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그리스도교사 연구
이 강의는 1992년 2학기 수요성서강좌로 진행된 것으로 다음의 글들은 당시 '청년경동'지에 연재된 것이었다. 글의 가감없이 그대로 올리는 과정에 다소 어색함이 있을 수 있겠으나 오 히려 현장감있게 전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의 이해를 구한다.
첫째시간에는 세계그리스도교사 연구에 대한 총괄적인 서론 부분이었는데, 우선은 그 제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즉, 서양그리스도교사도 아니고 세계그리스 도교회사도 아닌, 세계그리스도교사란 제목에는 목사님이 늘 말씀하시 는 전우주적 그리스도라는 개념이 깔려있는 듯 했다. 흔히 우리가 배우게 되는 서양기독교 사의 교회사 시각을 탈피하여, 서양, 동양, 한국 그리스도교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는 말이다. 예수그리스도교의 복음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어떻게 우리에게 이르고 있는가 를 이해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올바른 신앙과 선교를 재다짐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12주의 강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1. 총괄적 서론 ; 연구의 목적과 방법
2. 원시(초대) 그리스도교의 영적불꽃(주후 33∼ 120) ;
영지주의와 종말론적 재림대망의 신앙문제를 중심으로
3. 고대교회의 성장과 복음증언 (주후 120∼300);
헐레니즘의 토양속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 그리고 교회박해 시대의 카타콤의 신앙공동체
4. 기독교의 공인과 고대교회의 완결 (주후 300∼500);
로마제국의 콘스탄틴황제와 세계최초 교회공의회, 성어거스틴의 참회록과
[신의 도성]
5. 중세기 교회와 수도원 운동의 정신(주후 500∼1000);
라틴적 서방 기독교 신앙형태의 특징
6. 종교개혁 시대의 진통과 혁신(주후 1500∼ 1620)
7. 개혁파교회(장로교회) 신앙전통과 그 복음적 특 성 (주후 1500∼1650) ;
루터와 칼빈의 개혁정신
8. 근세 그리스도교회의 '도전'과 '응전'(주후 1600∼ 1900);
정통주의, 경건중의,합리주의
9. 현대 세계 그리스도교회의 각성과 부흥 (주후 1860∼1990)
10. 11. 한국 기독교(천주교,개신교)의 전래와 그 특징
12. 한국 교회의 부흥과 미래의 과제 ; 그 축복과 문제와 과제
12주간의 강의계획을 듣고 나니, 이 강의를 다 듣고 나면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고있던 부분들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 수 있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청경 회원들에게 꼭 필요한 강의라고 자신있게 권하고 싶어졌다.
1. 원시(초대) 그리스도교의 영적불꽃(주후 33∼ 120);영지주의와 종말론적 재림대망의 신앙문제를 중심으로
원시(초대) 그리스도교의 영적불꽃(주후 33∼ 120)
지난주에 이어 두번째 시간으로 세계그리스도교사의 첫걸음인 초대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공부하였다.
주후 120년은 신약의 마지막 서신이 쓰여진 시기라고 알려진 때인데, 예수님이 죽은 후 부터 이 기간까지를 원시(초대)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3세기 에 비로소 66권으로 정경화되지만 이 시기에 복음서와 서신들이 쓰여졌고 그것이 여러사람 들에게 회람되었다. 삼위일체의 신앙과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원형인 세례 신앙고백문(세례 받을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고백문)이 기틀을 잡은 것도 이 시기이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의 신앙의 전형적인 예라고 한다.
또한, 스테반의 순교와 바울의 회심을 겪으면서 유대교적 민족주의와 종파주의와 율법주의가 우주적 보편종교로서 자기이해를 하게 된 시기도 바로 이 때이다. 그 성령충만한 선교가 로마로 확장되었는데, 이 당시는 종말론적의식이 지배하였고, 영지주 의적인 적그리스도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영지주의란 영과 육을 분리하여 사고하며 영만을 성스러운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당시의 시대적사조와 같은 것이었 다. 그러나, 이 영지주의는 아직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신앙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말씀선교, 성도의 교제, 봉사와 구제라는 3대특징을 가지면서 정립되어갔다.
참고로 이 시기의 주요 세계사를 살펴보면, 네로의 로마통치(54∼68), 중국 후한에의 불교의 전파, 중국 최고의 사전 [설해문자]의 완성(100), 채륜의 종이 발명 (105) 등이 있고, 우리나라는 고구려 신라 백제 가락국이 부족국가의 기틀을 잡아나가던 시 기이다.
