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12) 화자와 시의 종류 - ④ 화자의 유형과 시의 종류 2-2/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 진
화자와 시의 종류
네이버 카페 - MBTI & Health 심리 카페/ 이병률 시 속의 화자 유형은 뭘까요?
④ 화자의 유형과 시의 종류 2-2
㉱ 거부의 시
기존의 세계, 논리, 질서 체계를 아예 부정한다. 시적 대상은 물론 자아마저 분리되고 해체된다. 화자가 자의적으로 조정할 수 없는 꿈, 환상 따위를 따르거나 기존의 모든 관습, 법칙, 권위 따위를 거부한다.
거부에도 내면화되어 진정성이 엿보이는 거부가 있는가 하면 미숙한 투정 같은 것도 있고, 남의 흉내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웬만한 기술 습득을 통하면, ‘유사’ 거부의 시는 써낼 수 있기에 옥석 가리기에 애먹을 수 있다. 내면의 시적 주체가 미성숙한 시인들이 표현상의 낯섦만을 내세우는 데도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근래 우리 시단에서 일대 유행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지 않을까 한다.
암튼, 조향(趙鄕)은 이상의 뒤를 이어 해방 후에 현실적 전통과 의식상의 자아마저 파괴하는 시를 실천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이름성르은와다 그러마입소울다 돌아아녀와그다 구두에자이덕서 식물집하죄이자
도도는소잤 지세술녀었 앉서냄서린 끝밤갈는에 채을자나짓
모눈녀 요좀는 소샐쪼 이처언 랑하많
이 줘 구 럼 아
맑 요 역 차 얀
질
하
니
까
까
만
죽
음
이
―조향, 「물구나무 선 세모꼴의 抒情」 전문
기존 시 양식 자체를 해체한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눈이 맑은 소녀와 잤다. 그러지 마세요 입술 좀 줘요〉 하고 읽어나가기 위해서는 상하를 왕복하는 다섯 개의 크고 작은 역삼각형이 나온다. 가운데 긴 역삼각형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어 데칼코마니 기법을 보인다. 양식 페러디이다. 말 그대로 ‘물구나무 선 세모꼴의 서정’인 셈. 시의 윤리는 당대 대학교수 시인의 고상한 풍속을 뒤엎을 만큼, 극히 관능적이고 퇴폐적이다. 기성의 윤리와 질서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란 인간의 실체적 진실을 움직이는, 인간 정신의 원천이라 말한 성본능(libido)의 개방과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거울이 손을 잡아당긴다
팔이 길어진다
거울 안으로 들어간 팔은
거울 안쪽의 견고한 벽에 박힌다
벽에 박혀 있는 팔을 붙잡고
계단이 거울의 천장으로 오른다
계단에 매달려 있는 사과가 떨어진다
떨어진 사과는
어느새 계단에 다시 매달려 있다
햇살을 받으면
팔은 분화되어 견고한 벽에서
팔들이 자라나온다
팔들을 붙잡고 벽을 타고 오른 계단은
거울의 바닥에 도착한다
거울의 바닥은 거울의 천장이다
견고한 벽이다
―박강우, 「창세기, 아홉 번째 날」 전문
기존 언어의 의미와 기능, 시간과 장소의 개념이 무너지고 있다. 언어가 전달의 도구라는 실용적 기능을 떠나 맥락의 해체에 봉사할 뿐이다. 기표와 기표 사이의 마찰과 조응이 있을 뿐이다. 일말의 분위기만이 겨우겨우 맥락을 이어간다. 섬세한 언어감각에 의해 기획된 데페이즈망, 무선상상(無線想像), 자유연상의 언어이다. 무의식적 언어라 할 수도 있다.
해방 후 이를 실천한 조향의 「EPISODE」, 「바다의 층계」 등과 김춘수의 무의미 시를 계승, 기존 시법을 파기하고자 하는 시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계보를 이루고 있다 하겠다.
이 계열의 기성 권위에 대한 부정적 몸짓 또한 다양하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는 기성의 권위에 대한 희화와 페러디로 기존 권위를 해체한다. 시라는 양식 자체가 그다지 고상한 것이 아니라 한낱 대중적 소비재의 하나일 뿐이다. 권위에 꿀리지 않고 솔직하고 재미있게 털어 놓으면 되는 것이다.
