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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석정 시낭송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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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시인 이야기 스크랩 `그 먼 나라`의 원형 신석정
더밝은미소 추천 0 조회 84 14.07.26 09: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그 먼 나라'의 원형                                   

                                                                                                                            -신석정 편


           

  디지털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문명의 편리함을 한껏 누리고 산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분명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시인 신석정(1907~1974년)의 발자취를 취재하기 위해 최승범(전북대 명예교수, 석정의 사위)시인을 만나러 전주로 가는 길. 초행이지만 navigation의 친절한 안내로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전주에 들어서자마자 갑작스런 기계의 오작동으로 인해 마치 더듬이가 떨어져나간 곤충이나 다름없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같은 곳을 뱅뱅 돌며 약속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다. 문명은 분명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준다. 반면 이처럼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으며 당혹스럽게 할 때가 적지 않다. 그래서 디지털문명과 도시화가 대세인 현대에도 대부분의 사람들 내면 한 구석은 목가적인 삶을 동경하는 것이 아닐까.

                                  

                                          

                                                                 <최승범시인과 대담>

 

  전주의 ‘고하 문예관’으로 최승범 시인을 찾아뵙는다. 온화한 인상과 조용한 목소리의 노 시인,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취재일행을 반갑게 맞는다. 오후엔 이곳 문예관에서 문학행사가 있는 날이라 서둘러 와줬으면 하는 시인의 요청이 있었는데 30분이나 늦은 것이다. 사무실이 있는 4층, 서고는 엄청난 책들로 웬만한 도서관을 방불케 한다. 바로 인터뷰에 들어간다. 박 팀장은 최 시인에게 먼저 석정 시인의 사위가 된 동기를 묻는다. 최 시인은 “(석정 시인이)태백신문에 계실 때 선배 김준영(전북대 명예교수, 당시 조교)의 소개로 처음 뵈었죠. 훤칠한 외모에 어글어글한 음성, 이분이 바로 <<촛불>> <<슬픈 목가>>의 시인 아닌가?! 그저 경외롭기만한데 (시인은)정겹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인연을 맺고 1년여 지난 다음 결혼(석정의 장녀 일림과)을 하게 되었지요.”라고 간단하게 답한다. “6.25때 석정 시인이 잠시 공산당에 가담했다가 고향 사람들로부터 질시를 받아 곤욕을 치른 걸로 아는데 사실인가요?” 라고 묻자 최 시인은 “(석정 시인이)부안, 시골에 있으니까, 시골엔 인재가 없으니까 선생이 공산당의 표적이 되었나 봐요. 그리고 동생이 6.25때 행방불명된 이유 때문에 문제가 더 크게 부각되었지 않나 싶습니다. 본인의 상처가 더 깊었지요.” 라며 최 시인은 담배를 태워 문다. “석정 시인의 최종학력이 당시 소학교 졸업인걸로 아는데 고등학교 교사를 하시고 대학 강의까지 하셨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요?” 라고 묻자 최 시인은 “예, 선생께선 소학교 졸업으로 정규교육과정을 마쳤지만 한학을 했고, 조선불교중앙강원에서 불전을 연구하고 독학으로 끊임없이 문학을 공부하여 실력을 갖추셨던 게지요.”라고 한다. “석정시인께선 1년여 서울에 머문 것 외엔 돌아가실 때까지 고향을 떠나지 않은 걸로 아는데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라고 묻자 최 시인은 “선생께선 부모, 형제, 고향에 대한 애정이 유별하셨어요. 그래서 장만영(석정시인의 동서), 김기림 등 서울에서 활동하던 문인들이 서울로 오라고 권유했으나 끝까지 고향을 가까이서 지키며 사셨지요.”라고 말하며 잠시 상념에 젖는 듯 눈을 감는다.
 우리나라 대표적 목가 시인으로 알려진 석정, 그는 1907년 7월 7일 전북 부안에서 한학자 신기온과 이윤옥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석정의 정규과정 최종학력은 17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다. 그나마도 소년시절부터 비리나 불의를 참지 못하던 그는 일제 강점기 수업료를 내지 못해 일본인 담임으로부터 수치를 당한 동료를 대변하여 무기정학을 받았다가 이듬해에야 겨우 복교해 졸업한다. 그리곤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문학서적들을 탐독한다. 1924년엔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발표, 이후 조선, 동아, 중앙일보 등에 다수의 작품을 발표한다. 1930년 서울에 상경, 조선불교중앙강원의 박한영 문하에서 1년 남짓 불전을 연구하며 틈틈이 시도 쓴다. 이때 승려 시인 한용운을 비롯하여 시문학파의 김영랑, 정지용, 박용철 등을 만나고 김기림과도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1년 10월<시문학>지 3호에 “선물”을 발표하면서 그의 문학 활동은 본격화 된다. 석정은 1년여 서울에 머물고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문학공부를 계속한다. 그는 노장철학과 도연명, 타고르, 소로우의 영향을 받아 그의 목가적 시세계를 더욱 깊고 넓게 펼쳐나간다.