원시(초대)그리스도교당시 종말신앙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에 대해 오늘날의 문제와 더불어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종말신앙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신도들의 영웅적 저항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에 대한 신앙이 핵 을 이룬다는 것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종말신앙은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명으로 끊임없이 약동하고 변화하는 일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에 나오는 종말의 날자, 묵시적 숫자, 파멸에 대한 묘사, 재림광경 등은 비본질적인 것이며, 고대세계의 우주론을 반영할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타계주의적이며 탈역사적이며 현세도피적인 종말집단은 반기독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위에서 말한 영지주의의 아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을 전혀 외면하면서, 이 땅의 불의와 모순 -관권선거나 부조리,사기- 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종말과 내세만을 떠드는 것은 이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계속하시던 목사님은 우리나라 교회의 대부분이 날짜만 을 정확히 말 안 한 것이지 이런 내용은 종말론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을 하시며, 인간 의 욕심에 의한 역사적 재앙과 재난, 종말은 있을 수 있어도, 45억년간 지구를 가꾸신 하나님 이 스스로 종말로 파괴하시지는 않을 것이다는 말로 이 날의 강좌를 마무리 하셨다.
3. 고대교회의 성장과 복음증언 (주후 120∼300);
헐레니즘의 토양속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 그리고 교회박해 시대의 카타콤의 신앙공동체
고대교회의 성장과 카타콤의 복음증언(주후 120-250)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던 사도들 이후의 시대이며 고대교회 초기에 해당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는 복음이 헬레니즘 문화의 토양속에 자라게 된 시기이기도 한데 김경재 목사님은 당시의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에 의한 교통, 통신, 언어의 수단을 이용하여 복음이 비로소 전파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설명을 하셨다. 헬라 지성인들 중에서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점점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점점 계속된다. 로마의 트리쟌 황제, 도미티안 황제, 마르쿠스 오렐리우스, 네로 등이 그 대표적인 박해자들이다. 그런 속에서 영웅적인 순교자와 카타콤(지하묘소) 예배 공동체가 생긱게 된다. 우리가 지금도 보게되는 IXO(theta)US(익수스)라는 말은 물고기라는 뜻인데, Iesous Xpistos Oeou Uios Sorter(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의 약자로 그 당시에 카타콤에서는 물고기를 그려놓으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암호였다고 한다.
이 당시의 교회들은 순교자의 피를 바탕으로 서게 되고, 이 교회들 중 중심적인 모교회가 생기며 영향을 증대해 나갔다.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등과 서머나교회, 알렉산드리아교회, 로마교회 등이 그 당시의 모교회 역할을 하던 교회들이다. 이런 교회에는 감독이라고 하는 이름의 교회지도자들이 있었다.
당장에 예수가 재림하여 종말이 올 것이라고 믿던 초대교회의 신앙이 식어가면서 이단종파들이 출현하기도 한다. 이단사상인 에비온파(예수님을 성령을 듬뿍받은 예언자라고 주장), 마르시온파(구약의 공의적 하나님과 신약시대의 사랑의 하나님을 분리하여 생각하며, 바울의 율법적 신앙과 예수님의 순수한 사랑의 종교를 구별), 영지주의파(예수님의 참된 성육신과 참십자가형의 죽음경험과 부활하신 몸을 부인. 영적인 그리스도가 예수의 몸을 빌어 활동을 하다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 다시 빠져왔다는 가현설을 주장. 신령한 지식만을 주장하는 신령파), 몬타누스파(성령에 의한 직접 계시를 주장하며 재림을 주장함. 재림날짜를 정해놓고 기다렸으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음) 등이 출현하여 고대교회를 괴럽히기도 했다.
이 시기의 교회는 몇 가지 유형적 특징을 지니게 된다.
첫째는 소아시아 안디옥 중심의 교회인데, 예수의 활동공간과 가장 가까운 곳인만큼 성서적이며 사도적 전승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후대에 연결되지 못하였다.
둘째는 북아프리카와 로마지역의 교회인데, 법정신을 강조하였고, 예루살렘과 로마를 구별하여 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신앙과 로마로 대변되는 신앙을 구분지었다. 즉, 신앙과 철학, 사회, 문화 등을 구별하였고, 그 결과 인간의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고 구원을 강조하게 되었다. 후에 서방 그리스도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이 정신이다.
4. 기독교의 공인과 고대교회의 완결 (주후 300∼500);
로마제국의 콘스탄틴황제와 세계최초 교회공의회, 성어거스틴의 참회록과 [신의 도성]
기독교의 공인과 고대교회의 완결
세계그리스도교사연구 네번째 시간인 이번 주에는 250년에서 500년사 이에 있었던 그리스도교사중에서 중요한 사건인 니카야공의회와 성 어거스틴에 대해서 공부를 하였다.
로마제국에의한 끊임없는 박해로 수난받던 전 시기에 비해 이 때 박 해가 끝나가고 급기야 313년에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에 이른다. 이 는 그만큼 그리스도교가 성장하였다는 이야기이며, 그 엄청난 박해에도 불구하고 결코 없어 지지 않는 존재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는 가운데, 세계최초로 세계교회 공의회가 열리게 되는데, 당시 로마의 교통통신 수단이 이를 도와줄 수 있었다. 325년 니카야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플회 의, 451년 칼케톤회의 등이 개최되는데, 이 회의들의 주요관심사는 삼위일체론과성령론 등 그리스도신앙에 대한 정리(?), 말하자면 교리에 관한 것이었다.
