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제4괘 山水蒙산수몽
卦辭괘사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몽 형 비아구동몽 동몽구아 초서고 재삼독 독즉불고 이정
彖傳 단전
蒙 亨 以亨行 時中也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志應也
몽 형 이형행 시중야 비아구동몽 동몽구아 지응야
初筮告 以剛中也 再三瀆 瀆則不告 瀆亦困也
초서고 이강중야 재삼독 독즉불고 독역곤야
蒙以養正 聖功也
몽이양정 성공야
象傳상전
山下出泉 蒙 君子以 果行育德
산 하출천 몽 군자이과행육덕
爻辭 효사
初六 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吝
초육 발몽 이용형인 용설질곡 이왕린
九二 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구이 포몽 길 납부 길 자극가
六三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無攸利
육삼 물용취여 견금부 불유궁 무유리
六四 困蒙 吝
육사 곤몽 린
六五 童蒙 吉
육오 동몽 길
上九 擊蒙 不利為寇 利禦寇
상구 격몽 불리위구 이어구
‘산수몽’의 몽은 어리석음이다.
아직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배움이 시작되는 자리이다.
몽이란 학생과 선생이 함께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배우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배우는 학생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야 한다.
계몽은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세상을 보게 해 주는 일이다.
닫힌 마음을 열고, 어둠 속에 빛을 비추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은 평생 배우고 또 가르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것이 산수몽이 전하는 지혜이다.
匪我求童蒙비아구동몽 童蒙求我동몽구아, 내가 어린아이를 찾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나를 찾는다.
선생이 학생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선생을 찾아야 한다.
서양식 교육은 “누구든 오라”고 말하며 많은 학생을 받아들인 뒤, 그중 뛰어난 사람을 골라낸다.
반면 동양식 전통에서는, 학생이 그 분야의 가장 뛰어난 선생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선불교의 초조(初祖)인 달마는 9년간 벽을 보고 좌선하며 깨달음을 닦았고, 그 모습에 감동한 혜가가 제자가 되어 선종의 이조(二祖)가 되었다.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선(禪)의 전통이자 배움의 자세다.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어렵다”는 말이 있다.
“당신의 스승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담바라 꽃은 삼천년에 한 번 핀다는 전설이 있다.
이 꽃은 보기 어려운 진귀한 가르침이나 성인의 출현을 상징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대승(大乘)은 단순히 큰 수레가 아니라, 큰 깨달음을 이룬 위대한 스승을 가리키기도 한다.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와 같은 인물들이 그러한 예다.
이들은 우담바라처럼 긴 세월에 한 번 나타나는 인류의 스승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당신에게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있다면, 무엇이든 그 길의 가장 뛰어난 선생을 찾아가 보라. 진짜 배움은 좋은 스승을 만나는 데서 시작된다.
단전왈
志應也지응야란 뜻이 서로 응한다는 것이다.
정말 배우고 싶은 학생이 선생을 찿아야 서로 뜻이 통하지 배우기 싫은걸 부모가 억지로 배우게 해선 안된다.
初筮告초서고는 점을 친다는 말이 아니다.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로 처음 묻는 것은 응답을 받지만, 반복되고 가벼운 태도는 하늘도 외면하며, 그로 인해 스스로 어려움을 초래하게 된다는 뜻이다.
蒙以養正 聖功也 몽이양정 성공야
무지한 사람을 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것이 성인의 위대한 일이라는 뜻이다.
서울 양정고등학교의 교명 "양정(養正)"은 "바른 인재를 기르다"는 뜻을 지닌 유교적 교육 이념에서 비롯되었다. 1905년 설립자 엄주익 선생은 대한제국 황실의 후원을 받아 학교를 설립했으며, 황실과 귀족 계층의 올바른 인재 양성을 목표로 삼아 교명에 이러한 철학을 담았다고 한다.
