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史記 6회》
☆강태공 이야기 2☆
강태공은 문왕을 유리성에서 빼내오는 일에서 부터 군대를 훈련시키고 농사기술을 가르치는 등 문왕을 도와 周나라를 융성하게 발전시켰습니다.
이 무렵 위수에서 낚시로 세월을 낚고 있던 시절, 못살겠다고 가출했던 부인 馬씨가 찾아와 지난날 집을 나간 것에 대해 용서를 빌며 함께 살자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강태공 : (물 그릇의 물을 마루에 쏟아놓으며) 이 물을 다시 그릇에 담아보시오. 그러면 함께 살겠소.
*馬씨 부인 :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담을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 양반이 나에게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집을 나가버렸다.
이 고사가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는 말로 3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해져 지고 있습니다.
강태공은 文王이 죽은 후에도 연이어 2대 武王을 도와 문왕이 이루지 못한 商나라 주왕(紂王)을 쳐서 없애고 종주국(宗主國) 周나라라는 대제국을 건설하는데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周나라는 전국의 모든 제후국(諸侯國)을 총괄하는 중주국(宗主國)이 되었는데 이는 전국에 지방관리(제후)를 두고 그 관할지역의 백성과 영토를 관리하게 하는 봉건제도를 정착시겼습니다.
강태공은 周나라 왕족 희(姬)씨 성을 가진 왕족은 아니었지만, 개국공신에게 주는 보상으로 산동지방을 봉토로 받아 제(齊)나라라고 칭하고 시조(始祖)가 되어 139세까지 장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봉건제도하에서는 종주국인 周나라만 王이라 칭하고 나머지 제후국들의 지도자들은 公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은 기전체(紀傳體) 방식과 편년체(編年體) 방식이 있습니다.
기전체 방식은 제왕의 연대별 순으로 기록하지 않고 인물 위주로 기록하는 방식인데 사마천의 사기가 이런방식이며 우리나라 삼국사기도 이 방식을 따라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반면에 편년체 방식은 왕조의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방식인데 대표적인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마천의 사기는 연대순으로 소개하지않고 인물 중심으로 소개하는 것임을 미리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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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史記 6회
권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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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2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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