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고문헌 중에서 난의 실체와 분포,재배에 관하여 사실적으로 설명해 놓은 경우는 세종31년(1449)에 완성된 청천 강희안(1417~1464)선생의 양화소록에서 처음으로 찾아볼 수 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란과 혜의 종류가 그리 많지 않다. 분에 옮긴 뒤에 잎이 점점 짧아지고 향기도 좋지 않아서 국향의 뜻을 잃고 있다. 그러므로 꽃을 보는 사람들이 심히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호남연해의 산에서 난 것은 품종이 좋다. 서리가 온뒤에 뿌리를 다치지 않게 제자리 흙으로 싸주고 옛법대로 하여 분에 심는 것이 좋다. 초 봄에 꽃이피거든 - - -)라고 하였다. 여기에 쓰여진 난이란 호남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춘란에 관한 기록이다. 한편 1530년에 증보된 신동국여지승람의 권 31 함양군 조에는 {화장산재군남 15리 산중난혜}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식물 분포, 지리학적으로 미루어 볼때 한란이나 건란과 같은 혜가 경남 함양지방의 산에서 자랄 리는 없고 우리나라의 남부지방에서 흔히 자라는 춘란이라고 생각된다. 이 지역을 답사하여 조사해본 결과 춘란이 드물게 자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선조시대 한국의 역사, 지리, 풍속, 인물, 초목 등을 한자의 음으로 분류하여 편찬한 권문해(1534~1591)의 대동운부군옥이라는 책에서는 양화소록과 동국여지승람의 내용 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었다. 1715년에 간행된 홍만선의 산림경제에는 일경일화성인 것을 란으로 취급하였고 일경다화성인 것을 혜로 구분하였는데, 이는 황산곡의 죽기와 본초강 목,기문등, 중국책을 인용하였고 (본국란혜 - - - 생)이라고 기록한 것은 양화소록을 그대로 인용 하였음을 알 수 있었으며, 1798년에 간행된 재물보에서도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1800년대초에 농업을 위주로하여 방대하게 편찬된 백과사전이며 본이지 를 비롯하여 이정표에 이르기까지 16개 부분으로 나뉘어져 간행된 서유구(1764~1845)의 림원십육지에는 난의 종류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난을 자,백,잡류로 구분하고 오란,금릉변,하란등 17종류, 그리고 백류를 시란,어침난 주란, 건란, 벽란 등 24종류,잡종류는 세란,묵란 항란, 백란, 춘란, 혜란, 은란, 풍란 등 14종류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들 이름은 중국서적 금장난보와 왕씨난본등에서 인용한 것으로 고찰 되었다. 또한,「(동국란화),자란,동난화품류~ 」라고 하여 앞서 기술한 양화소록이나 대동운부군옥,산림경제 등의 내용과 같으나 이 시대에는 중국산 또는 일본산의 난초가 대마도를 거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흔적이 나타나 있고 특히, 나도풍란(대엽풍란)과 풍난이 류구풍란과 더불어서 처음 기록되어 있었다. 이 책이 간행될 무렵에 이미 중국춘란의 품종들이 구분, 명명되어서 '왕자'나 '송매', "소타매"등이 알려져 있던 시기이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에는 1681년에 간행된 화단강목과 화록 (1765년발행)에 춘란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우리나라보다는 시대적으로 상당히 늦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중국의 경우도 그러하였지만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난에관한 기록이 혼란을 일으켰던 시대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때 동경이었던 경주의 내력을 적은 책으로서 1669년에 간행된 동경잡기에 「 물가의 난초는 곳곳에 있도다 - - -」라고 적혀 있다. 이는 난의 생태상 물가에서 자란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조재삼의 남송잡식 난보춘추에는 황산곡의 란혜구분법을 인용하여 기록하긴 했으나 여기에서 말하는 난은 오늘날에도 한약제로 쓰이고 있는 택난(등골나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위(1760~1828)의 조수충어초목명에 기록된 것들은 모두 택란이었는데 택란은 중국의 한나라 이전에 난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져 왔었으며 산란이라고도 불리었다. 소위 동양난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온대지방에서 자생하는 Cymbidium류 이외에도 석곡(Dendrobium moniliforme)을 보면 석란이라고도 기술 하였다. 이행(1478~1534)의 용제집에는 「석란. - - -」이라고 쓰여 있어서 석곡은 바위 위에서 자라는 생태특징에 관해서 언급된 바 있고,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제주도 토산품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석곡은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한약제로 널리 이용되고 있는 난과식물로서 이미 성종(1469~1494)시대때부터 기록되어진 식물이다. 한편 정조시대에 서술되어 훗날 손자들에 의하여 출간된 여암 신경준(1712~1781)의 여암유고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제주에만 일경다화성인 혜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제주한란에 관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신경준은 영조51년(1775)에 제주목사로 부임한뒤 수년간 제주도에서 지낸 바 있었다. 또한, 이 책에는 서울의 돈의문 밖에 사는 최씨라는 사람이 지금의 황해도 서흥이라는 곳의 산중 벌판에서 캔 희귀한 난 두포기를 주었다고 쓴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일경일화성인 춘란과 일경다화성인 한란을 식별할 수 있었으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만 혜로 취급되어온 한란이 자생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여암유고의 내용중에서 혜는 한란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선조34년(1551)에 저술된 김상헌(1570~1652)의 남차록에는 제주의 토산물로써 밤, 귤, 유자 및 석곡과 더불어 영릉향이라고 쓰여 있다. 정의현의 흥노리라는 곳은 지금의 서귀포시 서흥리이며 호근뇌리는 현재의 호근리인데 이 지역에 오늘날까지도 자생한란의 주된 분포지역이다. 또한 잡동산이에는 「혜금영릉향야 」라고 쓰여 있어서 영릉향이 곧 한란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1704년 제주의 지방지로 간행된 남신박물의 지약부분에 영릉향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기록에 의하면 영릉향이란 한약제로 쓰이는 콩과식물에 딸린 풀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기록된 영릉향이 과연 한란을 지칭한 것인지는 단정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므로 영릉향의 실체파악 여하에 따라서는 한란에 관한 우리나라의 최초 기록이 시대적으로 훨씬 앞당겨 질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