象傳상전
山下出泉 蒙 君子以果行育德
산하출천 몽 군자이과행육덕
산수몽이란 산아래 계곡물이 위험하게 흐르고 있다. 장마가지고 폭우가 내리면 계곡의 물은 무섭게 쏟아져 내려오고 산은 깎이고 산사태가 일어나며 강물은 흙탕물이 되어 모든걸 휩쓸고 내려간다.
山下有險산하유험 險而止蒙험이지몽
산아래 물은 위험한데 이 위험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할 때는 뒤집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산과 물을 뒤집으면 ‘수산지(險而止)’가 되는데, 이는 ‘위험한 곳에서는 멈추라’는 뜻이 된다.
산수가 수산이 되어 물이 백두산의 천지와 같이 산위로 올라 오는 것이 샘물이요 생수이다. 보통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이 물은 거꾸로 산 위로 올라온다. 이처럼 위험하고 무서운 물이 사람을 살리는 생수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산수몽’의 상징이다.
가야금을 처음 배우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가야금은 마치 무섭고 거센 강처럼 느껴진다.
그 강을 건너려면, 좋은 선생을 만나고,
끊임없이 연습하며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스스로 큰 산처럼 우뚝 서게 되는 날이 온다.
과학자가 되든, 예술가가 되든 마찬가지다.
재능만으로는 부족하다.
좋은 스승과 피나는 노력이 함께할 때,
비로소 진짜 실력과 깨달음이 생긴다.
이것이 계몽이다.
“君子以果行育德군자이과행육덕”,
군자는 결단력 있게 실천하며 덕을 기른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덕’은 특별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갖추어야 할 삶의 기본 태도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더라도
덕이 없다면 그것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덕’이란 무엇일까?
세상은 두 가지 세계로 나뉜다.
절대의 세계와 상대의 세계다.
상대의 세계는 너와 내가 분리된 세계다.
여기엔 크고 작음, 손해와 이익, 필요와 쓸모, 공평과 불공평 같은 끊임없는 비교와 분별이 존재한다.
이런 분별은 결국 대립을 낳고, 불신과 갈등, 미움과 배신으로 이어진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태도, 승자독식의 경쟁, 성공은 혁명이 되고 실패는 내란이 되는 세계, 그것이 분별의 세계, 곧 상대의 세계다.
반면, 절대의 세계는 사랑의 세계다.
너와 내가 따로가 아닌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된 세계다.
여기엔 비교도, 미움도, 잘남도 없다.
모두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다.
사람은 원래 이 절대의 세계에서 시작한다.
어릴 적 우리는 순진무구했고,춥고 더운 것도 잘 느끼지 못하며,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세상을 받아들였다. 이 시기의 마음을 ‘통일지’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고, 세상을 분별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너와 나는 다른 존재가 되고, 세상은 분리되고 비교되는 상대의 세계로 바뀐다.
그러나 다시 절대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다.
사랑은 그 전환의 열쇠다.
예를 들어, 부모가 되고 나면 자식들을 비교하지 않고 모두를 평등하게 바라보게 된다.
좋고 싫음, 잘하고 못함을 넘어, 모두가 소중한 존재로 느껴진다. 그 순간, 우리는 다시 절대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사랑의 세계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분리된 마음에서 하나 되는 마음으로, 분별지에서 통일지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덕이 자라는 길이다.
효사는 산수몽의 적용부분이다.
산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보기엔 평화롭지만 언제든 위험을 품고 있다. 주역의 산수몽은 바로 그런 형상이다. 겉으론 안정된 듯하지만, 실상은 아직 미숙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다. 이 위험을 피하려면 단순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괘를 뒤집어보면 해답이 보인다. 山水산수를 뒤집으면 水山수산이 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지止’, 멈춤의 의미가 담겨 있다. 위험 앞에선 멈추는 것이 지혜다. 성찰 없이 덤비는 자는, 마치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드는 것과 같다.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어떤 도전도 감당할 수 없다.
수산은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이 산 아래에서부터 솟구치는 형상, 즉 산하출천이다. 땅속 깊은 곳에서 맑은 샘이 터져 나오는 모습이다. 이것은 외부에서 억지로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힘이다. 진짜 변화는 안에서 시작된다.
