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평범범(平平凡凡)한 모습이다. 무엇 하나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 한 군데 꾸민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보다 더 심상(尋常)한 것이 없다. 전혀 하(下)치의 물건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범범(凡凡)하고 파란(波瀾) 없는 것, 꾸밈 없는 것, 사심(邪心) 없는 것, 솔직한 것, 자연스러운 것, 뽐내지 않는 것, 그것이 어여쁘지 않고 무엇이 어여쁠까.” 세계적인 동양미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우리의 막사발을 두고 이같이 극찬했다.
‘막’ 생겨 먹은 듯, 평범하고 소박한 그릇 막사발. 수려한 형태도, 화려한 빛깔도 아니지만 그 속엔 자연의 기운이, 인간 삶의 이치가 은은하게 투영되어 있다. 한 점 욕심 없이, 자연을 범하지 않는 마음가짐으로만 진정한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막사발.
날렵한 맵시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잿물(유약)이 매끄럽게 발린 것도 아니지만, 은은하고 소박한 그 기운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든다. 부드러운 곡선, 붉은 듯 신비로운 비파색(枇杷色:노란색 계열로 연한 붉은색, 살색, 황토색, 회청색이 감도는 색), 생동감 넘치는 손자국, 단숨에 거침없이 처리된 굽의 당당함, 이슬 방울이 맺힌 듯한 매화피(梅花皮:그릇 굽 부분에 생기는 작은 물방울 모양의 결정)의 선명함…. 그 자태, 볼수록 오묘하다.
‘막’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서 느낄 수 있듯이, 사실 막사발은 지금까지 그닥 주목받지 못했다. 막사발의 ‘막’은 ‘마구’의 준말이다. 그 말은 ‘앞뒤 헤아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거칠거나 품질이 낮은’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막가다, 막걸리, 막깎기, 막일, 막말, 막되다, 막벌이꾼, 막살이, 막잡이 등에 붙은 ‘막’과 같은 뜻이다.
‘막사발’이라는 말은 도자기를 종류별로 분류하여 붙인 고유한 명칭이 아니라, 그릇을 쓰는 과정에서 생겨난 명칭으로 보인다. 청자, 백자, 분청사기처럼 고유한 명칭과 용도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용도를 달리하며 다양하게 사용된 데서 붙은 이름이라는 것이 막사발 연구자들의 견해이다.
새것일 때에는 밥이나 국을 담는 그릇이었다가, 오래 되어 때가 묻고 금이 가면 막걸릿잔으로 쓰였다가, 더 험해지면 개밥그릇도 되었다가, 완전히 깨지고 조각이 나면 결국 흙에 묻히고 마는, 서민들의 생활잡기를 통칭하는 것이다.
청자, 백자, 분청사기가 그 시대 지배계층의 상류문화를 대표하는 그릇이었다면, 막사발은 하층민의 문화를 상징하는 그릇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무시하고 냉대했던 막사발이 일본에서는 최고의 아름다운 자기로 인정받고 있으니, 놀랍고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막사발은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다른 여러 종류의 사발들과 함께 ‘고려차완(高麗茶碗)’으로 통칭되면서, 16세기 무렵부터 이미 일본 무사들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의 막사발은 일본으로 건너가 ‘찻잔’으로 사용되며 ‘이도차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현재 쿄토(京都) 다이도쿠샤(大德寺)에 보존되어 있는 조선 막사발 ‘기자에몬이도’가 일본 국보로 지정된 것을 비롯하여, 일본이 소장하고 있는 2백여 점의 막사발 중 일급 보물이 3점, 중요 문화재로 등록된 것만도 20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그 역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전해지는 ‘명품’이라 불리는 것도 70여 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다도(茶道)가 정립되면서 막사발은 명예나 부의 상징이 되었으며, 훌륭한 막사발은 성(城)과도 바꾸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막사발. 왼쪽부터 차례대로 15~16세기, 17~18 세기 19세기 막사발이다.
1 아오이 도차완 '토기정호' 조선시대 16세기 도교국립박물관 소장.
2 오오이도치완 조선시대 16세기 도교국립박물관 소장.
3 하케매차완 '송본' 조선시대. 마츠이문고 소장.
그렇다면 이렇게 일본인들을 매료시킨 막사발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막사발의 아름다움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보다 막사발의 아름다움은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데 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닌 자연이 만든 것이다. 흙과 불과 물이 조화된 자연 그대로의 그릇이다. 거친 듯 투박한 듯 소박한 느낌의 막사발은 태토(胎土:자기를 빚기 위해 처음 배합해 만드는 흙)를 만지는 일부터 시작된다. 막사발 특유의 비파색 또한 잿물보다는 흙 자체에서 얻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막사발의 태토는 어느 특정 지역의 흙으로 빚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아직 그 특정 지역에 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오늘날 옛 막사발의 재현을 시도하는 작업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도 바로 이 흙을 재현하는 일이라 한다. 즉 막사발은 우선 흙을 알고, 흙을 느껴야 빚을 수 있다는 얘기다.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막사발의 기운은 흙에서 잉태되는 것이라 하겠다.
