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마태복음 9장 9절
텃밭에서 자라는 꽃들입니다. 6월에 자라는 꽃들은 정말이지 생명의 기운들이 화사합니다. 여름을 맞을 준비하듯 강열한 태양을 정열적으로 맞을 준비를 하는 듯 합니다. 금계국은 국화과인데 <상쾌한 기분>의 꽃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금낮달맞이는 심은지 4년이 넘었는데 이제는 텃밭 입구 꽃밭의 주인입니다. 낮에 떠오른 달 같지요. 무언의 사랑, 자유로운 사랑, 깊은 애정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텃밭 안쪽에 있는 수레국화는 일하시는 분들의 정신적 휴식처입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화사한 꽃들은 언제나 주목받는 자연의 주인공들입니다. 단 한 번도 이 꽃들이 꽃 되게 하는 땅과 뿌리들에 카메라맨들은 시선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카메라맨들이 시선을 주지 않는다해서 그 중요성이 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현주 목사님께서 쓰신 <뿌리가 나무에게>라는 시를 보면 뿌리가 나무에게 건네는 절절한 사랑이 가슴을 촉촉이 적십니다.
네가 여린 싹으로 터서 땅 속 어둠을 뚫고 태양을 향해 마침내 위로 오를 때
나는 오직 아래로 아래로 눈먼 손 뻗어 어둠 헤치며 내려만 갔다
네가 줄기로 솟아 봄날 푸른 잎을 낼 때 나는 여전히 아래로
더욱 아래로 막힌 어둠을 더듬었다
네가 드디어 꽃을 피우고 춤추는 나비 벌과 삶을 희롱 할 때에도
나는 거대한 바위에 맞서 몸살을 하며
보이지 않는 눈으로 바늘 끝 같은 틈을 찾아야 했다
......
모든 시련 사라지고 가을이 되어 네가 탐스런 열매를 가지마다 맺을 때
나는 더 많은 물을 얻기 위하여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다.
나무의 찬란한 꽃과 열매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치열한 삶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이런 하찮아보이고 흔해보이는 때로는 눈에 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도 않는 것들 때문에 삶이 지속되는지도 모릅니다.
아름다운 글들은 위대한 정신입니다. 지난 주 김경윤 집사님 소개로 책 한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젊은 날 한참 잘나가며 다국적기업에서 일하던 한사람이 홀연히 모든 자리를 사직하고 태국 밀림의 스님으로 살다가 17년 만에 승복을 벗고 대중속으로 다시 들어와 평범한 사람으로 살다가 루게릭병을 얻어 돌아가신 한 스님의 이야기입니다. 제목부터가 무척이나 강하고 인상적입니다. 책 내용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고 이렇게 짧은 한문장안에도 사람을 구원하는 철학과 인생의 깊은 내공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장 하나조차도 글씨가 아닌 여백이 없으면 우리는 이 글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글자와 글자 사이에 전혀 공간과 여백이 없으면 글을 읽을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흰 종이의 여백, 글자와 글자 사이의 공간들, 전혀 효용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그 존재 자체도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없는 것들이 이 정신과 같은 글자들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을 읽으면서도 같은 걸 느낍니다. 마태복음 5-7장까지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소개하는 마태는 이어 8장부터 다양한 예수님의 기적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로마군대 지휘관의 하인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중풍병 환자를 고치시고 12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을 고치시고 눈먼 소경을 고치시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9장까지 쭉 나옵니다. 사실 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평생을 지병을 앓고 있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예수님을 만나 병 고침을 받는 매우 극적이며 생의 드라마틱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과 교회에서는 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극적인 이야기들에 비추고 <줌 인>해서 그 이야기를 매우 디테일하게 묘사하며 드라마틱하게 소개해 줍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야기 사이사이를 보면 마치 정신을 받치고 있는 여백과 같은, 꽃과 줄기를 받치고 있는 뿌리와 같은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여러분들도 살아보시지만 삶이라는 게 본문의 이야기에 나오는 극적인 기적이야기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어느날 갑자기 극적인 드라마처럼 기적같은 삶이 펼쳐지는 일은 참으로 좋고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병이 나았다고 삶의 모든 것이 해결됩니까? 아닙니다. 다리 아플 때는 다리 아픈 걸 핑계되면서 쉴수라도 있지 다리가 나으면 <건강한 몸이 되었으니 나가서 돈도 벌어와야해요> 눈이 안보일 때는 안보이니까 싸울일도 없어요. 그런데 먼지가 보이고 지저분한게 보이고 시궁창같은 방이 보이면 갈등이 시작되는 겁니다. 