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 문제가 아닌,
육체로 오셨지만 그 육체에 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우리와 같은 육체라고 할 때 죄의 성향이 있는 육체인가
죄의 성향이 없는 육체인가를 다루는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 문제를 다룰 때 왜 생애의 빛 분들이 저러한 성경절을
무모하게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에 반하는 자들의 주장을
적그리스도적 주장으로 매도하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인성(본성) 문제를 이야기할 때 어떤 분들은
"인성 문제가 뭐 그리 중요하냐?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라고 합니다만,
우리가 예수님의 인성 문제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엘렌 지 화잇은 그 중대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들과 그리스도를 묶는 사슬이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께 묶어놓는 황금 사슬이다.
이것이 우리의 연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진짜 사람이었고, 그가 사람이 되셨을 때
겸손의 증거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육체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셨다.(원고 67, 1898).
오늘은 이 문제의 해결 실마리를 위해 근원적인 문제만 언급하겠습니다.
이 글을 잘 이해해야 그 다음 문제들이 쉽게 풀려집니다.
우리 재림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생령(生'靈)은 히브리어로 '네페슈 하야'이고
헬라어로는 '프쉬케'입니다.
그 뜻은 '산 존재'(living being) 곧 '생명체'입니다.
이 단어는 '사람'에게만 사용된 것이 아니고
물고기, 새, 파충류, 육축 등 살아있는 생물들도
'네페슈'로 명시했음을 창세기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어가 아닌 한글 성경만으로는
'네페슈'를 우리가 정확히 구분할 수 없습니다
번역자들도 사람의 판단이나 문맥에 따라 네페슈를
그 때 그 때 '사람' '생명' '생물' '마음' 등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범죄하기 전에는
"생령" 곧 '살아있는 존재'였습니다.
‘생령’(네페슈)이라는 이 단어는 사람 뿐 아니라,
일반 생물에게까지 사용된 단어이긴 하지만,
'생령'인 사람은 일반 동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영적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페슈'라고 해서 다 같은 '생령'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으신
'사람'(생령) 외에는 그 어떤 동물이나 생물
심지어 천사에게까지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너를
낳았 도다"(히1:5)라고 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요4:24)
'영'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사람'을
낳으셨으니 당연히 그 자녀인 '사람'은 '영'(靈)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고전 15:45)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산 영'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은 같은 '네페슈'로 표현되었던
생물이나 다른 동물들과는 전혀 다른 '영적 존재'라고
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물도 '흙'으로 지으셨고 사람도 동일한 재료인 '흙'으로
창조하셨지만, 절대 그 동물과 사람은 동일한
'네페슈'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전 15:39)
위 성경절이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고 하듯이,
짐승이나 생물들이 '생령'이라는 '네페슈'라는 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고 해서 그 짐승이나 물고기의 육체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낳으신' 사람의
'신령한 몸'과 같은 '네페슈'(생령)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범죄 전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몸은 "신령한 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와 같은 '육'의 몸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범죄 직후, 아담과 하와의 외적인 것에는 별로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실상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아담과 하와의 몸은 '신령한 몸'에서
'육의 몸'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4)
범죄 전의 신령한 몸의 아담은 죽지 않는 몸이었지만
범죄 후에 육의 몸의 아담은 930세를 향수하다 죽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육의 몸'으로 태어나 비록 '육에 거하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과 '새사람'으로 재창조되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여 '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썩지 않고 죽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홀연히 변화되어'
(즉, 범죄 전 창조 직후의 본래 몸인 '산 영'으로 회복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몸'을 입었던 아담이 범죄 직후에
외적으로 그 몸에 별 변화가 금방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래서 오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 그리스도인들
즉 '영'에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지 않는
불신자(성서적으로 엄격히 말하면 마귀의 자녀)들과
외적으로 볼 때(육안으로 볼 때)
전혀 차이가 없지만(똑같은 육의 몸)
성서적으로(영적으로)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이지요.
우리는 생명에 거하고
그들은 사망에 거하고
우리는 영에 있고
그들은 육에 있으며(오직 육에 있다)
우리는 빛에 거하고
그들은 어두움에 거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고
그들은 흑암의 그늘에 앉아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들은 마귀의 자녀이고
우리 속에는 영생이 있고
그들에게는 영멸이 있을 뿐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사람으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오신 예수님의 몸은 우리와 같은
'육의 몸'을 지니시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죄를 범치도 않은' '신령한 자'로 사셨습니다.
