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빨래 널기
류재순
미국에 가서 반년 넘게 있는 동안 나는 켈리포니아주 토렌스에 있는 딸집에서 생활하였다. 3~4km 거리의 태평양을
옆에 끼고 파란 하늘을 이고 사는 이 고장의 태양은 항상 쨍쨍 찬란한 모습을 하고 있어 유난히 맑고 청신한 공기와
조화를 잘 이루며 파리 모기조차 찾아 볼 수 없이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끔 눈을 지그
시 감고 가슴을 쑥 내밀며 두 팔을 쫙 벌리고 깊이깊이 심호흡을 하는 향수에 빠져 들곤 한다.
이곳은 종래로 전쟁 포격의 세례를 겪지 않아서인가 몇십 년 몇백 년이 된 늙은 아름드리 거목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며 몇십 년 씩 되었다는 별장 같은 주택들도 새 주택들 못지않게 끄떡없이 풍채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생활에 아직은 '현대사'에 속하는 많은 설비와 가전제품들도 그쪽에서는 이미 거의 백여 년 이라는
'이력서'를 형성하고 미국인들의 생활 패턴 속에 완고히 엉켜 있었다. 바로 빨래 건조기가 그랬다. 세탁기에서 빨
래를 하고 탈수까지 다 하고 난 빨래를 꼭 빨래 건조기에 오래오래 건조시켜 꺼내는 것이다. 밖에서는 태양이 눈
부시고 상쾌한 바다 바람이 주택 뒤 넓은 정원에 선들선들 불어오고 있는데 이모든 것을 외면하고 빨래가 건조기
에서 덜커덩 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보통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몇 안 되는 사발을 전용 식기 세척기
기에 넣고 긴 시간을 돌리는 것도 못마땅했지만 그나마 그건 뜨거운 세척기에서 충분히 소독될 거라는 생각에 이
견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빨래건조기를 쓰는 일에 대해서만은 끝내 나와 딸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딸애도 엄마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뒷뜨락 잔디밭 파라솔에 있는 탁상위에 커피 잔을 같다놓고 나를 부르며
해설을 한다. 빨랫줄을 널어놓으면 도시 거리 경관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집밖 뒤 정원에도 빨래 너는
것이 법적으로 엄금되어 있다는 것이다. 큰길 도로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제 집 뒤울안에서도? 참 납득이 가지 않
는다….
하긴 딸애의 말은 나에게 몇십 년 전 일을 상기케 했다. 70연대이었나, 내가 처음으로 중국에서 제일 큰 국제도시
인 상해에 갔을 때였다. 많은 고층 건물과 화려한 상가들, 상해의 '대세계'는 동북 태생인 나를 충분히 현혹시켰다.
여기저기 다니다보니 어느 결에 즐비하게 늘어선 주상복합 단지에 들어섰다. 이상한 풍경이 벌어 졌다. 아파트
집집마다 창문을 열고 긴 장대들을 밖으로 내밀어 놨는데 그 장대들엔 크고 작은 빨래들이 줄줄이 널려져 있었다.
여인들의 속옷들도 넌지시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체적인 아파트 형체는 빨래널기 장터 같았다. 정말 볼품
이 없었다.
앳된 젊은 마음에도 충격이었다. 오랜 세월 내 마음 속에서 '상해'하면 항상 이 찜찜한 풍경과 동반되어 상기되
곤 하였다. 물론 지금은 아니겠지…이러고 보니 미국의 법을 이해가 될 만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리에선 아예 보이지도 않는, 햇볕 좋고 바람 좋은 넓은 뒷 정원에 빨래대 하나 못 놓게 하다니!?…
내가 이렇게 빨래에 대해 집착을 하게 된 데는 거의 소시 적부터 몸에 익혀진 습관 때문이리라. 나는 어린 시절부
터 할머니를 따라 빨래터에 따라다니는 것이 큰 재미였다. 맑은 물이 콸콸 흐르는 꽤 큰 냇가에서 넓적한 돌 하나
를 차지하고 할머니를 흉내 내어 타닥타닥 빨래를 두드리기란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작은 손아귀 속에
서도 빨래는 방치로 두드릴수록 검은 떼 국물을 줄줄이 흘려 내 놓는다. 그 다음 빨래를 할머니처럼 흐르는 물에
활활 몇 번 헹궈 내면 뽀얗게 변해버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썩해난다. 할머니보다 더 잘 해낸 것 같았
다.