지금, 하늘에 계신다 해도 도와주시지 않는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아버지의 나라를 우리 섣불리 믿을 수 없사오며 아버지의 하늘에서 이룬 뜻은 아버지 하늘의 것이고 땅에서 못 이룬 뜻은 우리들 땅의 것임을, 믿습니다(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보시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고통을 더욱 많이 내려주시고 오늘날 우리에게 미움 주는 자들을 더더욱 미워하듯이 우리의 더더욱 미워하는 죄를 더, 더더욱 미워하여주시고 제발 이 모든 우리의 얼어죽을 사랑을 함부로 평론ㅎ지 마시고 다만 우리를 언제까지고 그냥 이대로 내버려둬, 두시겠습니까?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이제 아버지 것이 아니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 보시오) 밤낮없이 주무시고만 계시는 아버지여 아멘
―박남철, 「주기도문, 빌어먹을」
함축적 1인칭 주인공 진술적 시점의 화자이다. 신(神)과 인간 양자 사이에 불신이 존재한다기보다 둘은 아예 무관한 별개의 존재다. 괄호 속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 보시오) 이 장면은 독자에게 노골적으로 하느님을 노리갯감처럼 조롱하는 대목. 〈우리 더더욱 미워하는 죄를 더, 더더욱 미워하여주시고〉는 소위 박애정신에 대한 철저한 부정, 〈그냥 이대로 내버려둬!〉라는 야유,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이제 아버지 것이 아니옵니다(를 일흔 번쯤 읊어 보시오)에 이르면 신이란 절대가치는 거부와 외면의 대상, 조롱거리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주기도문 패러디에 주에 대한 적대적 거부감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는 신성 자체를 거부하고 조롱할 뿐 그에 대한 감상과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열어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 세계를 아예 부정하고 해체하는 시를 거부의 시라 할 만하다. 그것이 세계에 대한 치기 어린 투정이든, 새로운 모색을 위한 것이든, 기성의 물리적 질서와 현실적 관계를 파괴하거나 해체하고자 한다. 파괴의 다다이즘, 무의식의 초현실주의, 가치중립의 해체시, 순수 기호의 시도 대체로 이에 해당한다. 미래적 비전은 물론 비판적 열정도 없다.
거부의 시 역시 거부와 해체의 태도에 일관성이 갖추어지지 않을 때는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된다. 자칫 주관 없는 시, 겉만 번드레한 언어유희로 취급받을 수도 있다. 화자의 동기 설정이 되지 않는다면, 산만한 낙서나 넋두리에 떨어지고 말 수도 있을 것이다.
시란 화자를 내세워 독자와 함께 새로운 시공으로 나아가기 위한 언어요, 매 순간의 주체에 의해 개척되는 언술이다. 물리적 현실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보다 더 소중한 내적 진실을 드러낸다. 화자의 남다름이 공통감에 연계될 때 진정성이 담보될 수 있고 시적 감동의 원천이 샘솟게 된다 할 수 있다.
관점에 의한 유형화는 어디까지나 시에 대한 인식의 극점을 설정해본 데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대결, 적응, 동화, 거부 사이의 무수한 중간적 태도 어디쯤에 있든 다른 관점, 즉 시의 다른 요소들에 대한 독자의 기대지평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자면 내용과 형식, 특수와 보편 어느 한 쪽을 위한 자기위장이 아닌, 무엇보다 창작자로서의 성실성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시 쓰기의 원천은 시적 체험의 됨됨이에 있는 것이다. 시인의 진정어린 열망은 시적 체험과 시적 주체를 낳고 어조와 전망으로 가다듬어 독자를 향하게 되는 것이리라.
< ‘차이 나는 시 쓰기, 차유의 시론(신진, 시문학사, 2019)’에서 옮겨 적음. (2020.11.0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12) 화자와 시의 종류 - ④ 화자의 유형과 시의 종류 2-2/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 진|작성자 화룡이의 행복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