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15) 언어의 집 만들기 - ② 우리말로 상상하기/ 문학박사 전기철
언어의 집 만들기
네이버 블로그 - 고요 숲의 아침/ 시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박상천]
② 우리말로 상상하기
시에서 언어는 절대적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언어로 되어 있다. 그 언어는 일반적인 생활언어이다. 그 언어는 주로 감각에 의해 수용된 주관적인 말이다. 하늘을 나는 새 소리, 한밤중 어디선가 내리치는 망치 소리만을 적어도 시가 된다. 그것은 아무 뜻도 없다. 시는 자신만의 말소리와 모양과 냄새와 맛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시인은 말을 많이, 그리고 잘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언어의 속성과 성격 등 말의 삶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쓰는 언어를 모르고 시를 쓸 수는 없다. 그가 쓰는 말은 어머니 언어, 풍토적인 언어, 즉 태생적인 말이다. 그 태생적인 말은 타인의 말과 섞이며 새로운 환경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말은 감각어이다. 말 속에 소리와 모양이 있다. 그만큼 우리말은 음성적이며 형상적이다. 생활의 현장에서 저절로 떠오른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에는 우미 민족의 생활상과 민족성, 그리고 피와 눈물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런 우리말이 정치사회적인 영향으로 많은 변화와 굴곡을 겪어왔다. 말이란 인간처럼 생로병사가 있어서 시 속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 사전 속의 말 대부분은 한자어이다. 그것은 과거의 정치사회적인 영향 때문이다.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서 살다보니 우리말이 생활 속에서 많이 사라지고, 우리말의 자리를 중국에서 수입한 한자어가 차지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한자어는 성리학과 함께 들어오다 보니 생활어보다는 관념어가 많다. 관념어는 사상, 즉 뜻을 표현하는 언어이다. 시란 사상을 표현하는 양식이 아니다. 시는 우리의 감각이나 생활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언어로 되어 있다. 그래서 시의 언어는 순수한 우리 전통의 감각이나 생활을 표현할 수 있는 우리말을 많이 쓴다. 더욱이 우리말 중에서도 풍토적인 말을 사용한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 사람들이 쓰는 말이 곧 풍토어이다. 그것이 곧 모어(母語)인 것이다. 모어는 어머니의 목소리나 어린 시절 친구들의 억양과 같다.
따라서 시에서 한자어를 쓰면 그 느낌이 반감된다. 우리가 접하는 한자어는 대부분 관념, 즉 머릿속의 언어이다. 시의 언어는 가슴에서 울리는 언어, 피부로 느끼는 언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감각의 언어이다. 다시 말하면 오감(五感)의 언어이다. 물론 관념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념시는 우리 시의 본령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과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 순우리말을 알아야 한다. 시는 의미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생활의 감각을 표현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은 철저히 생활어이면서 감각어이다. 우리말에 의성어나 의태어가 발달되어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말이 오랫동안 우리의 생활과 함께 성장해온, 우리 민족과 함께한 감각어이기 때문이다. 한자어가 뜻의 이해를 중시하는 말이라면 우리말은 소리나 모양, 맛, 촉감 등 오감에서 온 말이다. 시의 언어는 감각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우리말에 대해 깊이 있는 관심을 갖고 우리말을 수집해야 한다. 우리말 꽃 이름, 우리말로 된 부사나 형용사, 동사 등에 대한 관심 없이 시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순우리말로만 된 시도 얼마든지 있다.
다음 김소월의 시 「먼 후일」을 보면 순우리말, 그것도 아주 쉬운, 누구나 쓰고 있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만큼 이 시는 우리의 감성을 직접적으로 자극한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있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위 시는 모두 순우리말로 되어 있다. 그만큼 쉽고 우리 정서에 잘 맞는다. ‘잊었노라’를 중심으로 ‘찾으시면’, ‘나무라면’, ‘잊고’와 ‘말’, ‘그리다가’, ‘믿기지’, ‘먼 훗날’을 대비하여 보다 강하게 그리움을 정서적으로 점층화하고 있다. 그만큼 시에서 우리말은 우리 정서와 가장 잘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 다음에서 주로 순우리말로 되어 있는 시 두 편을 읽으면서 시적 효과를 살펴보도록 하자.