먼저 성경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2:22)
그래서 오늘 우리와 같은 '육의 몸'을 가지셨으나
성령 충만의 생애를 어떻게 살 수 있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명백히 모본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록 육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지만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을 의지하여 살 때
우리들도 주님과 같이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못 박힌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생선으로 조반을 드시면서 보여 주신대로
그 예수의 믿음을 갖고 사는 우리들도
비록 '육의 몸'을 가지고 살았으나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신앙을 통해 장차 이 땅에서 죽을지라도
우리들도 예수님의 몸과 같이 다시는 썩지 않고 죽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의 회복을 맛보게 될 것임을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몸은
오늘 우리와 같은 '죄 있는 육신'을 쓰고 계셨다는 것인데요,
여기서 "우리와 같은"이라고 할 때 이 표현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와 같은 죄 있는 육신"이란 것은 예수님에게 죄가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죄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고 예수님은
그러한 우리들이 가진 죄 있는 육신과 같은 모양으로 오셨다는
뚯인데, 로마서에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라고
할 때 예수님이 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죄 있는 것은 우리들이고
그러한 죄 있는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와같이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연역한 육체를 그대로 가지시고
성령을 의지하여 죄 없는 삶, 죄를 이기는 생애를 사셨고
그 결국은 '성령께서 예수님의 죽을 몸을 살리시어'
육의 몸이 아닌, 신령한 몸으로 부활(변화)시키셨던 것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오직 성령을 의지하여 성령의 음성에
순복하고 복종하고 산 우리들도 결국 예수님의 몸처럼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회복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범 죄 전 아담의 몸은 신령한 몸 즉 생령(산존재, 영적 존재)이었고
범 죄 후 아담의 몸은 육의 몸(즉 죽을 존재, 육적 존재)이었습니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고전 15:46)
성령으로 잉태되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몸은
우리와 같은 연약한 육의 몸이었으나 성령을 의지하여
죄를 이기신 '산 영' 즉 '신령한 자'이셨습니다.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전 15:46)
오늘 비록 첫 사람 아담의 범죄(원죄:原罪)로
'영적 존재'(생령)에서 '육적 존재'가 된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거듭나 오직 성령을 의지하고 살면
(즉 육에 거하나 영으로 살고, 혹은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고 살면' 이것을 '신령한 자'라고 한다)
우리도 장차 사망을 이기시고 '신령한 몸'으로 회복되신 주님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몸은 비록 죄로 연약해진 우리와 같은 육의 몸이셨으나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시므로 '신령한 자'이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비록 죄의 몸, 죽을 몸, 병들 몸, 연약한 몸을
가지고 살지만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하며" "성령을 따라 살면"
'신령한 자' 곧 '영적 존재'라 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 시골에서 살 때 보면 재래식 화장실에 똥바가지가 있었습니다.
똥바가지는 1년에 몇 번 화장실의 똥을 비울 때에만 사용합니다.
똥바가지는 오직 똥을 치우는 일에만 사용할 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다른 일에는 결코 쓸래야 쓸수가 없는 물건이요 도구입니다.
“죄악 중에 출생하여 ....죄 중 ...잉태”(시 51:5)한 우리들,
“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엡 2:3)고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서”(요 8:44) 나서 죄 가운데 빠져 죄 중에
헤메이며 죄로 인한 부패하고 썩은 냄새만을 풍기던 우리가
바로 똥바가지같은 죄 짓는데 외에 아무 쓸모 없는 허망한 죄인들이 아닌가?
그런데 금으로 된 바가지에 똥을 담아 놓으면 '똥바가지'가 되지만,
비록 깨어질 질그릇으로 된 바가지에 '금'을 담아 놓으면
금 그릇이 되는 것처럼,
첫 사람 아담은 범죄 하므로(그 안에 죄를 담으므로)
그 완벽한 몸이 똥바가지(사망의 바가지)가 되었고,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 되어 오셨고
이 땅에서의 삶을 오직 성령을 좇아 사시므로
(즉 그 안에 생명의 성령이 거하시므로)
그 연약한 육의 몸이 금 그릇(영생의 그릇)이 되신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고 온 갖 불의와 음란과 호색과 방탕과
헤아릴 수 없는 죄악이 충만했던 똥바가지같았던 우리들,
그래서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죄악의 냄새, 사망의 냄새를 풍기던
똥바가지 같았던 우리 안에 보배와도 같은 예수를 모셔 드리고
성령이 내주하도록 날마다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똥바가지가 금 그릇으로 바뀌어 지는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과 은혜를 날마다 믿음으로 누리는 자들만이
궁극적으로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고전 15:53)는
부활과 변화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
-다음 회에서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겠습니다.-
첫댓글 다 좋습니다마는 결정적으로 예수님은 율법의 정죄아래 나신 분이신가 아닌가가 논점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죄를 짓거나 죄가 있으셔서 율법의 정죄 아래 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 없는 예수님께 우리 죄를 정하사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분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저 생애의 빛 분들은 마치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죄의 성향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다른 분파들이 무엇을 믿든 우리 모두는 하늘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와
복음의 능력을 명백히 알아야 합니다. 내용이 길어서 원글에 올립니다.