그러나 더욱 큰 재미는 큰 빨래함지를 머리에 인 할머니 뒤를 부지런히 타박타박 따라 돌아와 햇빛 가득한 집 울
안의 빨랫줄에다 빨래를 너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성가시니 옆에서 얼씬 거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으름장을
놓지만 난 무조건 걸상 하나를 빨래줄 아래다 갖다놓고 뒤뚱 올라서 작은 빨래들-양말, 수건, 베갯잇 등을 기어
이 내 손으로 넌다. 할머니가 탁탁 빨래를 털며 빨랫줄에 널면 나도 그 작은 양말도 손으로 탁탁 치고 또 쫙 펴서
널었다. 그러다 동네를 몇 바퀴 돌며 실컷 놀다 집으로 돌아오면 누루스럼 하던 광목 이불 호청들이 할머니 손을
거쳐 쨍쨍한 햇빛 아래서 옥양목처럼 눈부신 빛을 뿌리며 바람에 펄렁이고 있었다. 물론 할머니가 큰 솥에다 잿
물을 풀고 빨래를 푹푹 삶으신 것도 한몫을 한 것이다. 나는 영화 구경을 하듯이 울안에 꽉 찬 빨랫줄의 빨래들을
한참 구경하다 비로소 바람으로 땅에 즐비하게 떨어진 작은 내 빨래들을 발견하고 왔다갔다 뛰어 다니며 줍느라
바쁘다…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난 나의 동년 소녀시절의 생활 모방과 체험들은 나의 인생에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자리매김 해놓았다.
그러나 내가 성인이 된 어느 날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면서부터 내 생활에 오랜 세월 몸 베어 온 빨래널기 습관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물론 양지바른 베란다에 빨래를 널기는 하지만 바깥 울안 빨랫줄에다 빨래를 널던 그
대자연의 싱그러운 향은 다시는 찾을 수 가 없었다. 그때에야 난 비로서 우리 한민족 여인들이 얼마나 슬기롭고
정갈하며 대자연속에서의 우리의 생활을 얼마나 아름답게 잘 디스플레이 해왔는가를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되었
다. 아, 밝은 햇빛 ,청신한 바람, 대자연이주는 그 세례 속에서 빨래는 얼마나 깨끗이 소독되고 깔끔하니 화이트
되며 보송보송하니 상큼한 향기를 안겨 주었던가. 그런데 이번에 딸아이 집에 와보니 뒷 정원의 이렇게 좋은 천
연 빨래건조 터를 안 쓰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유감이 어디 있으랴. 하긴 환경 경관 영향을 우려한 아파트주민
협회의 주장으로 결정된 미국의 법이라니 서운한 생각은 지울 수 없지만 역시 에누리 없는 법이다. 그러나 아쉬
운 마음은 미국을 떠난 뒤에도 내 머릿속에서 좀처럼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온 지 일 년이 되던 어느 날 나는 미국에 있는 딸의 소식을 보려고 위쳇을 훑어보던 중 딸이
올린 뜻하지 않은 글을 읽게 되었다. “엄마, 미국 켈리포니아주 주민들은 정원에 빨래를 널 수 있는 새 법이 규
정됐어요, 엄마, 빨리 또 놀러 오세요. 뒷 잔디밭 파라솔에서 커피 마시며 정원의 빨래 마르는 향도 맡으며…”
오 마이갓! 이건 또 무슨 아이러니한 일이람? 내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을 때 또 한 줄의 글이 올
라왔다. “정부의 주장 : 첫째, 태양능을 이용하여 전기 에너지 대량 절약. 둘째, 자외선을 이용하여 충분한 빨래
소독…”
허, 무슨 큰 발명이라고? 우리조상들은 원래부터 잘 해왔어! 난 혼자 중얼거리며 폰을 닫았다. 아무튼, 마음은
너무 후련하였다.
2015년 11월 15일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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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색깔 분명한 언어들이 그린 그림 잘 보이네요, 좋은 글 즐감했어요.
감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