①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리라 비스듬히 너는 삼천포에 갔다, 공원 계단에서 아득하도록 비스듬히,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아득하면 되리라’를 생각하는데, 비긋이 날아가는 구름의 손가락들, 뿌리 내리지 못한 너의 이름들이 비인칭으로, 뭉그러지는 너의 독백들, 녹아내리는 바람의 등고선을 따라, 구깃구깃, 그리고 까마득히
② 처마 밑에 널어 말린 동지(冬至)께 무청처럼 간조롱히 뿌리는 비는
한 치 두 치 나비 재며 한 냥쭝 두 냥쭝 저울에 달며 는실난실 날리는 비는
일껏 발품이나 팔며 그늘마다 구름 기슭 볕뉘처럼 움트는 비는
전당포(典當鋪)도 못 가본 백통(白통) 비녀 때깔로 새들새들 저무는 비는
―오태환, 「안다미로 듣는 비는」 부분
위 시 ①은 ‘비스듬히’라는 순우리말을 중심으로 그 말들의 변용과 그 말과 이어질 수 있는 다른 우리말들을 배치하고 있다. ‘비스듬히’는 ‘비긋이’가 되고, 다시 그 말은 ‘아득하다’, ‘뭉그러지다’, ‘구깃구깃’, ‘까마득히’로 발전하여 ‘비스듬히’를 보완하고 진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시 ②는 순우리말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앞의 말들을 뒤의 말들이 발전시키면서 행이 이루어진다. 낱말들끼리 잇대어지면서 그 낱말에서 풍기는 감성이 점층적인 화음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처음에는 비가 “무청처럼 간조롱히” 뿌리다가, “나비 재며 한 냥쭝 두 냥쭝” 날리다 “볕뉘처럼 움튼”다. 그리고 다시 그 비는 “새들새들 저물”어간다. 우리말이 점층적으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풍경과 정서를 불러온다.
이처럼 시는 순우리말을 통해 그 활용도를 최대한 높여 감각적으로 다가오게 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우리말을 많이 모아야 한다. 시인이 우리말에 대한 관심 없이 시를 쓴다면 제대로 된 도구 없이 밭일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시인은 우리의 생활로 돌아가서, 그 생활 속에 사는 사람들이 쓰는 살아 있는 우리말들을 모으고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시란 언어의 나무이다. 줄기가 시인의 의도라면 말들은 나뭇잎이나 가지처럼 이리저리 뻗친 색색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토양에서 자란 언어의 나무가 외국산보다 우리 색깔의 언어를 달고 있다면 그 나무는 훨씬 감각적이고 풍성한 정서를 유발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을 소중히 한다고 해서 이미 죽어버린 사전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는 언어를 꺼내 쓰는 것은 주의해야 할 일이다. 말이란 생명이 있어서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또 변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이다. 순우리말만 고집한다면 우리끼리의 정서에 매몰될 수 있다. 언어는 항상 공시적이다. 이러한 언어의 특성을 무시한 채 시를 쓴다면 우리 시는 세계문학사에서 고립되고 말 것이다. 모든 문화가 신속하게 교류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말도 이제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와 교류하고 경쟁해야 한다. 그 언어와 어울려야 한다. 따라서 굳이 시에서 외래어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세계의 언어들이 시에서 서로 섞이고 뒹굴기를 바란다. < 가운데 줄임 >
[연습 1] 순우리말을 아는 대로 써보시오. 특히 부사나 형용사로 된 말들을 모으고, 그 쓰임을 감각적으로 엮어보시오.
[연습 2] 순우리말로 한 장면의 풍경을 행과 연으로 짜보시오. 단 그 말들이 또 다른 단계로 점점 나아가는 정서를 포현해주는 우리말을 끌어와 배열해보시오. 뜻이 아닌 정서적인 표현을 찾되 말들 사이에 상상의 공간이 있도록 배열하시오.
[과제 3] 다음 자료로 순우리말로 된 시를 써보시오.
① 가까이, 혹은 멀리
② 내 마음 속에는 하느님이 둘이야.
③ 냉장고에서 머리를 꺼내다
④ 그렁하다
⑤ 투우사
⑥ 그악하다
⑦ 고독이 매달린 나뭇가지
⑧ 살얼음의 말
⑨ 애먼
⑩ 콜록, 쿨럭
⑪ 소소하다
⑫ 달, 어머니의 눈
⑬ 고요를 잃어버린 심장
⑭ 희뜩하다
⑮나무들의 경주
⑯ 메슥메슥, 머쓱머쓱
⑰ 뚱하다
⑱ 귀중중하다
⑲ 처끈처끈하다
⑳ 전단지가 나비로 날아요
< ‘언어적 상상력으로 쓰는 시 창작의 실제(전기철, 푸른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0.11.11.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15) 언어의 집 만들기 - ② 우리말로 상상하기/ 문학박사 전기철|작성자 화룡이의 행복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