  그가 결혼하여 둥지를 틀고 살았던 부안의 선은리 ‘청구원(전라북도기념물 제84호)’ 시절 <<촛불>> <<슬픈 목가>>를 쓴 시기를 그의 시작(詩作) 제1기로 본다. 이때는 그야말로 완전히 자연에 묻혀 자연을 노래한다. 이때 그의 대표작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쓴다.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나려오면
                                         양지밭에 흰염소 한가히 풀뜯고
                                         길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까머귀 높이 날어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

                                                                 

                                         양지밭 과수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새빨간 능금을 또옥똑 따지않으렵니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중에서

 

  노장철학의 영향을 받고 한때 불교에 심취했던 시인은 선문답형식의 전개방법으로 의문형과 청유형을 번갈아 쓰며 화자가 추구하는 세계를 강조하며 ‘어머니, 당신도 그런 곳을 원하지 않느냐?’며 의문을 좆는다. 이 시는 우리 삶에서 어렵지 않게 펼쳐지는 전경을 그린다. 하지만 이곳은 현재형 잃어버린 낙원이다.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은 이러한 전경들을 눈으로 보면서도 내면으론 평화롭게 품을 수 없는, 시대적 절박한 상황을 의미한다. 아무리 무릉도원이라도 정신적으로 그곳에 평안히 안주할 수 없으면 낙원이 되지 못하고 이상향으로만 꿈꿔야하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 시를 또 다른 측면에서 즉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배재하고, 시인이 펼치는 그대로 전경을 음미해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향의 나라는 멀리 있지 않음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시인은 산을 좋아해 산에 자주 올랐다고 한다. 시인이 살았던 전북 부안은 나직나직한 산들이 드넓은 들을 품어 안고 있으며 그 들을 지나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끝없는 바다가 펼쳐진다. ‘청구원’이 자리하고 있는 ‘선은리(仙隱里)’라는 지명의 뜻을 풀어 해석하면 신선이 숨어 산다는 곳이다. 신선이 숨어 살 정도로 아름다운 곳, 석정 시인의 유년과 젊은 시절의 삶을 고스란히 감싸고 지켜봐준 부안이다. 석정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목가 시의 대부분은 이곳 부안 선은리 ‘청구원’에서 싹터 자랐다. 시인은 이처럼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의 세계를 시로 형상화하면서 이곳이 곧 지상낙원이나 다름없으나 내가 마음으로 그것을 취하지 못하면 가깝지만 ‘먼 나라’가 되고 만다는 것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950년 6.25동란 당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석정 시인은 잠시 공산당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고향 사람들로부터 질시를 받았음은 물론이요, 평생 불명예의 멍에를 진다. 그리곤 1952년엔 가족이 모두 전주로 이사를 한다. 최승범 시인은 “선생께선 부안에서 전주로 오셔서 1961년께 장만한 집 ‘비사벌초사’에 대한 애정 또한 남달라 돌아가실 때까지 정원을 아주 잘 가꾸며 사셨고, 이후 소정(석정의 부인)여사가 작고(88세)하실 때까지 사셨지요. 지금은 남의 집이 되었지만 그래도 현재까지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남노성동175번지, 그 일대를 ‘석정로’라고 지명을 바꾸어 부르고 있다.”고 전한다.

 

 

 <석정시인 생전 비사벌초사에서>


  석정은 전주 ‘비사벌초사’로 거처를 옮겨 가면서는 대자연 속의 ‘청구원’ 시절에 비해 아무래도 자연과 그다지 가깝지 않다. 우선 사용하는 물부터 우물에서 수돗물로 바뀐다. 그의 시작 제 2기로 보는 이 시기, 민족상잔의 비극적 현실을 쓰라리게 체험한 석정은 태백신문에서 편집고문으로 일하며 차츰 사회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를 쓰게 된다. 이 무렵에 나온 책이 시집 <<빙하>>(정음사간행), <<고금명시 감상>>(이병기 공저), <<매창 시집>>(대역) 등이다. 하지만 이때도 그의 시는 자연을 쥘부채로 쥐고 그 맥을 놓지는 않는다. 이때는 포괄적 자연을 노래하기보기보다 ‘비사벌초사’ 정원에서 그가 아끼고 가꾸던 수종들을 하나하나 세밀히 바라보며 관조적 시를 쓰게 된다. 지금도 이곳 전주 남노송동의 비사벌초사정원에는 동백, 호랑가시나무, 모란, 태산목, 시누대 등 수십 종의 정원수들이 어우러져 자라며 옛 주인의 체취를 전해주려는 듯 담 넘어드는 미풍에도 살랑살랑 몸짓을 한다. 비사벌초사의 새 주인(김남용 님)또한 시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지불식간에 찾아간 일행의 무례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대문을 열어 보여준다. 고운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정원에서 엿볼 수 있었다.
  일행은 ‘비사벌초사’를 나와 ‘청구원’이 위치해있는, 부안의 부안읍주민자치센터 양규태(수필가)님을 찾아간다. 양규태 님은 석정의 부안중학교 교사시절 제자였다. 때마침 이곳에서는 강사를 초빙하여 석정문학관 건립 계획에 따른 주민공청회 겸 세미나가 열리고 있었다. 석정문학관은 생가를 복원한 청구원을 중심으로 세워지며 주변의 약 5400여 평 부지를 석정공원으로 조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석정문학관’은 2009년 개관 예정이었으나 공사에 차질이 생겨 2010년에나 개관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한편 부안읍에서 선은동 ‘청구원’까지를 ‘석정 길’이라 지명을 붙이고 석정의 시 약 70여 편을 3년 전부터 도로변에 전시하고 있다.
  취재팀은 양규태 님으로부터 조명환님을 소개받아 ‘청구원’과 석정 시인이 잠들어 있는 고성산 서두골을 찾아간다. 조명환 님은 석정 시인과는 사돈 벌로 어렸을 때 청구원에 자주 놀러갔던 기억을 더듬어 시인에 대한 일화를 설명하며 취재팀을 안내한다. 석정 시인의 생가를 복원한 청구원은 고증을 통해 석정 시인이 살던 당시의 모습에 비교적 가깝게 재현해 놓았다고 조명환 님이 전한다.

