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빨강이나 초록과 같은 색채와 명암, 견고성과 부드러움, 온기와 냉기 등에서 물체세계의 현시를 인식하고 진실과 선함인 것에서는 정신세계의 현시를 인식한다(신지학, 2020, 71)."
정신세계는 눈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경우 공상이나 망상으로 취급된다. 필자도 정신세계를 공부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슈타이너의 책을 통해서 정신세계를 공부해보니 필자가 어느 수준, 그 수준에 오르면 슈타이너의 이야기가 이해가 되었다. 이런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으므로, 만약 슈타이너가 정신세계에 대하여 쓰지 않았다면, 이 의문을 어디서 풀었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또 슈타이너가 생전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했는지도 이해가 간다. 그 정도로 인간의 정신세계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동안 지구를 다녀간 많은 성인들을 살펴보면, 인간의 어느 부분, 한 부분을 풀어서 설명해 놓았다면, -물론 한 부분을 통하면 다른 부분도 모두 이해가 되기는 할 것이다- 슈타이너는 이런 인간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서 하나의 퍼즐로 맞춰놓았다. 누구든 정신세계를 공부하고 싶다면 슈타이너의 책을 권한다.
위 문장 또한 그렇다. 위 문장도 필자의 수준, 정신세계의 수준이 되어서야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인간은 물체세계와 정신세계 두 부분에 거주한다. 물체세계는 드러나므로 누구나 인식한다. 예컨대 빨강과 초록과 같은 색채와 명암, 견고성과 부드러움, 온기와 냉기 등에서 인간은 물체세계의 현시를 경험한다. 그냥 경험할 수가 있다. 반면 진실과 선함은 정신세계의 현시로 이를 인식하는 정신기관이 발달해야 한다. 물론 그냥 진실과 선함을 인식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인간의 내부에서 인식하기 때문에 그 인식 정도가 개인마다 다르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많은 상태의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궁극적인 원인은 인류가 제공했다. 인간의 정신을 배제하고 외부에서 교육을 통하여 인간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이 진실과 선함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럴려면 인간의 정신이 발달해야 하는데 오히려 말살시켰으니, 인간이 어떻게 진실과 선함을 받아들이겠는가. 현재의 상황을 보면 절대 성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신기관이 발달하도록 하지 않고, 정신기관을 무시하고 배제하여 인류가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인류가 선택하였으므로 작금의 상황도 개개의 인간들에게 책임이 있지 않다고는 생각되나, 하지만 그 결과를 개인이 책임져야 하므로 안타까운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개인이 통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결론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작금의 상황을 보면 진실과 선함의 기준이 개인마다 다르다. 이는 진실과 선함에서 정신기관이 현시를 보지못하기때문이다. 즉 정신기관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조금 과장하면 누구도 믿을 수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진실과 선함에서 인간의 정신기관이 발달하여 정신세계의 메세지를 받는다면,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생각하므로 인간의 범위를 절대 넘지 않는다.
인간은 물제세계에서 정보를 얻고, 정신세계에서도 정보를 얻어서 두 정보를 종합, 판단해서 살아간다. 하지만 정신기관이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정신세계에서 오는 정보는 얻지 못한다. 정신세계에서 오는 정보는 물체세계의 본질이다. 물체세계는 다만 형상일뿐, 본질은 아니다. 물질의 본질을 본다면 형셩색색 변하는 물체세계를 꿰뚫어 볼수가 있다. 당연히 물체세계를 살아가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불가에서는 이 경우를 '꿈을 꾼다'고 표현한다. 꿈에서 깨면 더 이상 꿈속의 일을 고민하지 않듯이 꿈에서 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신기관이 발달하면 꿈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수가 있다. 따라서 꿈에서 깨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정신은 각각의 단체마다 그 표현이 다를 뿐 궁극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은 같다. 하나의 기둥을 놓고 그 표현방법이 다만 다를 뿐인 것이다.