325년 니카야회의에서는 성경이 정리되어 성경의 토대가 이루어졌고 삼위일체론으로 성부,성자,성령에 대한 헷갈림을 정리할 수 있 었다.
381년 콘스탄틴노플회의 때는 '성령이 무엇이냐'에 대해 논의가 되었 는데, 성령은 바로 주님이시고, 온갖 만물에 생명을 주시는자이며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발현 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그러는 가운데, 395년에 로마제국이 분열했고,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반달족과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멸망하여 세계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다.(이 시기의 우리나라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이 활약하던 시대로 삼국이 힘겨룸을 하며 본격적 국가로 정립되던 시기이다.)
이런 시대상황속에서 성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위대한 신앙인이 출현 하게 된다. 성 어거스틴은 사도바울이후 기독교사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되는 데, 그의 [고백론]과 [신국론 -하나님의 도성]은 매우 유명한 책이다.
그는 354년 북아프리카 다가스테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이방인이 었고 어머니는 유다인이었다. 그런 그의 배경은 그가 플라톤과 히브리의 사상을 융합하고, 그리스도교가 이방인을 포용하고 전파되는데 운명적이었을거라는 것이 김경재 목사님의 설 명이었다.
그는 여러 사상에 심취해 있었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386년에 그 유명한 '회심'을 하게되는데, 그가 쓴 고백론에 의하자면 '나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통회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가 있었습니다.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나는 알피리우스가 있는 곳으로 급히 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알피리우스가 가지고 있던 성경을 읽었는데 그 말씀이 로마서 13장 13~14절이 었다고 한다.
그의 [신국론]은 로마제국의 쇠퇴시기에 쓰여진 책인데, 역사에는 항 상 '세속의 도성'과 '신의 도성'이 공존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그러는 가운데에 어느편에 서 서 우리는 살아갈 것이가라는 실천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어, 고백록에 있는 성 어거스틴의 이야기를 살펴 보았는데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오 우리마음이 당신안에서 쉴 때까지는 평안이 없습니다.'(1권 1장), 모든 것이 주안에 있고 주로 말미암아 있고, 주를 통해 있사오 니 나도 당신 안에 있지 아니하면 존재할 수 도 없습니다. (1권2장), 당신은 모든 시간을 창조하셨고 모든 시간을 앞서 게시니 시간이 없었을 그 때에 어떤 시간이란 있을 수 없습니 다. (11권 13장) 등을 통해 보았을 때, 그는 하나님은 곧 진리이시며, 인간이 노력이 아닌 하 나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신께 나아간다고 하였다. 또한, 알파와 오메가의 목적론적인 세계관 을 보여주는데, 역사를 신앙으로 바라보려는 그의 사상을 알 수 있었다.
지난 시간에 이어 고대교회에대해, 그 중에서도 중요한 사건, 인물에 대해 간략히 공부하였다. 다음 시간부터는 중세교회로 넘어가게 되는데, 아직도 수요 성서공부에 나오는 청년이라고는 청년회 윤주용 회원및 몇몇 사람들 밖에는 없는 셈이다. 잉잉..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나와주기를 바란다.
5. 중세기 교회와 수도원 운동의 정신(주후 500∼1000); 라틴적 서방 기독교 신앙형태의 특징
중세기 교회와 수도원 운동의 정신(주후 500∼ 1500)
이번엔 중세교회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자. 중세교회의 특징을 다음 과 같이 요악해 볼 수 있다.
1. 위대한 종합의 시대로 삶의 전 영역을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그리 스도의 진리로 조명한 시대였다. 지성과 신앙이 잘 조화된 시대인데, 이 때에 비하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신앙을 위해 지성이 파괴되기도 한다.
2. 신앙의 표현으로 상징과 종교예술이 발달하였다. 건축, 음악, 미술 등이 신도의 경건함양에 공헌했으나 성상숭배의 위험이 따랐다.
3. 수도원운동이 교회의 정화와 영성심화에 공헌하였다.
이런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 중세교회는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면 도 가지고 있다.
1. 교회가 부와 권력을 가짐으로 인해 교권주의에 빠지고 영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2. 성경이 전하는 기쁜 소식 -'복음'적 측면보다는 두려움과 심판을 강조하는 공적주의가 퍼지게 된다.
3. 십자군 전쟁과 같은 전쟁, 마녀사냥, 이단파문화형 등 인간을 교권 으로 억압하는 암흑기로 발전하기까지한다.
우리가 중요시여기고 배워나가야 할 것의 중세교회의 수도원운동일 것이다. 주후 225년 성 안토니우스에 의해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수도원 운동은 북이탈리 아를 중심으로 해서 퍼져나가게 된다. 수도원 운동은 중세교회의 꽃이고 영적 샘물운동이라 고도 칭해지는데, 사회가 혼란하고 영적으로 종교가 속화되었을 때 인간의 삶이 방향을 잃고 방황했을 때 일어난 운동이라고 한다. 또한 이 운동은 자발적인 평신도의 갱신운동의 성 격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6. 종교개혁 시대의 진통과 혁신(주후 1500∼1620)
10월의 마지막 주는 종교개혁주일이라고 해서 루터 이후의 종교개혁 을 기념하는 주일인데, 개신교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우선 16세기는 긴긴 중세시대를 지나 근대시민사회로 접어드는 태동기라 할 수 있다. 종교개혁에 관련된 중요사건을 한국의 역사(목사님이 강조하시는 바와 같이 그 당시에도 신의 섭리에 의해 움직인 역사)와 비교하여 살펴보자.
