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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탕평(蕩平)’을 내세우며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던 영조의 치세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최후를 목격했다. 그 사건은 결국 ‘권력은 부자 사이에도 나눌 수 없다’라는 비정한 현실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정조의 행보는 당쟁의 와중에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차지한 노론 사이에도 영조의 탕평책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으로 당파가 나뉘고, 노쇠한 영조를 대신해 세손으로서 정조의 대리청정에도 서로 다른 의견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살얼음을 걷는 듯한 현실에서 나름의 현명한 처신으로 마침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여전히 역사학계에서는 정조의 치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거침없는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서 그것이 좌절되었다는 평가가 그 중 하나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친위조직을 구축하고, 이른바 ‘문체반정’이라는 정책에서 보듯 자신의 정책에 반발하는 세력들을 억눌렀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 그와는 다른 평가라고 하겠다. 정조 역시 탕평을 내세웠지만, 그의 정책을 지지하는 시파와 적극적으로 맞서 반대했던 벽파의 갈등이 그의 치세 동안 지속되었다. 더욱이 비극적으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그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서 인내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었다.
이처럼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정조의 치세를, 이 책의 저자는 ‘높은 이상과 빼어난 자질, 그러나 ....’라는 부제로 규정하고 있다. 분명 정조의 정책들은 당대 사회의 현실을 적절히 개혁할 수 잇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뛰어난 학문적 자질을 토대로 한 지나친 자신감이 그의 사후 강력한 반동의 정치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것은 어쩌면 ‘시대의 한계이자 정조의 한계’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강력한 세력을 지닌 노론이 19세기에 특정 가문 중심의 세도정치를 전개할 수 있는 바탕이 완성되었던 당대의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정조가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은 20세기 이후 역사가들에 의해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되고 있다고 하겠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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