  석정의 유택은 부안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송정리의 고성산, 옛 성곽을 등지고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전북 임실에 있던 묘지를 이장했다. 이곳은 일명 쥐머리골, 산의 형상이 쥐머리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묘지를 참배하고 돌아서려다 가만히 내려다보니 묘지 마당과 주변에 식물도감에서만 볼 수 있었던, 연보랏빛 타래난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실타래처럼 줄기를 감고 올라가면서 핀 앙증스런 꽃을 그냥 두고 오기가 아쉬워 휴대폰 카메라에 한 컷 담아가지고 산을 내려오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봐진다.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친자연주의, 그리고 취재 내내 그의 사위 최승범 시인으로부터 들은 석정 시인의 다감한 이미지가 오버랩 되어 마치 살아있는 듯 일행을 불러 세우며 ‘보오! 이 꽃은….’ 라며 타래 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줄 것만 같아서다.   

 

                                                

                                                         <변산 묵정마을입구 시비-파도>

 

  석정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부안군 변산면 묵정마을로 간다. 시비(파도 수록)는 마을 입구 새만금을 바라보는 바닷가 기슭에 있다. 이곳은 도로변에 맞닿아 있어 차를 세울만한 곳이 없어 시인의 문학을 기리는 시비공원으로의 역할을 제대로 할까싶질 않아 안타까운 생각이 먼저 든다. 사람 좋아하는 석정 시인, 당신을 찾아오는 길손마저 놓치고 매우 아쉬워할 것 같아서다.
이렇듯 석정은 자연의 넓고 깊음을 절제된 언어로 노래해, 독자의 가슴에 이상향의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한 폭의 맑은 수채화처럼 들어와 앉는다. 우리가 자연으로 귀의 할 때 강산 어디도 낯설지 않고 다감한 것처럼, 그의 시는 누가 읽어도 어렵지 않고 자연스럽게 얘기를 걸어오듯 감미롭게 독자의 가슴을 적신다.

  최승범 시인은 석정 시의 연구논문에서 석정 시를 시대 별로 이렇게 정의 한다. “제 1기의 시세계는 흔히 말하는 전원적, 자연적, 목가적이면서도 탈속의 어떤 이상향을 그린 것이었다면 제 2기는 이러한 시세계에서 탈피하여 차츰 시인의 시점을 현실로 되돌려 그 무렵의 철저한 풍경과 눈물겨운 참상을 그대로 보여줬고, 제 3기는 보다 더 민족의 역사적 현실을 응시하여 ‘파라척결로써 새로운 역사 창조에 저력이 될 수 있는 길’을 추구한 이른바 현실참여적인 면으로 기울었다. 시인의 말년인 제 4기에 오면 다시 제 1기의 전원적 목가적 경지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한결 더 건강한 정신으로 속정에 국척함이 없는 냉엄한 관조에 의한 대바람소리와 같은 율조의 시세계에 젖게 한다.” 라고.
  석정의 저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시집으로 <<촛불(1939) >>을 출간 했고, <<슬픈 목가(1947)>> <<빙하(1956)>> <<산의 서곡(1967)>> <<대바람 소리(1970)>> 그리고 유고 수필집으로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리면(1974)>>과 역서 <<중국시선(1954)>> <<매창시집(1958)>> <<고금명시감상(1958, 이병기와 공저)등이 있다.
  석정은 1974년 7월 6일 고혈압 증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은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자연으로의 회귀다. 그가 추구한 이상향의 나라는 멀리 있지 않았다. 그가 지키며 살았던 향토다. 다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침략주의, 전쟁, 갈등을 배제한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있고 양지 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는, 어머니와 함께 새빨간 능금을 딸 수 있는 평화로운 나라다. 시인은 올 가을도 평화롭기 그지없는 그 나라에서 어머니와 함께 풍요로운 추수를 하고 있지 않을까. 
취재에 도움을 주신 최승범 시인님, 부안의 양규태 수필가님, 조명환 님, 비사벌초사의 김남용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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