1483 마틴루터 아이스베른에서 탄생 1487 동국여지 승람 간행
1484 쯔빙글리 스위스에서 탄생 1493 악학궤범 완성
1509 존 칼빈 프랑스에서 탄생 1498 무오사화
1517 루터 95개조 논제를 내놓음 1501 이황퇴계 탄생
1521 윔스제국회의에서 이단으로 파문 1519 을유사화, 조광조 처형
1523 쯔빙글리 스위스 개혁운동 1536 이이율곡 탄생
1524 독일 농민전쟁 1560 이황퇴계 도산서원 설치
1536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집필 1569 이이 율곡 [동호문답]지음
1540 칼빈, 제네바에서 개혁운동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남
1546 루터 사망 1613 허준의 [동의보감]간행
1620 메이플라워호로 청교도 신대륙이주 1636 병자호란 발발
마르틴 루터는 법학도였는데 법 석사과정을 다니던 중 수도원에 입교 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거스틴 파 수도승이 된후 성경연구와 묵상에 힘을 쏟았고, 그런 그의 순수한 신앙이 교계의 속화와 로마 교회에 대해 실망케 했다고 한다. 그가 95개조 논제를 위텐베르그 게시판에 붙인 것은 어떤 종교운동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그것에 관한 토 론해 보자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러 기에, 그가 게시판에 글을 붙이던 망치소리가 중세기독교를 온통 허물었다고 이야기하는 사 람도 있다고 한다.
마르틴 루터가 그 이전의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다른 점은 단순한 타 락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근본문제를 파악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3대원 리를 '믿음으로만','은총으로만','성서를 통해서만'으로 설정하고, 죄인인 내가 어떻게 은총 의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 자기중심적 겉치장과 공로사상을 ?셔버리고 순수한 신앙을 회복할 것인가는 것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곤고한 심령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오 직 무조건적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그 앞에 나아감으로 평화를 얻는다'고 하 였고 '모든 크리스챤은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요 아무에게도 메이지 아니한 절대 자유인 이면서 동시에 모든 이를 섬기는 봉사자이다'라고 하였다. 루터는 초대 교회의 아가페의 신 앙을 다시 회복하기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단으로 파문당하여(1521년) 신변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지만 프레드릭 선제후의 도움으로 그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보 호를 받으며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1522년) 성서가 교권에 의해서 해석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게기가 되었 다.
이 종교개혁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그 정신은 첫째, 하나님으로 하여금 참 하나님이시게 하라는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를 비판하는 원리이다. 여기서 우상 이라고 함은 다른 종교의 신이라는 뜻보다는 살아가면서, 혹은 기독교안에서 하나님보다 우선되기 쉬운 교회, 교리, 교권을 말하는 것이며 정치, 왕 따위의 것도 포함된다. 심지어 성 서까지도 하나님보다 앞서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까지 할 수 있는데, 즉 하나님의 뜻을 전하 는 것이 성서인데 성서를 절대시 해버리면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이야기이 다.
둘째는 자기의 의를 통한 구원의 길의 멍에를 벗어나 죄인을 부르시 는 은혜의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믿고 맡김으로서 '절대 자유인으로서의 순례자'의 모습 을 회복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즉, 중세시대에 가려졌던 자비로우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회복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개인이 강조됨으로서 근세시민사회으로 서의 책임적인 주체성을 가진 시민정신에 기여하게 되고, 모든 직업은 하나님 앞에서 신성 시 되었고,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의 사제라는 만인 사제설 등이 근대사회의 태동기운과 맞 물려 돌아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세가지는 결국 무엇보다도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우리 개인의 실존 이 중요하며, 그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는 정신이리라 생각해본다.
7. 개혁파교회(장로교회) 신앙전통과 그 복음적 특 성 (주후 1500∼1650) ; 루터와 칼빈의 개혁정신
개혁파교회(장로교회) 신앙전통과 그 복음적 특성(주후 1500∼1650)
개혁파교회란 종교개혁운동의 한 흐름을 말하는데, 장로교회와 회중 교회, 조합교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칼빈, 쯔빙글리, 부세르 등의 종교개혁 지도자들이 이 개혁파 교회의 신앙과 신학 형성에 크게 공헌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가 장로교회인 만큼 그 전통을 아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김경재 목사님은 어떤 종파주 의적인 사고방식으로 그 중요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며, 서양의 경우 감리교집안 혹은 장로교집안이라는 것만 알면 그 사람의 품향과 가정교육 등을 훤히 알 수 있게 되는 정도라 고 하는데, 과연 장로교회의 전통과 신앙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라 고 설명하셨다.
