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자아와 명상
우리가 지금까지 마음 근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훈련의 핵심은 편도체 안정화와 전전두피질 활성화 임을 살펴보았다. 전통 명상 중에는 편안전활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수행 방법이 많다. 대부분의 명상은 마음 근력을 강하게 하고, 인지능력을 향상시키며, 면역력을 강화하고, 긍정적 정서를 증신시켜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한다.
내면소통은 우선 편도체 안정화를 위한 것으로 호흡훈련, 내부감각훈련, 고유감각훈련 등을 살펴보았고, 전전두피질 활성화와 관련해서는 자기참조과정훈련과 자타긍정 내면소통의 용서-연민-사랑-수용-감사-존중 여섯가지 방법을 살펴보았다.
내면소통 명상은 행위보다는 존재 모드에 편안히 머무는 것이다. 그래야 편도체가 안정될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명상의 목적 역시 무엇인가를 얻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내 안에 이미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음을 깨닫는데 있다.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기에 집착할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기에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
명상은 늘 지금 여기에 고요함을 느끼고 온전함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경험자아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본래 면목으로서의 진짜 나를 보게 된다. 경험자아가 나의 본 모습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텅 빈 자리로서의 인식주체, 즉 배경자아가 곧 진짜 나임을 깨달아 모든 괴로움과 부정적 정서에서 한순간에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늘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중 가장 시끄러운 것이 나의 마음이다. 경험자아인 마음은 끊임없이 떠들어댄다. 온갖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이 경험자아의 본성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 일상생활을 영위하려면 경험자아는 꼭 필요하다. 그러나 경험자아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면 반드시 고통과 불안과 분노가 찾아온다. 경험자아인 내 마음이 곧 진짜 나라고 믿는 착각에서 집착이 일어나고 이 집착에서 두려움이 생겨난다.
경험자아인 마음은 온갖 느낌과 감정과 생각과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시끄럽다. 그 소음을 넘어서 진짜 나를 발견하려면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한다. 경험자아가 만들어 내는 온갖 이야기들은 일종의 꿈과 같은 것에 불과함을 확연히 깨우치는 것이 명상의 즐거움이며 수행의 목적이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 명상이다.
내 마음소게 있는 텅 빈 공간 혹은 고요한 침묵을 바라볼수 있어야 한다. 고요함은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고요함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소리와 소리 사이의 텅빈 고요함은 분명히 알아차릴수 있다. => 소리 명상에서 소리와 소리 사이의 고요함은 알수 있다.
종소리가 사라진 뒤의 고요함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차린다. 고요함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알아차림의 대상이다. 고요함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알아차림의 상태가 된다. 고요함에서 내면 소통 명상은 시작된다.
우리 의식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메털 코멘터리, 생각, 감정, 스토리 텔링 등은 모두 일종의 소음이다. 이러한 소음이 있는 한 텅 빈 자리이며 고요한 침묵과도 같은 배경자아를 알아차리기란 어렵다. 내면의 소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함을 알아차리는 것이 명상의 첫걸음이다. 고요함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내면에 있다. 그 고요함이 배경자아이고 나의 본원적 모습니다.
나의 삶은 항상 지금 여기에서 펼쳐진다. 과거나 미래는 경험자아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구조일 뿐이다. 나의 삶은 항상 지금-여기에서 펼쳐지는 사건이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해가는 시간의 축은 인간의 의식과 기억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실제 나의 삶은 그러한 허상과 상관없이 시간을 초월해서 항상 지금 여기에서 계속 펼쳐진다. 존재하는 것은 끊임없이 펼펴지는 현존일 뿐이며 그것이 영원한 지금이다.
경험자아는 온갖 기억과 상상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지만 경험자아 저 뒤에 혹은 저 깊은 곳에 있는 배경자아는 항상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곧 인식주체로서의 진짜 나다. 배경자아가 진짜 나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마음을 지금 여기로 가져와야한다. 과거의 행위와 미래의 행위에 대해 기억하고 상상하는 경험자아를 한걸음 떠러져서 바라보는 진짜나는 항상 지금여기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험자아는 내 삶에서 펼쳐지는 일을 내가 통제할 수 있고 내가 통제해야한다고 믿는 에고이다. 사실 그것이 경험자아의 존재 이유다. 나의 특정한 움직임과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자아의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 몸의 특정한 움직임과 행동을 넘어서 삶의 모든 측면을 내가 통제할수 있다고 착각하는것이다. 일상적인 경험자아를 넘어 늘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배경자아를 알아차리는 다양한 방법이 곧 명상이다.
