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먼 나라'의 원형 -신석정 편
디지털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문명의 편리함을 한껏 누리고 산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분명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시인 신석정(1907~1974년)의 발자취를 취재하기 위해 최승범(전북대 명예교수, 석정의 사위)시인을 만나러 전주로 가는 길. 초행이지만 navigation의 친절한 안내로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전주에 들어서자마자 갑작스런 기계의 오작동으로 인해 마치 더듬이가 떨어져나간 곤충이나 다름없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같은 곳을 뱅뱅 돌며 약속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다. 문명은 분명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준다. 반면 이처럼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으며 당혹스럽게 할 때가 적지 않다. 그래서 디지털문명과 도시화가 대세인 현대에도 대부분의 사람들 내면 한 구석은 목가적인 삶을 동경하는 것이 아닐까.
<최승범시인과 대담>
전주의 ‘고하 문예관’으로 최승범 시인을 찾아뵙는다. 온화한 인상과 조용한 목소리의 노 시인,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취재일행을 반갑게 맞는다. 오후엔 이곳 문예관에서 문학행사가 있는 날이라 서둘러 와줬으면 하는 시인의 요청이 있었는데 30분이나 늦은 것이다. 사무실이 있는 4층, 서고는 엄청난 책들로 웬만한 도서관을 방불케 한다. 바로 인터뷰에 들어간다. 박 팀장은 최 시인에게 먼저 석정 시인의 사위가 된 동기를 묻는다. 최 시인은 “(석정 시인이)태백신문에 계실 때 선배 김준영(전북대 명예교수, 당시 조교)의 소개로 처음 뵈었죠. 훤칠한 외모에 어글어글한 음성, 이분이 바로 <<촛불>> <<슬픈 목가>>의 시인 아닌가?! 그저 경외롭기만한데 (시인은)정겹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인연을 맺고 1년여 지난 다음 결혼(석정의 장녀 일림과)을 하게 되었지요.”라고 간단하게 답한다. “6.25때 석정 시인이 잠시 공산당에 가담했다가 고향 사람들로부터 질시를 받아 곤욕을 치른 걸로 아는데 사실인가요?” 라고 묻자 최 시인은 “(석정 시인이)부안, 시골에 있으니까, 시골엔 인재가 없으니까 선생이 공산당의 표적이 되었나 봐요. 그리고 동생이 6.25때 행방불명된 이유 때문에 문제가 더 크게 부각되었지 않나 싶습니다. 본인의 상처가 더 깊었지요.” 라며 최 시인은 담배를 태워 문다. “석정 시인의 최종학력이 당시 소학교 졸업인걸로 아는데 고등학교 교사를 하시고 대학 강의까지 하셨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요?” 라고 묻자 최 시인은 “예, 선생께선 소학교 졸업으로 정규교육과정을 마쳤지만 한학을 했고, 조선불교중앙강원에서 불전을 연구하고 독학으로 끊임없이 문학을 공부하여 실력을 갖추셨던 게지요.”라고 한다. “석정시인께선 1년여 서울에 머문 것 외엔 돌아가실 때까지 고향을 떠나지 않은 걸로 아는데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라고 묻자 최 시인은 “선생께선 부모, 형제, 고향에 대한 애정이 유별하셨어요. 그래서 장만영(석정시인의 동서), 김기림 등 서울에서 활동하던 문인들이 서울로 오라고 권유했으나 끝까지 고향을 가까이서 지키며 사셨지요.”라고 말하며 잠시 상념에 젖는 듯 눈을 감는다. 그가 결혼하여 둥지를 틀고 살았던 부안의 선은리 ‘청구원(전라북도기념물 제84호)’ 시절 <<촛불>> <<슬픈 목가>>를 쓴 시기를 그의 시작(詩作) 제1기로 본다. 이때는 그야말로 완전히 자연에 묻혀 자연을 노래한다. 이때 그의 대표작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쓴다.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나려오면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어머니
오월 하늘에비둘기 멀리 날고
양지밭 과수원 꿀벌이 잉잉거릴 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중에서
노장철학의 영향을 받고 한때 불교에 심취했던 시인은 선문답형식의 전개방법으로 의문형과 청유형을 번갈아 쓰며 화자가 추구하는 세계를 강조하며 ‘어머니, 당신도 그런 곳을 원하지 않느냐?’며 의문을 좆는다. 이 시는 우리 삶에서 어렵지 않게 펼쳐지는 전경을 그린다. 하지만 이곳은 현재형 잃어버린 낙원이다.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은 이러한 전경들을 눈으로 보면서도 내면으론 평화롭게 품을 수 없는, 시대적 절박한 상황을 의미한다. 아무리 무릉도원이라도 정신적으로 그곳에 평안히 안주할 수 없으면 낙원이 되지 못하고 이상향으로만 꿈꿔야하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가 되는 것이다.
<석정시인 생전 비사벌초사에서>
석정의 유택은 부안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송정리의 고성산, 옛 성곽을 등지고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전북 임실에 있던 묘지를 이장했다. 이곳은 일명 쥐머리골, 산의 형상이 쥐머리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묘지를 참배하고 돌아서려다 가만히 내려다보니 묘지 마당과 주변에 식물도감에서만 볼 수 있었던, 연보랏빛 타래난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실타래처럼 줄기를 감고 올라가면서 핀 앙증스런 꽃을 그냥 두고 오기가 아쉬워 휴대폰 카메라에 한 컷 담아가지고 산을 내려오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봐진다.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친자연주의, 그리고 취재 내내 그의 사위 최승범 시인으로부터 들은 석정 시인의 다감한 이미지가 오버랩 되어 마치 살아있는 듯 일행을 불러 세우며 ‘보오! 이 꽃은….’ 라며 타래 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줄 것만 같아서다.
<변산 묵정마을입구 시비-파도>
석정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부안군 변산면 묵정마을로 간다. 시비(파도 수록)는 마을 입구 새만금을 바라보는 바닷가 기슭에 있다. 이곳은 도로변에 맞닿아 있어 차를 세울만한 곳이 없어 시인의 문학을 기리는 시비공원으로의 역할을 제대로 할까싶질 않아 안타까운 생각이 먼저 든다. 사람 좋아하는 석정 시인, 당신을 찾아오는 길손마저 놓치고 매우 아쉬워할 것 같아서다. 최승범 시인은 석정 시의 연구논문에서 석정 시를 시대 별로 이렇게 정의 한다. “제 1기의 시세계는 흔히 말하는 전원적, 자연적, 목가적이면서도 탈속의 어떤 이상향을 그린 것이었다면 제 2기는 이러한 시세계에서 탈피하여 차츰 시인의 시점을 현실로 되돌려 그 무렵의 철저한 풍경과 눈물겨운 참상을 그대로 보여줬고, 제 3기는 보다 더 민족의 역사적 현실을 응시하여 ‘파라척결로써 새로운 역사 창조에 저력이 될 수 있는 길’을 추구한 이른바 현실참여적인 면으로 기울었다. 시인의 말년인 제 4기에 오면 다시 제 1기의 전원적 목가적 경지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한결 더 건강한 정신으로 속정에 국척함이 없는 냉엄한 관조에 의한 대바람소리와 같은 율조의 시세계에 젖게 한다.” 라고. |
출처: 아심의 아침 원문보기 글쓴이: 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