"우리 모두는 하늘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와
복음의 능력을 명백히 알아야 합니다"라는 말씀에 백번도 더 동의합니다. ^^
“완전 무죄이셨던 그리스도의 인성(창 3:15; 마 8:17; 고후 5:21; 히 4:15; 벧전 1:19)―그리스도가 타락한 상태 가운데 있는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을 때 그는 죄에 조금도 참여하지 않으셨다. ... 그는 우리의 연약한 감정에 접해 보셨으며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죄를 알지 못하셨다”. 그는 점도 흠도 없는 어린 양이었다”(사인즈 1898. 6. 9)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완전히 아무 죄가 없었다는 점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사인즈 1898. 6. 9)”
그리스도는 인성을 취하신 체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성을 취하신 것이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 그는 마리아의 아들이었으며, 육체를 따라 다윗의 씨에서 났다. 그는 인간이라고, 심지어 인간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되었다. 바울은 “이 사람이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을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과 같으니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이 사람”이라고 하였다(리뷰 1906. 4. 5).
“조심하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하여 매우 조심하라. 그분을 사람들 앞에 죄의 성향을 가진 한 사람으로 제시하지 말라. 그분은 제2의 아담이시다. 첫째 아담은 죄의 오점이 없는 순결하고 죄없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었다. 그는 타락할 수 있었고, 그리고 범죄함으로 타락하였다. 죄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선천적으로 불순종의 성향을 타고난다”(화잇주석, 요 1:1-3,14)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독생자이셨다. 그는 인성을 친히 입으셨고, 모든 점에 있어서 인간이 시험을 당하는 것과 같은 시험을 한결같이 받으셨다. 그분도 죄를 범하실 수 있었고, 타락할 수도 있었지만 그분 속에는 단 한 순간도 악한 성향이 없었다. 아담이 에덴에서 유혹으로 공격을 받은 것같이 그분도 광야에서 유혹으로 시험을 받았다”(화잇주석, 요 1:1-3,14)
@박진하 “오해받기 쉬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질문들을 모두 피하라. 진리는 참람의 길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취급할 때에 그대는 불요불굴의 경계심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주장을 삼가할 필요가 있다”(화잇주석, 요 1:1-3,14)
@박진하 “이는 그대의 말들이 본래 가진 의미 이상의 뜻으로 전달되지 않도록 해서 신성과 연합된 그분의 인성에 관한 분명한 인식을 잃거나 흐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의 출생은 기적이었다. 왜냐하면 천사가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화잇주석, 요 1:1-3,14)
@박진하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화잇주석, 요 1:1-3,14)
“이 말씀들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 이외에 어떤 인간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사람들의 마음에다 그리스도께서 타락의 오점이나 성향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그분이 죄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손톱만큼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화잇주석, 요 1:1-3,14)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거룩한 자”라 일컬음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실 수 있었지만 죄가 없으셨다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에게는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신비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지금까지도 신비요, 앞으로도 신비로 남아 있을 것이다. ”(화잇주석, 요 1:1-3,14)
“나타난 것은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을 위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혀 우리와 꼭같은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지 못하도록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라. 신성과 인성이 연합한 정확한 때를 우리들이 알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 대로 우리들은 우리의 발을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계속 굳게 디디고 서 있어야 한다”(화잇주석, 요 1:1-3,14)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을 깊이 생각케 하는 주제들을 접근할 때에 위험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가 자기 몸을 낮추사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인간을 괴롭게 하는 모든 유혹의 힘을 깨닫기 위함이었다.