명상 : 우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근본에는 우연이 있다. 인과관계의 기반의 스토리텔링으로 설명할수 없는 것을 우연이라고 한다. 자아의식의 기본 작동방식은 인과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스토리텔링이다. 그러한 스토리텔링 구조에 맞지 않는 모든 일을 우리는 우연이라고 부른다. 스토리텔링이 무너지는 그곳에서 우리는 우연을 느낀다. 자아의식은 우연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스토로텔링이 본질인 자아의식은 더 이상의 스토리텔링이 불가능해지는 우연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우연을 우연으로 받아들일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 종교를 만들었고 과학을 발전시켰다. 인간은 삶에서 우연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온갖 신화를 만들고, 신을 만들고, 이론을 만들고 뉴스를 만들고, 때로는 음모론이나 황당한 교리를 만들기 까지 한다. 각종 신이나 우주 이론은 이 우연이라는 빈자리를 메울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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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 삶은 원래 우연적인 것이었다. 수렵 채집으로 먹고사는 삶은 우연을 기반으로 한다. 배고프면 돌도끼를 들고 나가서 사냥해서 먹고 사는 삶은 우연에 맡겨져 있다. 1년 뒤에 어떻게 먹고 살게 될지 알수 없고 계회갈수도 없기에 걱정도 할수가 없다. 미래는 전적으로 우연에 맡겨져 있기에 그에 대한 불안은 존재할 수가 없다. 다만 하루 하루 현재에 집중해야만 한다. 하지만 약 1만년전 농업혁명이 일어난 이래로 인류에게 미래는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지금 씨를 뿌리고 경작을 하면 언제 얼마만큼 수확할수 있는지 예측할수 있게 된 것이다. 먹고사는 것에 대한 예측이 가능해지자 미래를 통제할수 있고 통제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생겨났다.
홍시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어 게획대로 수확하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불안감도 생겨났다. 예측대로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인간의 삶을 점차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발 하리라에 따르면 현대인의 가장 큰 마음의 병인 불안은 농경사회에 진입하면서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안감을 근본적으로 펼쳐버리기 위해서는 미래를 통제할수 있고 통제해야 한다는 환상을 버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우연의 힘을 음미하고 그것을 마음의 문을 열어 받아들이는 수용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이리저리 상상해서 미리 걱정하는 것은 일종의 병적인 마음 상태다. 일종의 강박적 사고다. 걱정한다고 해서 결코 해결될 일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환영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것은 항상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우연으로서의 나의 삶이다. 물론 경험자아를완전히 떨쳐 버릴수 없는 우리로서는 ㅣ미래에 대한 계획도 해야하고 과거를 돌이켜 보기도 해야 하므로 삶의 모든 것을 우연에 맡기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우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허함을 마음 한 구석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미래 계획이나 과거에 대한 기억은 모두 스토리텔링에 불과하다. 그것은 삶자체가 아니다. 삶은 항상 지금 여기서 펼펴지는 우연적 사건들을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차려야한다. 그것을 그대로 수용할수 있어야 한다.
경험자아의 활공에는 생각, 기억, 행동, 느낌, 감정등이 포함되는데 모두 스토리텔링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경험자아 자체가 본질적으로 일화기억의 집적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경험자아는 과거지향저일수 밖에 없다. 반면에 배경자아는 늘 지금 여기에 있는 존재다. 배경자아만이 지금 여기의 현실에 바탕을 둔 실제적인 존재다. 경험자아의 스토리텔링에 의해서 구성되는 과거와 그 과거의 투사인 매래는 모두 스토리텔링에 불과하며, 그것의 존재 기반은 지금 여기의 배경자아 일뿐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도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항상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다. 과거에 대해 좌절하거나 분노하고 미래에 대해 걱정하거나 불안해하는 것도 모두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기에 과거와 미래는 항상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과거와 미리에 끌려다니는 삶은 불행하다. 그 반대여야 행복해진다. 과거와 미래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금 여기로 끌려오는 것이 배경자아의 내면 소통이ㅏㄷ. 늘 지금 여기에 존재하느 배경자아는 고요하고 평온한다. 그러한 산태를 지향하는 것이 내면소통 명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