장로교회는 스위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네델란드, 프랑스와 독일 일부, 카나다, 미국, 호주, 브라질, 아르헨티나, 그리고 한국에 퍼져있다고 한다. 전세계 장로 교회교인들의 수는 약 7,500만명에서 1억정도라고 한다.
개혁파교회의 신앙 전통은 다음의 다섯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특별히 더 강조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권능을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피조물은 피조물이다는 말 이 극명한 말로 이를 대변한다. 고로 유한한 피조물을 신성시하는 것을 엄금한다. 이런 고백 은 절대은총의 신앙과 하나님의 구원예정신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에정설이라고 하는 이 신앙도 하나님의 절대은총에 대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된 다.
둘째, 성경중심적 신앙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말씀계시에 대한 순종이 강조되고 신앙의 표준과 모범으로서 성서가 강조된다. 그러나 성서를 문자적으로 절대시하는 과오를 경계한다. 또한, 성서 속에 흐르는 계약사상을 강조한다. 그 좋은 예는 로마서 8 장 28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이다.
셋째, 성령의 능력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훈령을 강조한다. 복음 과 율법은 상호배치되는 것이 아니며 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며, 노동을 통한 생활신앙의 전통이 강조된다. 캘빈은 삶을 통해 자신의 은혜받은 것을 증거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훗날 근세시만사회와 자본주의사회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게된다.
넷째, 하나님의 백성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강조하고, 회중대표 (예 장로)에 의한 교회의 행정치리를 강조한다. 어떤 개인의 신앙생활이 아닌 교회공동체를 강조하게 된다는 말이며 성례전적인 신앙과 살아 생동하는 그리스도 몸을 강조한다는 말이 다. 개인주의적 신앙과 종교적 내면주의를 경계하고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경향이 있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우주적 왕권사신앙을 고백하며 메시야적 정치와 사회윤리실현에 힘쓴다. 정치저그사회적, 경제적 삶의 현실 속에 하나님나라가 실현되어 화 육해가는 성육신적인 영성을 강조한다.
어느덧 일곱번의 강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무려 1700여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게 되었다.
8. 근세 그리스도교회의 '도전'과 '응전'(주후 1600∼ 1900); 정통주의, 경건중의, 합리주의
근세 그리스도교회의 '도전'과 '응전'(주후 1600∼1900)
지난 시간에 배운 종교개혁의 시대를 지나 이제 세상은 근세라는 범 주로 분류되는 시기로 접어든다. 중세와 확연히 구분되는 이 시기의 여러 특징은 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며 [도전]하게되고 기독교도 이에 반응하여 [응전]하게 된다. 우선 이 시기의 주요 연표를 살펴보자.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고(1600년) 메이플라워호가 신대륙의 뉴 잉글랜드에 상륙한다.(1620년) 영국의회의 권리청원(1628), 병자호란(1636)이 있었고, 대 과학자 뉴톤이 태어났다.(1642-1727) 명이 멸망하고 청나라가 건국했으며(1644) 볼모였던 소현 세자가 북경에서 그리스도교와 접촉을 하였었다.(1645) 영국에서는 웨슬레의 회심운동이 일어나 감리교의 모체가 되었고(1738) 산업혁명도 시작되었다.(1760) 철학자 칸트가 태어났으며(1724-1804) 미국이 1776년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1789년 프랑스의 혁명이 일어났으 며 1804년에 나폴래옹이 등극하여 유럽이 긴장하게된다. 한국에서는 천주교가 전파되어 박해되고 신유사옥, 다산 정약용의 유배(1783), 서학금지령(1786) 등으로 이어진다. 극심한 민생고로 1811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천주교의 조선교구가 독립(1831)되기도 한다. 영 국이 청나라를 상대로 아편전쟁(1840)을 벌였고 이는 중국을 중심으로 사고하던 한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제우의 동학창도가 1860이고, 1868년에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있었다. 1885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였고 1894년에는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고 독립협회 성립(1896) 등으로 전개된다.
조금은 잡다하게 나열되었지만 세계그리스도교사를 배우며 항상 이런 세계사 연표를 빼지않는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항상 사회의 구조와 상황에 영향을 받거나 혹 은 주면서 존재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 모든 세계의 역사가 하나님의 경륜아래 움직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볖든 근세사회로 접어들면서 서구사회는 계몽시대, 과학시대, 산업시대라는 이전과 확연히 구분되며 급변하게 되었다. 계몽주의 영향으로 사회전반에 걸 쳐 이성과 합리가 존중되었으며, 보다 현세적인 것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또한 과학과 기 술의 발달로 자연에 대한 개발과 정복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개인의 가치가 중요시되고 시 민사회가 성립되고 개인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발달하는데, 개신교는 근세사회의 성격 과 유착하며 성장하게 된다.
이런 근세사회에 교회는 3가지 형태로 반응하게된다.
첫째, 정통적 보수주의 기독교의 흐름이다. 과학사상과 과학적 진보의 결과에 저항하며 성서연구의 학문적 비판적 연구방법을 거부하는 형태로 나아간다. 성경의 절대권위를 강화하며 문자주의로까지 퇴행한다. 철저한 성속 이원론적 세계관을 구축하게 되고, 내세적 관심의 증대로 현실성을 상실해 간다. 그 극단의 형태가 미국에서 발생한 근본 주의 신학이다.
