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둥지가 없다
배영춘
알람이 울린다. 잠에서 덜 깬 둔탁한 몸을 일으켜 등에 베개를 받치고 벽을 기댔다. 늘 맞이하는 아침이지만 오늘은 피곤이 가시어 지지 않아 눈을 오래 감았다가 살며시 떴다.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마음은 아침마다 같은 생각이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아침공기가 기다렸듯이 달려드니 축 늘어져있던 세포들이 신선한 공기를 쭉쭉 빨아들이며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하다. 어둠을 뚫고 새벽을 깨우는 겨울의 쌀쌀한 찬바람에도, 땡볕이 쨍쨍 내리 쬐는 한 여름에도, 쉬지 않고 우는 매미처럼 건설 현장 어디든지 부지런히 달려갔다. 오늘도 설쳐대는 바람의 기세를 잠재운 새벽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몸으로 하는 일이다 보니 경험이 싸이고 노하우와 기술이 늘어남에 따라 요령이 생겨 일하는 진도가 빠르다. 그만큼 피로도 쌓인다.
오늘도 남보다 먼저 시스템 비계 위에 올랐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고 둘러봤지만 고요함 뿐이었다. 잘못 들었나 해서 나는 다시 몇 발자국을 옮겼다. 푸드덕 발아래서 산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시스템 비계 위 모퉁이에 산비둘기가 알을 품고 있었다. 건설 현장 철근을 묶는 결속 선을 하나하나 물어다 이리 저리 차곡차곡 엮어 마치 철옹성 같은 둥지이었다. 산비둘기가 ‘철옹성’같은 둥지를 만들기까지는 한 달 이상 걸린다고 한다. 멀리 날아가지 않고 우우욱 우우욱 소리를 낸다. 나는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분명 나와의 대화였다. 아마도 건드리지 말라는 암시인 것 같다.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상호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나 자신에게 도덕적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고 인간과의 관계에도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날짐승이나 새끼 거두기는 마음은 매한가지다. 나는 동료들과 이야기해서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숲속의 생태계에서 사랑하고 품고 있던 알도 번식하고 하면은 좋으련만 잡아먹힐 수도 있는 아찔한 여기에 둥지를 틀었을까 망치 소리 톱날 돌아가는 소리 파이프 부닥치는 소리로 현장은 소란스럽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둘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알을 품고 있다. 나는 그동안 몸이 많이 지쳐오면서 나 자신에게 짜증으로 지내왔다. 그러나 왠지 둥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포근한 느낌이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둥지가 없어졌다. 부화가 시작된 알도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다. 순식간에 둥지와 알을 잃은 알거지 신세가 된 산비둘기가 어딘가에서 둥지 없이 날 샌다는 것이 맘에 걸렸다. ‘철옹성’이라 믿었던 둥지와 알을 잃은 산비둘기 한마리가 내 머리 위를 맴도는 것만 같다. 현장 관리인이 좋은 곳으로 옮겨줬으리라 믿고 싶을 뿐이다.
햇볕이 따가워지기 시작한다. 간밤에 내렸던 빗물이 수증기가 되어 대기는 찜통 같은 느낌이다. 낡은 회색 조끼는 땀에 젖었다 말랐다 반복하며 소금 빛을 낸다. 나는 땅바닥 아무 데나 앉아 시원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잠깐 휴식을 취했다. 시멘트 실은 차가 매연과 먼지를 뿜으며 지나간다. 그러나 휴식은 달콤하다. 나의 맞은편에도 서너 사람이 정해진 장소에서 담배를 물고 있다. 쉴 곳이 따로 정해져 있지만 장소가 부족해 아무 데나 앉는 곳이 휴식처고 신발을 벗는 곳이 쉼터이다. 늘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열악한 환경은 불편함마저 무디게 느껴진다.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매끈하던 손이 어느새 겉늙고 쇠잔해졌다. 손등을 쓰다듬어 본다. 얇은 살갗 밑으로 정맥이 도드라져 여러 갈래의 강줄기처럼 뻗어져 있다. 허드렛일을 많이 처리했던 손바닥도 눈서리 맞은 겨울나무처럼 처연하다.
점심시간, 함바식당(현장식당)을 가득 메운 인부들은 너나없이 게 눈 감추듯 그릇을 싹싹 비운다. 먹는다는 것보다 퍼 넣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몇 분 몇 초라도 더 쉬기 위한 행동이다. 함바식당 바로 옆에는 근로자 휴게실이 있다. 한여름이지만 에어컨으로 근로자 간이 휴게소는 다소 시원하다. 의자까지 갖춰져 있어 편하게 누워 쉴 수 있다. 나는 밥을 빨리 먹는 편이나 건설 현장에 와서는 늦게 먹는 편에 속한다. 그만큼 주어진 한 시간의 점심시간을 활용해 쪽잠을 청한다. 휴게실 의자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땅바닥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고 있으면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해지고 여유로움에 잠이 밀려든다.
더위에 점점 숨이 막힌다. 나는 근로자 휴계실 안을 살폈다. 어째서인지 빈 의자가 하나 있었다. 나는 냉큼 의자에 몸을 맡기며 안락하게 누웠다. 삐그덕 고장난 의자는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자리가 불편했다. 그러나 땡볕의 바깥보다는 편안하다. 건설 현장 안에는 컨테이너 사무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책상도 의자도 많지만 내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아니다. 내 눈앞에 둬 발자국 거리에 있는 빈 의자가 심리적으로는 한없이 멀다. 가끔 의자의 유혹에 흔들릴 때도 있지만, 주인은 따로 있다. 심리적인 거리 때문에 쪼그려 앉아있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의 존재를 확고해 하고 추억을 남기며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어서 그런지 산과 가깝고 하늘과 가까운 곳에 집을 찾는 이들이 많다. 몸이 아프거나 현장 일이 없는 날에는 유난히 더 힘든 날이다. 그럴 때면 내 집이 생각난다. 주인을 떠나보내고 적막감이 맴도는 내 집에 못 가는 게 나의 휴식처가 집이 그리울 때가 많다. 어쩌고 보면 가슴 한구석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집 없던 어렸을 때의 감성이 꾸벅꾸벅 현장에서 일하게 만드는 원동력일 것이다.
인생은 무엇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삶은 시작되고 인생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 한계를 살다가 이 세상 떠나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안락한 의자 없이 두 다리와 두 손으로 삶을 지탱한지 30여 년이 지났다. 이제는 해가 바뀔 때마다 몸도 고장 난 의자처럼 조금씩 기우는 걸 느낀다. 타국 땅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하루하루를 이겨내며 생활의 삶의 여행에서 언제나 여유롭고 평화롭다. 오늘도 나는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며 높디높은 시스템 비계 위를 오르고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