가마에 불을 지피는 과정 역시 하늘의 뜻을 따르는 일이다. 밑불이 세면 굽이 갈라져 터지고, 중불이 세면 중간이 터지고, 상불이 강하면 그릇의 위쪽이 갈라진다. 시종일관 적당한 세기의 불을 땔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곧 중용의 도를 실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막사발 굽 주변 밑부분에 물방울 무늬처럼 맺히는 매화피 부분은 또 어떠한가? 이는 물이 불의 온도에 따라 불규칙하게 녹아 응결되어 나타난 것으로, 그 독특한 형태가 예술이다. 사람의 손길로 인위적으로 만든다고 절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인간의 준비를 끝마치고 조용히 자연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바로 막사발을 빚는 일이다. 막사발을 완성시키는 과정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진리를 깨치게 하는 일이다.
오늘날 많은 도공들이 그 평범한 그릇, 막사발을 재현하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지만,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긴, 평범하게 생긴 막사발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 조상들이 막사발을 구울 때는 그야말로 욕심이 없는 상태에서 구웠을 것이다. 그저 서민들이 밥을 먹기 위해 그것을 빚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굽는 사발은 무아무심(無我無心)의 상태에서 빚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에는 기교도 없고 터득도 없다. 감히 ‘노리고 만든’것일 수 없다.
“인위로 만들려 하지 마라. 그것은 추하다. 자연을 범하려고 하는 짓은 바보짓이다. 지(知)는 개인에 속하지만 본능은 자연에 속한다. 본능은 불식(不識)이면서 다식(多識)이다. 본능이야말로 지혜보다 더 나은 지혜가 아닌가. 막사발은 숨어 있는 경탄할 자연의 지혜로 생겨난 것이다. 자연의 예지가 거기에 가담하고 있다.”
막사발을 빚는 많은 도공들은 말한다. 막사발은 흙의 배합에서부터 성형, 잿물을 바르는 일, 가마에 불을 넣는 일까지 온전히 자신과 마음과 작품이 하나가 되어야 가능하다고 말이다.
꾸밈이 없는 것, 사심이 없는 것, 자연을 범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자기를 버린 것이어서 성불(成佛)한 것이 막사발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단순한 그릇이겠는가? 그것은 부처다. 부처의 마음이다.
日서 꽃핀 '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
막사발이란 사발에 접두사 ‘막’이 붙은 생활 잡기(雜器)들의 통칭인데, 그것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번듯했을 때는 밥그릇으로 대접받다가 이가 빠지면 토방 끝의 개밥그릇으로 내려앉고,
더 깨어지면 울타리 밖으로 내쫓기어 사금파리로 조각났다가 흙 속에 묻히고 만다.
그런데 막사발 모양을 한 조선의 모든 그릇들이 그처럼 ‘막’ 사용되었던 것일까?
깨지고 나면 길바닥에 개똥처럼 뒹구는 잡기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16세기 중반 경상도 남쪽 해안지방에서 만들어진
막사발 꼴을 한 수수께끼의 그릇들 만큼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일본 차인(茶人)들도 그 사발에 관해서는 이도차완(井戶茶碗)이라 부르며
대명물(大名物)로 추앙하고 있는데, 일본의 세계적인 동양미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悰烈)는 ‘천하의 명기(名器)’라며 헌사를 아끼지 않았다.
‘범범(凡凡)하고 파란(波蘭)이 없는 것, 꾸밈이 없는 것, 사심(邪心)이 없는 것,
솔직한 것, 자연스러운 것, 뽐내지 않는 것, 그것이 어여쁘지 않고 무엇이 어여쁠까.’
저자는 재현이 불가능한 이도차완의 수수께끼를 기행문으로 풀어 가고 있다.
조선에서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탄생한 그것을 언제,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지,
왜 일본으로 건너갔는지 신비에 쌓인 이도차완의 진실을 경남 일대와
일본 현지 답사를 통해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 일본 무사들은 차회를 열어 이도차완에 담은 차를 한 모금씩 돌려 마시며
서로에 대한 신뢰와 유대를 확인했다.
이도차완이 16 세기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유출된 배경을 저자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일본 장수인 오다 노부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차회(茶會)에서
이도차완을 이용하여 상명하복의 충성심을 키우기도 하고 권력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저자의 탐사는 ‘이도(井戶)’라는 명칭에서부터 집요하다.
일본의 학설들을 반박하며 새미골이란 지명으로 불리는 곳의 가마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도라는 이름이 명명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경남 사천시 사남면 일대가
이도차완의 원적지라고 추정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점은 이도차완이 서민용 밥그릇이라는 야나기의 주장을 반박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종교적인 경지까지 승화된 이도차완의 격조로 보아 사기장과 승려들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원래 용도는 승려들의 밥그릇인 발우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이도차완의 밑부분 원형은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이며,
굽 밖의 오돌토돌한 매화피(梅花皮)는 석가모니불 당시 발우를 놓을 때
그 자리에 종교적 의례로 물을 뿌렸듯 물방울을 형상화한 상징이라고 하는데,
저자의 놀라운 직관이자 상상력의 소산으로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드라마틱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날이 갈수록 드높아지는 요즘이다.
그러나 이도차완처럼 우리 스스로 망각한 역사는 없었는지 자성의 목소리도 커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조선 막사발의 진면을 복권시켜준 이 책이 그런 계기를 만들어줄 것으로 확신하며
교토시 대덕사(大德寺) 고봉암(孤蓬庵)에 보관된 이도차완 앞에서 큰절을 두 번이나 올렸다는
저자에게 무언가 빚을 진 느낌이다. 이도차완에 대한 나의 무지 때문이다.
첫댓글 우리가 인식해온 그 막사발이 막사발이 아니군요. 우리의 문화유산 그 가치들을 새롭게 인식하는 또 한번의 계기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