아파서 누워있었을 때는 아픈 몸에 집중하느라 아무 것도 신경쓸 틈이 없었는데 건강해지니 늦게 들어오는 딸과도 싸우게 되고 게임하는 아들과도 싸우게 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아내와도 남편과도 자꾸 충돌하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굵직굵직한 기적이야기는 이야기로써의 극적인 체험으로써의 드라마틱한 감동은 주지만 변화무쌍한 일상안에서 매일매일의 또다른 도전앞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나병환자의 병을 고치고 백부장의 종을 고치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그 이야기 다음에는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하는 한 율법학자의 고백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거쳐를 옮겨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또 그의 뒤를 따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고 중풍병자를 고친 이야기 뒤에는 또 예수님께서 떠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를 만나고 또 그 마태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12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을 고치시고 눈먼 소경을 고치시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고 난 그 후 열두제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역시 적지 않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드라마틱한 기적이야기 사이사이에 마치 위대한 정신을 떠받치고 있는 공간의 여백들처럼, 줄기와 꽃들을 받치고 있는 뿌리들처럼 기적의 이야기를 받치고 있는 진정한 기적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매일 다시 일어서서 예수를 따랐다는 고백입니다. 넘어지고 넘어지고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섭니다.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하지만 다시 일어서서 예수를 따라갔다는 마태가 생각하는 드라마틱한 기적이야기를 떠받치고 있는 진정한 삶의 기적이야기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그 스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그분이 17년 동안 수행을 하시고, 면벽 수행을 하시고, 매일아침 새벽 3시에 일어나 명상하시고 하루에 한끼 아침에 공양한 것으로 욕심을 다스리고 절제하고 중심잡고 자그마치 17년이라는 세월을 수행하면서 사셨던 분이 어느날 환속을 결심합니다. 수님이 되기로 결심하셨을 때 들렸던 내면의 음성과 같은 그런 음성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오셨으면 자그마치 17년을 수행하셨으면 누구보다도 떡하니 잘 사셨어야하잖아요. 그런데 1년 6개월동안 우울증에서 빠져나오질 못하십니다. 십수년동안 스님이라는 옷을 입고 그렇게 삶이 조건화되면서 그것에 존재의 의미를 느끼면서 사셨던 분이 하루아침에 자기가 사라져 버린 겁니다. 돈없이 사셨던 분이 움직이면 다 돈인 현실앞에 속절없이 내면이 무너집니다. 그분이 그때의 불안감을 <살면서 몇 번 겪기 어려운 두려움과 걱정으로 거의 실신할 것 같은 극도의 불안감>이라 표현합니다. 내가 누구지 여긴 어디지 그랬던 겁니다. 그렇게 수행하고 수련하면서 도를 닦으셨던 분도 넘어지고 자빠지고 쓰러지는 게 삶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속에서도 부단히 다시 일어서서 진리를 추구하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기적이야기 틈새사이에 기적이야기들이 진정한 기적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받쳐주고 있었던 <마치 글자의 여백같이 줄기와 꽃을 받치고 있던 뿌리처럼> 진정한 기적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어나서 예수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송해 선생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종로에 가면 송해길이 있다고 합니다. 종로구에서 구민들의 요청에 의해 세워진 송해 선생님을 기억하는 길들랍니다. 그것도 송해 선생님 살아생전에 동상이 자그마치 두 개나 될 정도의 거리랍니다. 그분이 40여 년 동안 전국을 유랑하면서 많은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40여년이면 얼마나 많이 변합니까? 우리도 살아보지만 우리도 우리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 연세에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경험했겠습니까? 근데 한 기자의 시선에 의하면 그분은 매 전국노래자랑때마다 올라오는 그분들을 이해하고 호흡하고 그분들과 함께 흥겹게 즐기고 싶어서 끊임없이 자기를 업그레이드했다는 겁니다. 상대를 알기 위해 노력했다는 거죠. 매일 매일의 기적의 주인공인거죠. 그분이 떠난 뒷자리에 성소수자분들이 걸은 현수막입니다.
2018년 한국방송 <대화의 희열>에 출연한 송해 선생님은 퀴어문화축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거기 가면 정말 발 디딜 데가 없어요. 새로운 문화가 되었다고. 옛날 같으면 어른들한테 혼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나와서 박수도 쳐주고… 어르신들이요. 그러니까 거기 가서 배울 게 또 많아. 젊은이들의 세계에, 야, 이런 변화도 우리가 한번 체험을 해보는구나. 그러니까 참 기분이 좋습니다.” 사람을 관념으로 대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면서 이해와 소통과 변화와 사랑의 관점으로 다가간거죠.
감리교, 기독교의 정신은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기에 진보적이며, 소수의 특권과 독점을 거부하기에 개방적이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기에 포용적이며, 개인의 안위에 머무르지 않기에 사회적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 매일매일의 실패와 좌절을 격려하며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은 삶의 거룩한 신비요 참다운 일상의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이 한주간동안도 함께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