예수는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생수는 위에서 부어지는 물이 아니라, 믿는 자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물이다. 그것은 곧 성령이며, 말씀이며, 창조적 생명력이다.
철학이 깊은 사람은 생각이 흘러나와야 하고, 예술가라면 예술이 자연스럽게 발현되어야 한다.
사업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업을 펼쳐야 하고, 시인은 자신의 언어로 시를 써야 한다. 노래하는 이에게는 자기만의 음색이 있어야 한다. 남의 것을 흉내 내는 데서 진짜 생명은 나오지 않는다.
주역의 ‘蒙몽’ 괘는 여섯 효를 따라 배움의 여섯 단계를 상징한다. 그 흐름은 發蒙발몽, 包蒙포몽, 金蒙금몽, 困蒙곤몽, 童蒙동몽, 擊蒙격몽으로 나뉜다.
발몽은 어리석음을 깨우는 출발점이다.
막 배움을 시작한 이에게 길을 열어 주고, 덮개를 벗기듯 어둠을 걷어내는 단계다.
가야금을 배울 때도 정음이 있고, 서예에도 정법이 있듯, 모든 학문과 기술에는 바른 법도가 있다.
처음엔 그 법도를 따르며 기초를 닦아야 한다.
포몽은 감싸고 돌보는 시기다.
강한 스승과 연약한 제자의 만남은 부드럽고 따뜻해야 한다.
계란이 병아리가 되기까지 어미 닭이 품듯, 처음 배우는 자에게는 격려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금몽은 유혹과 욕심에 흔들리는 단계다.
여기서 ‘금(金)’은 물질, 탐욕, 외적인 성공을 상징한다.
배움보다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자는 올바른 길을 벗어난다.
정법은 버리고, 자신의 색깔이나 전문성은 사라지고, 결국 남의 것을 흉내 내는 수준에 머물게 된다.
가룟 유다가 은 30냥에 예수를 팔았듯, ‘금몽’은 배움을 팔고 영혼을 잃는 위험한 순간이다.
곤몽은 고립된 배움의 시간이다.
스승과도 막혀 있고, 친구들과도 단절된 외로운 시기다.
지식은 있으나 마음을 나눌 이가 없다.
그러나 이 침묵과 고독 속에서 자아는 깊어지고, 배움은 내면화된다.
동몽은 순종과 조화의 단계다.
겸손하게 배우고, 스승의 가르침에 부드럽게 반응하는 태도다.
‘손(巽)’은 바람처럼 스며들고 흘러간다.
불교 화엄사상의 이사무애(理事無礙)는 스승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사사무애(事事無礙)는 친구와 친구 사이의 통하는 배움을 상징한다. 이때 배움은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격몽은 마침내 배움이 완성되는 시점이다.
스승은 엄격해지고, 훈련은 혹독해진다.
학생은 힘들어하지만, 이 과정을 통과한 뒤에야 참된 실력과 전문성이 자리잡는다.
“不利爲冦불리위구, 이롭지 않으나 적이 아니고 / 利禦冦이어구, 해악을 막는 데는 이롭다”는 말처럼, 엄격한 스승은 원수가 아니라 진짜 친구다. 삶은 더 냉정하고 세상은 더 까다롭다.
이 모든 과정을 견뎌야 비로소 배움은 자기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산수몽은 세상과 삶을 처음 배우는 어린 학생의 모습이다. 그 학생은 따뜻하게 품어주는 좋은 선생과, 때로는 단호하고 엄격한 훈련자 같은 스승을 만나며 성장한다.
그렇게 배움을 쌓고 덕을 기르면, 산수는 뒤집혀 水山止수산지가 되고, 산 아래서 샘물이 솟아오르는 山下出泉산하출천의 형상이 된다. 이제 그 학생은 다시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예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배움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다른 이를 가르치고 살리는 생수로 흘러가야 한다는 것을, 산수몽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