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30) 시는 어디서 오는가 – 시적 발상을 중심으로 6-1/ 계명대학교 문창과 교수 장옥관
시는 어디서 오는가
네이버 블로그 - 단샘의 영성일기/ 시적 발상과 기법
시적 발상을 중심으로 6-1
시는 어디서 오는가. 이 오묘한 비밀을 한국 시사에서 맨 처음 언급한 이가 박용철이다.
그에 따르면 한 편의 시는 시인의 생리적 요구에 의해 필연적으로 탄생하는데 생리란 육체·지성·감정·감각 등의 총합을 일컫는다.
한편 정현종은 시의 발생 지점을 시인의 역동적인 내면공간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는 시인의 상상력·의식·지성·감정과 정서·무의식·몽상 등이 통합되는 극적인 순간에 시가 빚어진다고 보았다. 어느 쪽이든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신비로운 과정을 통해 생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견해가 일치한다.
기실 시는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낳을지언정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 미묘한 시 창작의 비밀을 이론화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하지만 시를 배우고 가르치지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론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주어진 틀에 억지로 뀌어 맞춘 이론을 위한 이론이라는 비판이 예상되지만 그럼에도 이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사정이 여기에 있다.
시 창작 과정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범주화하면 다음과 같다.
원천적 단계와 의미화 단계, 형상화 단계가 그것이다.
원천적 단계는 시 쓰기에 앞서 갖춰야 할 기본 자질이나 준비 사항을 말한다.
이는 선천적·후천적 차원으로 나눌 수 있는데, 시 장작 방법론에서 다룰 수 있는 부분은 교육에 의해 계발될 수 있는 후천적 차원에 한정된다.
독서와 체험, 사색 등이 이 범주에서 다룰 내용이다.
의미화 단계를 다른 말로 하면 시적 발상, 혹은 시적 인식 갖기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의 알맹이를 이루는 것이 시적 인식이다.
발견, 깨달음, 절실한 감정 따위가 그 주된 내용이다.
알맹이가 있어야 시를 쓸 수 있지 않겠는가. 하긴 알맹이 없는 시가 시중에 많이 나돌고 있다.
그럴듯한 말로 곱게 치장하거나, 생경한 관념을 날것으로 가져오거나, 아이디어 그 자체로 만든 시를 좋은 시라고 여기는 풍토가 퍼져 있다.
몰가치적인 사적 감정을 세련된 방법으로 교묘하게 포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이런 병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적 인식의 개념을 명료하게 가져야 한다.
형상화 단계는 시적 인식을 언어 표현을 통해 실현화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시적 언술 방법과 구성 및 시상 전개 방식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어쩌면 형상화가 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발상이 언어의 옷을 입고 구체적인 작품으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 하더라도 시적 인식이 충실하지 않으면 좋은 시를 얻기가 어렵다.
한정된 지면 관계로 원천적 단계나 형상화 단계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의미화 단계의 시적 인식에 관해 알아보려고 한다.
식물로 치면 종자이고 사람의 얼굴로 치면 눈동자에 해당하는 것이 시적 인식이다.
시적 인식의 핵심은 감수성, 관찰, 상상력이다.
① 감수성 기르는 방법
우리가 시 쓰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경우는 대개 인상적인 느낌을 가질 때이다.
인상적인 느낌이란 아름다운 자연, 극적인 사건, 감동적인 장면 등에서 갖게 되는 심리적 충격을 일컫는다.
하지만 이런 충격이 자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대수롭잖은 장면에서도 깊이 느낀다.
감수성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감수성은 말 그대로 느끼는 능력이다.
감수성은 천부적이라 할 수 있으나 훈련에 의해서도 길러질 수 있다.
감수성을 기르는 방법은 느낌을 강화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우선 일상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 중 자신을 사로잡는 한순간을 포착해보자.
‘햇살이 눈부시다’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 오감을 통해 그것을 음미해 본다.
그러면 햇빛의 찬란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 다음 햇살이 어떻게 환한지 느낌을 구체화해 본다.
‘햇살 속에 유리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찌푸린 미간 때문에 눈썹이 다 없어질 것 같네’와 같이 비유적으로 그 느낌을 되새겨 본다.
이런 행동은 대뇌에 느낌을 각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감각적 체험을 자주 하다 보면 자연스레 감각에 깊이가 생기고 남들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시인들의 감각은 아주 예민하다.
작품을 통해 감각의 촉수를 직접 느껴보자.
㉮ 시각을 통한 대상 파악
광명에도 초박의 암흑이 발려 있는 것 같다.
전깃불 환한 실내에서 다시
탁상용 전등을 켜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분명, 한 꺼풀 얇게 훔쳐 감추는 휘발성분 같은 것
책이나 손등, 백지 위에서 일어나는
광속의 투명한 박피현상을 볼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이 때로 한순간 살짝 벗겨내는
그대 이마의 어디 미명 같은 그늘,
그런 아픔이 있다. 오래 함께한 행복이여.
―문인수, 「그늘이 있다」
시인은 “전깃불 환한 실내에서” 탁상용 전등을 켤 때 일어나는 미세한 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
‘광명’이라는 환한 빛에 발려져 있는 ‘초박’의 ‘암흑’을 발견하는 날카로운 감각.
시인은 이 놀라운 발견을 인간의 문제로 옮겨놓는데, “광명에도 초박의 암흑이 발려 있다”란 구절을 음미해 보면 남부러울 것 없이 다 갖춘 사람의 표정에 깃든 엷은 우수를 떠올리게 된다.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꺼풀 얇게 날아가는 휘발 성분”이나 “광복의 투명한 박피현상”을 수심이 늘 가득한 아내 이마의 ‘그늘’을 “사랑한다,는 말”로 벗겨내는 에피소드로 연결한다.
㉯ 청각을 통한 대상 파악
꿩은 목구멍에 무엇이 걸렸는지
꿔엉 꿔엉
야단이다
미련하긴 작년 봄에도 그래 놓곤
토해
붉은 진달래
노란 민들레
등 밀어주는 봄바람 믿고
상습적이라니까
―함민복, 「꿩」
유종인 시인은 「팝콘」이라는 시에서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속을 뒤집은 게 꽃이라고 말했다.
위 시에서 ‘꿩’이 “목구멍에 무엇이 걸”린 것처럼 ‘꿔엉 꿔엉’ 우는 것도 같은 까닭이 아닐까.
그렇다. 꿩들이 ‘꿔엉 꿔엉’ 울어대는 것은 속에서 치밀어오는 뜨거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봄에 꽃들이 마구 피어오르는 것도 대지의 속이 뜨겁게 끓어오르기 때문이겠다.
적막한 봄 들판에 쩡쩡 울려 퍼지는 꿩 울음소리. 그 인상적인 느낌을 시인은 이토록 예민한 청각으로 포착했다.
꿩들이 울음 토하듯 붉고 노란 꽃들이 다투어 피어오르는 ‘야단’ 법석의 봄날.
그 미친 불길의 정서를 이토록 절실하게 그려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 ‘유쾌한 시학강의(강은교·이승하 외 지음, 아인북스, 2015)’에서 옮겨 적음. (2020.11.26.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30) 시는 어디서 오는가 – 시적 발상을 중심으로 6-1/ 계명대학교 문창과 교수 장옥관|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