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코리아 디카시와 호모 루덴스
최광임(한국디카시인협회 부회장 겸 집행위원장)
세계는 컴퓨팅과 네트워킹으로 하나가 되었다. 정보의 기반은 플랫폼화되고 생활은 스마트 도구화되었다. 사회의 논리는 정보화되었으며, 빅데이터의 정리와 정돈이 사회의 기반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하나가 된 세계는 새로운 문화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인류는 최근까지 원자atom로 구성된 실물 세계를 거점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비트bit로 구성된 디지털 세계의 발견은 인간의 삶을 지금까지는 상상할 수 없던 미지의 세계로 끌어가고 있다. 이 거대한 사이버 세상을 우리는 ‘제7의 대륙’이라 칭한다.
이제 인간의 삶은 디지털 신인류 방식으로, 사회문화는 디지털 신문화의 출현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제 성장/분배, 국가의 안보/개인의 인권 같은 이항 대립은 이전과는 전혀 판이한 상황으로 목도하게 되었다. 고전적 산업혁명과 차원이 다른 이런 문명을 우리는 21세기의 혁명 혹은 제4차 산업혁명이라 부른다. 이제 산업뿐만 아니라 문화를 포함하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의 재편이 불가피해졌다.
여기서 우리는 제7의 대륙에서의 삶의 방식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이자 문화학자 요한 호위징아는 ‘호모 루덴스’ 즉 ‘유희의 인간’이라는 문화 신조어를 만들었다. 호이징가가 20세기에 만들어낸 이 용어가 이제 21세기 문화의 속성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고 있다. ‘노동’하지 않는 인간을 잉여 인간으로 간주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노동만을 유효한 생산 활동으로 간주해온 시대도 이제 과거가 되었다. 제7의 대륙은 ‘놀이’의 생산성, 놀이의 문화적 가치를 전경화한다. 놀이는 더 이상 노동의 반대말이 아니다. 놀이 같은 노동이라는, 놀이와 노동의 혼종적 개념이 이제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디카시’는 바로 이러한 시대의 맥락에서 나온 새로운 문학 장르이다. 디카시엔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를 활용한 시 놀이로서의 디카시, 문학이라는 문화로서 디카시, 문화산업의 문화콘텐츠로서 디카시의 중층적 의미가 들어가 있다. ‘디카시’가 곧 한국을 출발지로 하는 세계의 문화 아이콘으로 확산할 것이라고 예감하지만, 문화산업 영역으로서 디카시는 일단 논외로 한다.
앞으로 디카시 전문지가 더 많이 나오리라 보지만, 그간 한국디카시연구소에서 발간하는 계간 《디카시》는 시인과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디카시 창작의 장을 꾸준히 마련해 왔다. 2022년 여름호로 벌써 통권 42호를 발행하였다. 단 하나의 디카시 전문지가 이렇게 10년 이상 간행되어왔으니, 그간 디카시 공모전들의 확산 속도에 비하면 디카시 전문지의 확산은 대적으로 활발하지 않았다고 보아도 된다. 그렇기에 이어산 발행인이 창간한 반년간 《한국디카시학》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국내 시전문 잡지가 수백 개이듯 《한국디카시학》은 이제 디카시 전문지 확산의 새로운 단초를 열었다. 벌써 통권 3호가 나왔다.
전문지가 디카시의 존재를 심화해 가듯, 시인은 디카시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재구성한다.
밤마다 둘은
동그랗게 빛난다
- 이상옥
물리적 어둠은 백구 두 마리에게 소외의 공간이다. 그것은 집주인의 보호 밖에 있으며, 대낮의 안전함과 자유로움이 부재한 공간이다. 집을 두고도 노숙하는 것은 개집에서 잠을 자기에는 마땅치 않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안전한 여러 조건에서 제외된 개들의 존재를 어둠이 부각한다. 시인의 정서는 이 지점에서 발화한다. 사물의 언어는 때로 그 자체가 진실일 때가 많다. ‘어둠’과 ‘땅바닥’이란 시공간을 생존의 터전으로 삼은 ‘잠’은 처연함 그 자체로 읽힌다. 시인이 어둠 속에서 즉순간 포착한 사물은 흰 개 두 마리이지만 시인의 정서는 ‘소외된 것들’로 형상화되었다.