둘째는 합리적 자유주의 기독교의 흐름이다. 이성의 한계안에서 종교 를 이해하려고 하며 성경의 초월현상을 부정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성경을 합리적으로 해 석하려고 하며 하나님나라를 현세에서 인간의 진보발달로 이룩하는 이상적 사회로 해석하게 되었다. 성서연구방법의 발달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의 이신론이라는 극단의 형태 로 발전하기도 한다.
세째는 내면적 경건주의 기독교의 흐름이다. 신앙을 주체적인 인간 내면성의 체험에서 파악하며 종교의 본질은 초자연적인 교리나 합리적 이해가 아닌 성스러 움의 체험으로 파악한다. 영혼의 내면적 불꽃과 거듭남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또한 경건한 선행의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교회의 외적기구나 조직, 권위를 부정하기도 한다. 모라비안 형제단의 경건주의 온동, 죠지폭스의 퀘이커운동, 웨슬레형제의 감리교회 운동 등이 예가 될 수 있겠다.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아프리카 오지 같은 곳으로 의사나 선교사들을 파견 하는 곳은 대부분이 이 경건주의 신앙형태이다.
이 날 강의를 들으며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교회들의 뿌리의 가닥이 어느 정도 잡혀가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마도 우리는 보다 집요한 자신의 성찰을 통 해서 현재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청년들이 보다 '집요한' 자세를 가질 때만이 늘 반복되는 지루한 무실천, 무사랑, 무신앙의 악순환은 해결되지 않을 까하는 서글픈 확신과 함께....
9. 현대 세계 그리스도교회의 각성과 부흥 (주후 1860-1990)
19세기와 20세기를 일컬어 라쁘레라는 敎會史家는 '위대한 선교의 시 대'라고 하였다. 월리암 케리의 인도선교, 로버트 모리슨의 중국선교,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선교 등 교통의 발달과 서양 제국의 식민지 정책과 더불어 복음은 세계 각국으로 전파되기 시작한다. 1910년에 열렸던 에딘버러 세계 선교대회에서는 '금세기 내에 이 세계를 복음화하 자'는 표어까지 세웠었다. 위에서 서술된 기독교의 흐름 중 경건주의파와 보수주의파를 중심으로 선교사가 온 세계로 파송되게 된다. 특히, 세계선교를 위한 학생 자원운동이 일어나기 도 하였다.
또한 선교방법은 성서번역 뿐 아니라 교육과 의료사업, 과학기술교육 등에도 힘썼으며 토착교회의 자력갱생, 자립운동, 자립교회지도자 등으로 선교지역의 토착화를 위해 힘썼다. 이런 모습은 인권, 학문, 과학, 복지, 후생, 여권신장, 문맹퇴치, 미신타파 등에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점이 또 하나있는데, 기독교의 이런 세계선교의 모습 은 당시 진행되던 제국의 식민침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세계침략과 정치경제적 식민지배 및 문화파괴의 방조 및 후원세력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가 서구 에 의해서 선교됨으로인해 19세기의 서구문화라는 특수 상황이 하나님의 뜻인 복음으로 절대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역사현실의 인간의 삶의 전영역을 복음을 빛으로 갱신하기 보다는 심령주의, 내면주의, 개인주의, 타계주의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교회는 회개와 재정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1948년 교회연합운동(WCC), 칼 바르트의 '하나님 말씀 운동', 선교사의 시대에서 동역자 시대로의 전환, 제3세계 자립과 민족주의 하나님의 신학 대두, 토착문화의 재평가 등이 중요 한 문제로 등장하고, 복음과 서구 기독교문명을 구별하게 되기도 하였다.
앞으로 남은 세번의 강좌를 통해 현대의 기독교와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위에 나열한 현대세계그리스도교에 대한 평가는 그 때로 미루기로 하자!
10.11. 한국 기독교(천주교,개신교)의 전래와 그 특징
본래 이 강의는 '한국 개신교의 전래와 그 선교운동의 특징'과 '한국 천주교의 전래와 초기 개신교의 선교활동'으로 두 번에 걸쳐 강의된 내용을 편집자의 사정으로 한 번에 엮어 실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김경재 목사님의 뜻과 상이한 부분이 발생 한다면, 다 본인의 책임이리라.
