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할머니와 성경책
최동호
추석 대목 지나 발걸음 한산한 돈암동 시장 골목길 게으른 정적이 감도는 하오, 검은 가죽 표지 성경책 바로 옆에 펼쳐 놓고 파뿌리처럼 쓰러져 잠든 할머니 대문짝 활자가
돋보기안경테 밖으로 기어 나와
앙상한 팔다리 웅크린 할머니, 하늘의 품에 안겨, 기도하다 잠든 아기처럼 포근하다
―최동호(1948~ ) ('얼음 얼굴', 서정시학, 2011)
가을 오후의 햇볕 아래였을 것이다. 읽고 있던 '검은 가죽 표지'의 성경책과 팔다 남은 '흰 파뿌리' 사이를 오가다 설핏 졸음 반 잠 반에 든 할머니. 난전 한가운데서 천국에 드신, 파 할머니의 선잠에서 시인은 삶의 수고로움과 노곤함을 엿본다. '한번도 고개를 들어 행인을 보지 않고/ 언제나 구부린 자세로/ 파를 다듬는' 파 할머니의 모습이 삶에 오체투지하는 고단함의 상징이라면, 성경책을 펼쳐놓고 흰 파뿌리처럼 쓰러져 태아처럼 잠든 모습은 고단함으로부터 해방된 구원의 상징 이다 봄 쪽파는 다듬느라 종일 고개를 숙인 채 팔았을 거고, 가을 대파는 간간이 성경을 읽거나 먼 데를 바라보면서 팔았을 것이다. '노파(老婆)'의 '婆'자는 할머니 '파'다. 아리랑 고개, 미아리 고개를 넘어들어오는 돈암동 시장 길목에서 노파는 기운을 북돋는 파를 팔다 풋잠에 들었다. 겨드랑이에도 파 냄새 푸릇하겠다. 잘 익은 파김치가 먹고 싶다.
(시인 정끝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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