문제는 어떤 방법을 선택하던지 자신의 정신기관을 발달시키기만 하면 된다. 되풀이 하지만 정신기관이 발달한 만큼 꼭 그만큼의 사물의 본질을 볼 수가 있다. 예를 들어서 요즈음 이슈가 되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이전하는 문제도 깊은 곳에는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자리잡고 있다. 그들이 살려면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단순히 홍범도 장군의 이전 문제가 아닌 것이다. 언젠가는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겠지만,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야 우리 민족의 미래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를 달리 말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정신기관이 발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정신기관을 발달시키는 방법이다. 정신기관이 발달할려면 먼저 정신을 인정하고 정신을 파악할려고 해야 한다. 정신은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둘째, 어떤 문제라도 '왜 그럴까', '그 이유가 뭘까'를 진지하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정신이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정신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고, 하지만 물질의 근원이 정신이기 때문에 물질이 있으면 어디에도 정신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이렇게 의문을 가지고 정신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부분 부분으로 존재하는 의문이 하나로 맞춰져서 그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자신의 정신을 깨우는 방법이다. 질문을 던지면 질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서 잠을 자던 정신이 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꾸준히 하면 반드시 정신을 발견한다. 지구에서 사는 인간의 삶이란 정신을 발달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 슈타이너의 주장이다.
정신의 속성은 물체세계의 법칙과는 다르다. 물체세계는 눈으로 봐야 파악하고 또 계속 연습해서 익혀야 하지만, 정신세계는 내가 원하면, 간절한 만큼 그 원하는 대상이 내게 가까이 온다. 이 경우를 정신세계에서 보내는 통지를 내가 받을 수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정신세계에서 통지가 오더라도 내가 받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정신세계는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나에게 가까이 온다. 그 때 내가 그 대상으로부터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야 하는데, 이때 그 대상이 나에게 어려움을 줄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변하는데 쉬울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 때 내가 그 대상을 밀어내면 그 대상은 당연히 사라지고, 나는 나의 부족한 점을 채우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시 나는 정신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한 단계 낮은 단계에서 삶을 살게 된다. 아마도 지구에서의 삶이 이와 같은 경우의 연속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서 필자가 중요하게 느낀 점이 있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따라주기 바라는 경우, 간섭을 하는 것이다. 이때 그 바라는 상대방은 정신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언이 필요하면 그냥 조언을 해주면 되는데, 상대방이 '넌 이렇게 해야되라고 한다면 바라는 상대방의 정신이 발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의 속성 그 근간은 자유에 있다. 이 말은, 정신을 내가 선택해야 정신이 받아들이고 발달한다는 말이다. 상대방이 이렇게 해야되라고 한다면, 나의 정신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바라는 상대방의 정신도 정신의 속성에 근거할 터, 이렇게 해야되라고 강요한다면 그 자신의 정신도 발달하기 어려운 것이다. 정신의 수준이 높아지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간섭하지 않게 된다. 정신이 발달하면 할 수록 정신의 속성에 따르기 때문이다.
정신은 창조의 근원이다. 정신이 있다면 어디든지 창조가 이루어진다. 생각해 보면, 악기를 연주하더라도 그 곡의 본질을 파악한다면 창조적인 연주가 이루어진다. 이 경우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도 있고, 연주하는 사람도 즐거울 것이다. 정신이 드러나는 것만도 즐거운데 정신이 창조에까지 이른다면, -정신이 자유롭기 때문에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얼마나 즐겁고 기쁜지 짐작할 수가 있을 듯하다. 정신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에 창조에 까지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내부를 꾸준히 관찰하다보면 계속 의문으로 생각했던 것이 하나 둘 모여서 그 답이 드러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정신이 깨어나는 것이다. 이는 정신의 모습이 삼라만상에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 의문이 결국 같은 의문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정신기관이 발달하도록 언제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