먼저 한국에 천주교의 전래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에배가 진행된 것은 1785년이다. 그러나, 1253년에 이미 교황청에 꼬레아라는 나라가 보고되었었다.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일본에 입국하여 선교한 것이 1549년이며, 마테오 리치가 명에 들어가 선교한 것이 1581년이니 한국은 그에 비해 상당히 후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과는 다른 점은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전개는(뒤에 개신교의 경 우도)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1610년 허균이 북경에서 천주교로 개종했 다는 기록이 있고, 병자호란 후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독일신부와 친교를 하기도 하였다. 이미 1758년에는 황해도와 강원도에 천주학이 자발적으로 성행하였다고 하 며, 1777년에 권철신, 정약용, 정약전, 이벽 등이 여중에서 천주교리를 연구하였고, 자체적 신도조직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최초로 영세를 받고, 1785년 한 양 김범우란 사람의 집에서 천주교 창설예배가 열렸다. 천주교의 한국전래의 기원을 바로 이 때로 잡는다고 한다. 그러나, 천주교가 조상제사를 금지(1715년)하자 조상의 위패를 태우 고 제사를 거부하는 신도가 생겨나게 되고 이것이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아 천주교인들의 박해가 시작된다. 1791년 신해교난, 1801 신유교난 등 수 많은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잃게 된 다. 중국의 주문모 신부(1801년)와 프랑스의 모방,샤스탕 신부(1839년) 등도 순교하였다. 특 히, 한양에서 5년간을 숨어지내며 복음을 전하다 국경으로까지 도망갔으나, 자신 때문에 고 문받고 죽는 신도들을 생각하여 다시 돌아와 자수한 주문모 신부는 특별히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과정중에서도 천주교는 꿋꿋이 성장하여 1831년에는 한국교구가 독립하게되었다. 한국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여 순교한 것은 1846년의 일이다. 이 와중에 1863년 고종이 즉위하여 대원군이 집권을 하고, 동학이 크게 일어나 최재우가 처 형(1864년)당하기도 하였다.
이 쯤되어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다가오기 시작하는데, 대동강에서 소각당한 미국의 제네럴 샤먼호(1866년)에 타고 있던 영국선교사 토마스 목사가 순교하는 일 이 벌어졌다.(그가 가지고 있던 성경이 그를 죽인 사람의 후손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의 로스 목사가 만주에서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고(1876년), 그와 한인들에 의해 복음서가 차례로 번역되었다. 또한 그에게서 세례를 받은 상인 서상륜이 최초의 목사가 되 어 황해도 솔내에 최초로 교회당을 세우기도 하였다(1884년). 또한 같은 해에 알렌이 한국에 와 이듬해에 광혜원을 세우는 등 근대식 의료기관과 교육기관설립등으로 간접 선교를 시작 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의료s, 교육, 기술 등 근대화와 선교가 병행되는 특 징을 가지게 된다. 그 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선교사로 입국하여 선교를 하게 되 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한국에는 많은 기독교 신앙인들이 존재 하였고, 이미 세례를 받기원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한국기독교사 중 기억할 만한 것이 '네비우스 선교정책'이다. 중국선 교사였던 네비우스는 한국에서의 선교정책으로 '자치, 자립, 자전'의 원칙을 네세웠는데, 한 국에서의 선교는 한국인들의 손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인 셈이다. 이 정책의 성공으로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성장할 수 있었다. 교파선교지분할선교도 선교정책의 하나였는데, 한국의 각 지역을 한 교단씩 맡아 선교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엄격하지 않은 酒草 의 문제가 한국에서 철저하게 배격되는 연유도 이와 비슷한데, 당시의 한국인들이 주초에 지나치게 많이 매달리는 것을 보고 금주금연운동을 전개한 선교의 방침이 있었다)
그러나, 미 정부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선교사들은 정치에 일체 참여 하지 않으려고 하고, 교회는 일제의 수탈과 식민 상황에 수난받던 당시의 한국의 상황과 유리되는 면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상황속에서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길선주 목사에 의해 주도되었던 부흥사경회는 그 불길이 크게 일어나 3천명세례, 7만명의 구도자 발생이라는 놀 라운 역사를 발휘하였고, 새벽기도회 창안, 통성기도 등의 내면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뒤의 이용도 목사, 김익두 목사에게로 이어진다.
이런 내면운동의 부흥은 현세부정, 내세추구로 이어질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한국의 민중들의 심성에 다가간 구원의 종교로서 개신교가 자리매김을 해 나간 것이 라 하겠다. 1919년 3て1운동에는 거교회적인 참여가 있었고, 수원 제암리교회와 같은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의 YMCA, YWCA도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전개된 사회운동 이었다.
짧게나마 정리하자면 천주교나 계신교가 모두 한국민의 자발적인 신앙으로 시작된 것은 매우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반면, 천주교는 미사와 교리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나, 개신교는 성서를 중심으로 하였다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또한, 천주교는 수많은 순교와 피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기독교는 근대화와 병행되는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한국교회의 특징적 모습과 방향은 다음 시간에 서술하도록 하겠다.)
무엇보다도 그런 신앙의 선배를 두고 있는 우리들에게 신앙은 너무나 편하고 아름답고 자유로운(?) 것이 되지는 않았는지 하는 의문과 함께, 성서도 채 번역이 되 기전의 두터웠던 신앙을 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에 대한 태도를 한번 돌이켜 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의문도 개인적으로 들었다. 모두들 같이 한 번 쯤 생각해보길...
