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저녁, 여느 날처럼 출판사 작은 공간에 모두가 모였습니다. 어떤 말의 끝자락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혜암 선생님과 우리 모두가 깔깔거리며 빈 출판사 공기를 채울 때였습니다.
혜암 선생님이 저를 보시며 “어떻게 그리 아이처럼 웃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가요?” 하며 되묻고 어떻게 웃었는지 기억하느라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그런 저를 보시며 스승님은 한 번 더 크게 웃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른인 스승님의 눈에는 내가 아직 아이인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웃음은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시간은 답을 알려주지 않은 채 흘렀습니다.
혜암 5기를 마치고 인생에서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마음이 힘든 날보다 몸이 아파서 힘든 날들이 더 많았습니다. 어떤 날은 숨소리에 묻은 앓는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어른은 떡국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괜찮은 어른으로 사는 척 노력하느라 많이 웃었던 그 날들을 잊고 살았습니다.
권영욱 선생님으로 다시 연결된 혜암 아동 문학회는 서먹했지만 설렜습니다. 미래가 만들어 낸 채팅 공간에서 선생님들의 글들을 읽는 순간 현실은 왜곡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그날. 그 작은 공간에 다시 머물게 했습니다.
혜암 아동문학회 첫 모임에서 받아쓰기를 했습니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형편없는 점수를 받은 우리는 모두 서로를 멀뚱멀뚱 보았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장난 섞인 웃음을 보이시던 스승님이 떠올랐습니다. 한참을 웃으시는 스승님이 야속할 뻔했습니다.
수업에 지각하는 제자들이 있으면 고개를 살짝 들어 반달눈 찡긋 감고 입꼬리 살짝 올리시던 웃음도 기억났습니다. 나중에는 우리 모두가 지각생을 향해 스승님처럼 웃어 주었습니다.
쉬어가는 시간에도 웃으시며 간식을 드셨기에 하얀 크림빵을 드실 때면 늘 입 주변에 묻히셨습니다. 슬며시 휴지를 드리면 엉뚱한 곳을 문지르시다 볼에 묻히기도 하셨습니다.
대상포진을 앓으실 때도 수업을 진행하셨습니다. 옆으로 살짝 비켜 앉으신 스승님이 안쓰러웠습니다. 하지만 스승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해 선한 웃음을 지으셨습니다.
온 세상을 즐겁고 아름답게 글에 담으시는 어른의 여유로운 미소는 늘 한결같았습니다.
혜암 아동문학회 나들이 사진 속 스승님이 예전처럼 웃고 계시니 저는 조금 늦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 입원을 하셨을 때도 여러 선생님의 글을 읽고 안도하며 마음만 보냈던 저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시간만큼 지속될 줄 알았습니다.
제가 준비가 될 때까지 모든 것이 기다릴 것 같았습니다.
꿈에서도 믿었던 그 날 아침
스승님의 부고를 읽으며 하루 일정을 잊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야 만나 뵐 수 있겠다.’라고 다짐했던 마음을 줄곧 꾸짖었습니다.
휴대전화 속 스승님의 사진을 살며시 눌러 크게 보았습니다.
어른이신 스승님께서 어떻게 그리 아이처럼 웃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대학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군복을 입고 보호자로서 대기실에 앉아있는 아들이 듬직했습니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이 반쯤 감긴 제 모습이 검사 대기실 유리문에 비쳤습니다. 많은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간호사 의사들만 오고 가는 근심 어린 공간에서 저는 행복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안심하라는 듯 대기실 유리문을 향해 다녀오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아들의 웃음에 어른의 근심이 포개졌습니다.
검사를 마치고 작은 식당에서 함께 우동을 먹었습니다. 아들은 너무 많이 주문했다며 헤죽헤죽 웃었습니다. 우동 속 잘게 썬 파가 입에 묻는지도 모르고 웃고 있었습니다. 아이같이 웃는 그 얼굴이 좋았습니다. 사각으로 접힌 휴지를 건네자 영문을 모른 채 얼굴 여기저기를 문지르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마치 국물에 몇 가닥 남지 않은 우동 면처럼 온몸과 정신이 흐트러지는 거 같은데도 한참을 웃었습니다.
아들을 보내고 버스를 타니 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잘게 떨어집니다. 맨 뒷자리 구석에 앉아 얼굴을 창문 가까이 붙였습니다. 답답한 숨을 쉴 때마다 유리창 작은 구석이 허옇게 불투명해집니다. 휴대전화를 꺼내 다시 한번 스승님의 사진을 크게 봅니다.
아직도 그날, 제가 어떻게 웃었는지 입김으로 가려진 창밖 너머의 세상인 양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때. 참된 어른이셨던 스승님의 웃음이 버스 창문 허연 입김 도화지에 그려집니다.
핑곗거리를 찾느라 마음이 어수선한 저를 보러 오셨나 봅니다.
아이처럼 웃고 계신 모습에 하얀 크림을 닦아드리려 손을 대었더니 또르르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립니다.
아마도 제 얼굴인가 봅니다.
제가 울고 있나 봅니다. 옷소매로 여러 번 문댄 얼굴이 따갑고 시립니다.
다른 생이 있어 다시 만나 뵙게 된다면 또 스승님의 제자이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꾀부리지 않고 성실히 배우겠습니다.
오랫동안.
그리고 스승님의 아이처럼 웃으시던 모습 꼭 기억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스승님. 감사합니다.
스승님. 안녕히 가세요.
한없이 어리석은 제자 전소연 드림.
첫댓글 어떻게 그리 아이처럼 웃습니까...
혜암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려집니다.
건강 잘 회복하시고
또 뵈어요.
회상할 수 있는 글로 기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전선생님
뵌 적은 없지만 혜암아동문학회라는 울타리안에서 공통분모가 많아 좋습니다
건강 챙기셔요
고맙습니다.
하, 선생님... 안 그래도 안 좋은 일들이 있어서 "또우나!"라는 별명처럼 한참을 울다가 혜암 선생님 생각이 나서 들어왔다가 이 글을 읽고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선생님을 딱 한 번 뵈었던 저도 이렇게 무너지는데 추억이 많은 분들은 어떨까 싶습니다.
혜암 선생님의 반달눈 찡긋... 어떤 모습일지 그려지네요.
우리가 이렇게 모여 추억하는 만큼 선생님은 우리 곁에 오래오래 계시리라 믿습니다.
정성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오래 계시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닮아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데 혜암 식구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 연이 끊이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혜암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전소연 선배님의 웃음을 뵐 수 있길 바래봅니다. 건행하셔요
인연… 이라는 소중한 말씀. 간직하겠습니다.
저두 인사합니다. 지면이나마 전소연 선생님 건강하세요~.
저도 지면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