첫째 아담은 넘어졌지만, 둘째 아담은 가장 큰 시험 중에서도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굳게 붙잡았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사랑을 믿는 그의 믿음은 한 순간도 요동치 않았다”(화잇주석, 요 1:1-3,14)
““기록되었으되”가 그의 무기였으며, 그것은 모든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성령의 검이다.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다” 이 말씀의 뜻은 그에게는 유혹에 반응할 요소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화잇주석, 요 1:1-3,14)
“그에게 닥친 여러가지 유혹 가운데 단 하나에도 그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한번도 사단의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따라서 사단을 유리하게 해주는 일도 없었다. 사단은 그분에게서 사단의 전진을 고무시켜 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편지 8, 1895). ”(화잇주석, 요 1:1-3,14)
“어떤 방법으로든 사람들의 마음에다 그리스도께서 타락의 오점이나 성향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그분이 죄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손톱만큼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거룩한 자”라 일컬음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실 수 있었지만 죄가 없으셨다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에게는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신비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지금까지도 신비요, 앞으로도 신비로 남아 있을 것이다”(화잇주석, 요 1:1-3,14)
“나타난 것은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을 위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혀 우리와 꼭같은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지 못하도록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라. 신성과 인성이 연합한 정확한 때를 우리들이 알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 대로 우리들은 우리의 발을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계속 굳게 디디고 서 있어야 한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을 깊이 생각케 하는 주제들을 접근할 때에 위험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가 자기 몸을 낮추사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인간을 괴롭게 하는 모든 유혹의 힘을 깨닫기 위함이었다.”(화잇주석, 요 1:1-3,14)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이 잠시동안 그가 입으신 인성으로 가리워졌지만 그가 사람이 되셨을 때도 하나님이시기를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인성은 신성을 대신하신 것이 아니었고 신성도 인성을 대신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경건의 비밀이다.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밀접하게 그리고 나눌 수 없는 하나가 되었지만 그 양성은 확연히 구별되는 개별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비록 자신을 낮추사 사람이 되셨지만 여전히 그는 삼위 하나님 중의 한 분이셨다”(화잇주석, 요 1:1-3,14)
“그가 신실하고 충성을 다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신성은 그대로 있었다. 예수께서 비록 슬픔과 고난과 도덕적인 더러움에 둘리어 있고 하늘의 율례를 위탁받은 백성들에게 멸시를 받고 거절을 당하였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자신에 관하여 하늘에 있는 인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지상 사업이 끝이 났을때 그는 신성의 영광을 다시 한번 취할 준비가 되었다. ”(화잇주석, 요 1:1-3,14)
@박진하 “예수께서 육체 가운데 있을 동안에도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을 나타내실 때가 있었다. 신성이 인성을 통하여 번쩍이었고, 조롱하는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이 그것을 보았다. 그분의 신성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는가?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본 사람이 몇 사람은 있었지만 이같이 특별한 기회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그를 거절하였다. 그들이 눈먼 것은 깨달은 죄를 회개치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었다.”(화잇주석, 요 1:1-3,14)
위의 엘렌 화잇의 증언이라고 소개하신 글 특히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그분은 인성을 취하셨으며 ... 그러나 그분에게는 한 순간도 악의 경향이 없었다"는 증언에 대하여 미국 문창길 목사님이 최근에 저술한 "크리스천의 필수 지식"[시조사 발행-2018년 2월 9일]에서 밝히신 문제점을 소개해 드립니다. [149-152페이지에 기록됨]
그리스도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죄되고 부패하고 타락한 불충실을 소유하지 않으셨는데 이는 만약 그렇다면 그는 완전한 제물이 되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이다.원고 94, 1893.
###신신학의 변호를 위하여 사용된 베이커 편지
1. 베이커 편지란 1895년 엘렌 화잇이 호주 테스머니아 섬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 사역자 윌리엄 베이커[William Baker 1858-1933]를 도와주고 격려하기 위하여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 편지 내용은 그 젊은 사역자가 강조한 그리스도의 인성에 추가되어야 할 그리스도의 신성을 권고한 것이었다. 그의 편지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였으며 받드시 공개되어야 할 성질의 편지는 아니었다. 그가 사망한 후에 그의 편지는 다른 편지들과 함께 수집되어 화잇유산관리부의 문서창고 속에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 편지가 쓰여진지 60여년의 세월이 지나서 1955년 신 신학에 동조한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기까지 그 편지는 이 세상의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아니한 문서로 남아 있었다.
2. 베이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1882-1887년 그는 캘리포니아 주 태평양 인쇄소에서 와그너의 조력자로 일하였다. 그 후 호주의 출판 사업을 돕기 위하여 호주로 이동하였으며 그는 얼마동안 호주 잡지 출판을 위하여 일하였다. 그런 후에 그는 호주와 테스마니어 섬 그리고 뉴질랜드까지 돌보는 사역자로 임명되었다. 1891년 엘렌 화잇이 호주를 방문하였으며 여러 해 머물고 있는 기간 동안에 그녀는 테스마니아 섬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베이켜 목사에게 편지한 것이었다.