12. 한국 교회의 부흥과 미래의 과제 ; 그 축복과 문제와 과제
한국 교회의 부흥과 미래의 과제
세계그리스도교사의 마지막회는 한국교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 이다. 2000년전, 팔레스틴에서 시작된 복음운동이 유럽과 신대륙을 걸쳐 한국에까지 전달되는 데에, 즉 복음이 지구 한바퀴를 도는 데에 약 200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김경재 목사님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시계는 매우 천천히 돌아간 셈인데, 지구역사 47억년이라는 시 간에 비해본다면 이 시간조차 매우 짧은 시간인 셈이다. 이런 하나님 경륜 앞에 우리는 어 떤 종파주의나 공의주의에 빠지지말고 스스로 숙연해지는 수밖에...
한국교회는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급성장하게 되는데 그 부흥의 동력으로 다음의 것들을 들 수 있다.
첫째, 영적으로, 종교사상적으로 민중의 심령이 진리와 생명의 빛을 갈급할 때, 복음이 전래되었다. 그 때는 불교나 유교 등의 전통종교가 쇠락해가고 19세기 상황속의 민중의 구원종교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시기였다. 전통종교는 다분히 상위계층을 위한 면이 있었다.
둘째,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들어온 복음은 신문화운동과 서구문물의 도임창구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미신타파, 인권존중, 의료 및 교육사업, 민주주의 창달 등 실질적 인간해방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것은 인도, 중국, 베트남 등 기독교국가의 식민지였던 국가의 선교와는 대조적으로 특이한 면이다. 그런 국가는 우리나라보다 교회선교에 큰 비용을 들였음에도 현재는 기독교가 무척 미비하다.
세째, 초대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선교열과 자치를 목적으로 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지난 호 참조)이 주효를 이루었다. 초대선교사들은 주로 복음주의적 경건주의자였으며, 부흥회 타입의 미국적 교파신학자들이었다.
네째, 한국 개신교는 성경반포와 찬송가 제작에 힘썼고, 성경중심주의 에 기초한 서민접근의 선교정책을 폈다. 그 예가 새벽기도회, 성경공부를 통한 한글보급 등 이다. 또한, 당시의 한국고난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고난역사를 이미 이해할 수 있는 전거가 되었고, 예수의 고난신앙 역시 한국민의 가슴에 은혜체험을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런 면에서 초기의 한국기독교인들은 신앙과 민족의 구원을 하나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다섯째, 한국인 특유의 종교적 심성, 특히 하나님 신앙은 성서를 받아 드리는 전이해로서 작용하였고, 풍요로운 한국 종교문화사는 복음을 쉽게 싹트게하는 역할 을 하였다.
이상의 이야기들로 한국의 기독교는 매우 크게 부흥하게 되었으나, 나름대로의 문제점들도 안게된다. 그런 문제점들과 그런 문제를 지양으로서의 우리의 과제 를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로, 미국 개신교의 교파주의적 선교역사는 교파교세확장을 선교 로 오해하였고, 교파주의적 교조주의가 한국교회의 보수성, 몰역사성, 타계중심적 신앙 형태 로 고착화시켰다. 복음이 지향하는 참다운 성육신적 신앙유형으로의 전환이 우리에게 절실 한 과제로 남는다.
둘째,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자립,자치,자전의 정책이 개교회의 육성과 책임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였으나 개교회 중심주의를 조장하게 되었고, 사도적 교회의 일체 성, 통일성, 연대정신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우리는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 교회의 통일성, 보편성, 거룩성, 사도성을 회복하여야한다.
셋째, 성경중심주의는 한국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으나, 성서적 문 자주의적 보수신학은 반지성주의, 반과학주의, 열광중의적 감상주의로 빠지게하는 원인이 되 었다. 성경만을 주장하는 주의는 상징없는 종교가 되고 깊이가 없는 경박스런 기독교신자를 양성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올바른 성서신학의 정립과 영성수련의 과제가 제기된 다.
넷째, 아세아의 종교문화의 깊이와 한국의 종교문화를 몰이해한 초기 선교사들의 한국전통문화 말살선교정책은 한국의 전통종교와 문화전체를 우상숭배로 규정하는 과오를 범하여 21세기의 '하나님의 선교'를 국지화시키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진정한 문 화선교의 과제가 우리에게 요청된다고 하겠다.
한 역사가의 말마따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인 것 같다. 12회 동안의 그리스도교사를 들으며, 계속 우리 한국의 교회와 우리교회의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12회에 걸쳐 연재된 세계그리스도교사도 이제 마지막 회가 되었다. 수요성서강좌를 지상(紙上)중계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의도였으나, 과연 어느 정도나 올바로 전달하였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부끄러움이 앞선다. 이 강좌는 모두 입력되어 있으므로 언제든지 편집부에게 연락을 하면 한꺼번에 보내 줄 수 있다는 것도 밝혀둔다. (사실 좀 힘든 작업이었다. 편집부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회원은 언제든지 한 턱 내도록 할 것!) 무엇보다 김경재 목사님께 감사드리며, 2000여 년 동안 이 한반도의 복음화를 위해서 준비하신 주님의 그 경륜에 머리숙여 기도드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