3. 베이커 목사는 그 당시에 재림교회의 다른 사역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타락한 인류의 죄의 육신을 취하고 오신 사실을 굳게 믿은 사람이었다. 그 당시 복음사업에 헌신한 사역자들은 그러한 신앙을 가지므로 그리스도가 저들 안에 저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음을 믿었으며 그리스도가 마신 쓴 잔은 고통으로 여겼다.
그들의 대다수는 학위를 가지지 못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었으며 따라서 저들은 더욱 단순하였고 자신들의 소신한 바를 열심히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4. 베이커 목사는 그리스도가 모든 시련과 유혹, 실패와 실망, 고통과 번민을 이해하고 우리들을 돕고자 하시고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설교하였다...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는 영화된 몸이 아니었으며 죄인과 꼭 같은 죄이 육신을 취하고 계셨다. 그리하여 베이커 목사는 우리의 구세주는 우리들과 더욱 가까운 분이심을 강조하였다.
5. 그리스도가 타락한 죄의 육신을 취하고 오신 사실을 베이커 목사는 굳게 확신하고 그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설교하는 일에 있어서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언급하는 일을 잊는 실수를 범하였다. 이와 같은 실수는 오늘날 우리 젊은 사람들이 흔히 범할 수 있는 실수이기도 한 것이다. 베이커 목사는 엘렌 화잇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으므로 그에게 장장 19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집필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녀의 편지에서 그에게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킨 대목을 여기에 열거해 보이고자 한다.
6.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점을 특별히 죄심하십시오... 그분은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 속성이 시험을 받는 것처럼 모든 점에 있어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죄를 범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타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한 순간도 악의 경향이 없었습니다...
결코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리스도에게 부패한 흔적이나 경향, 혹은 그분에게 어떤 모양으로 부패에 굴종하셨다는 극기 사소한 인상도 사람의 정신 가운데 남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우리들과 같은
인간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욕망을 경고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렇게 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그릇되게 나타내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7. 이상과 같은 편지 내용은 엘렌 화잇이 심히 사랑하고 아끼는 젊은 사역자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나타내는 데에 있어서 균형을 잃고 혹시 한편으로 기우러지지는 않을까 하는 어머니같은 염려와 사랑을 가지고 교정과 함께 권면하며 격려하는 글로서 읽으며 이해하는 것이 바로 된 일이라 생각된다. 이 편지 내용은 현대 언어로 "개인상담"에서 나타낸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8. 우리는 진리와 사실에 대하여 정직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 당시 참으로 엘렌 화잇이 품고 있었던 그리스도론이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베이커 편지가 쓰여진 같은 연대나 그 전후에 발표된 그녀의 공적인 글들, 특히 호주 정기 간해물[Australian Bible Echo]과 대총회 정기 간행물[Review and Herald], 그리고 거기에 그 당시의 다른 재림 선구자들의 글들을 열람하는 일은 마땅하고 공정한 태도라고 확신한다.
9. 특별히 베이커 편지가 쓰여진 같은 년대에 저술된 시대의 소망의 원고는 어떤 개인에게 보내는 글과는 달리 엘렌 화잇의 사상을 공적으로 발표한 문서이며 우리가 거기서 그녀의 그리스도론을 찾는 것은 정직하고 바로 된 일이라 믿어진다. 그녀가 저술한 시대의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화잇 선지자가 쓴 글까지 재해석하는 님이 참 납득하기 어렵군요.
어머니 같은 염려와 사랑을 가지고 격려하기 위해 쓴 글이기에 그 글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참으로 위험천만한 생각이 아닐 수 없네요. 개인 상담으로 한 선지자의 말에는 오류가 있나요? 참 내....ㅠㅠ
님이 지적하신 댓글 내용은 제 글이 아닙니다. 다시 확인하십시오
성경과 예언의 신의 저자는 성령이심을 잊지 마십시오[3기별30]
소망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증언한 한 대목을 여기에 인용해 두고자 한다. 여기에 엘렌 화잇이 기록한 증언과 베이커 편지에 기술된 내용을 서로 비교하기를 바란다.
10.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으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예수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는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참조; "4,000년간 죄로 쇠약해진 인간, 즉 죄의 결과로 쇠약해진 인간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