현대사회의 문제로 대두된 인간 소외 현상은 생명을 가진 것들에게 여지없이 적용된다. 소외된 사람은 물질로부터 소외되고 권력으로부터도 소외되며, 자연으로부터 소외는 물론, 타자로부터도 소외된다. 소외는 존재의 상실로 귀결된다. 인간의 안전을 빌미로 구성된 사회가 역설적으로 한 울타리 안에서 안전한 자와 안전하지 못한 자를 만들어 낸다. 이들에게 소외는 공간적으로든 의식으로든 음지이며 어둠이다.
시인의 역할은 노숙하는 흰 개 두 마리의 상실된 존재를 회복하는 일이다. 시인은 그것들을‘밤마다’ ‘빛’나는 존재로 승화시킨다. 시인은 거칠고 가장 낮은 곳에 처한 존재를 격상시킨다. ‘달’은 그 어느 것보다 높은 존재이다. 어두워서 묻히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빛나는 존재이다. 이 사회의 소외된 것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또 하나의 ‘달’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본다. 디카시는 이렇게 우리의 현실을 가장 사실적으로 드러내며 동시에 각자가 지닌 메타언어적 원칙으로 자신이 만난 사물과 그 사물에 대한 해석적 의미를 다양화하는 매력을 지녔다.
매달리던 허공을 놓고
한 닢
또 한 닢
가벼운 것이 등을 굽게 했다.
- 김유석
‘디카시는 사진과 문자의 결합이다’라는 디카시의 개념을 독자나 시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디카시는 이미지 언어에 시를 결합한 것이 아니다. 영상 자체로 사진 예술이 아니며, 문자 자체로 완결된 시가 아니다. 영상만으로 미완의 작품이며, 문자만을 읽었을 때 의미 형성이 되지 않는다. 이미지와 문자가 동시 결합하여 화학 반응을 일으켜야 한다. 디카시를 기존의 사진시와 혼동해선 안 된다. 문자가 사진 설명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날 때 사진과 문자 사이엔 아무런 화학 반응이 없다. 이런 점에서 김유석 시인의 디카시 「낙엽의 무게」를 좋은 디카시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영상만으로는 발화된 시인의 정서를 읽을 수 없다. “매달리던 허공을 놓고// 한 닢/ 또 한 닢// 가벼운 것이 등을 굽게 했다”라는 문장 역시 시적 메타포도 갖추지 못한다. 영상과 문장이 합쳐져 서로 스미고 섞일 때 비로소 영상은 시적 문장에 의해, 문장 역시 영상에 의해 의미를 발화한다. 단풍 든 낙엽과 허리 굽은 할머니의 유비는 ‘늙음’의 유사성을 보여주고, 그 유비는 굽은 등의 무거움과 떨어지는 낙엽의 가벼움이라는 대조로 다시 채색되며 입체화된다.
주택, 아파트, 전월세, 역세권, 점포세, 임대, 급매,
반지하와 옥탑방을 훑고 온 바람이
너덜너덜해진 골목의 베스트셀러를 읽고 있다
내 집 마련의 꿈,
펄럭 말려 올라간 고전의 뒷면이 하얗게 비어있다
- 최정란
엘리엇은 “예술이라는 형태로 감성을 표현하는 유일한 길은 객관 상관물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시는 감정이나 정서를 직접 전달하지 않고 객관 상관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한다는 말이다. 시는 발아된 시의 씨앗을 객관 상관물로 대상화한다. 반면에 디카시는 사물(이미지)과 시인이 조우하는 찰나, 사물이 품고 있는 시적 씨앗을 시인의 정서가 포착해 내고 그것을 받아 적는 형식이다. 시의 창작법과 디카시의 창작법이 다르다는 말이다. 최정란 시인은 벽보에 붙은 안내 게시물을 먼저 본 것이 아니라, 게시판에 불고 있는 바람과 먼저 조우한다. 벽보를 읽는 주체가 시인이었거나 타자로 설정되었더라면 디카시의 묘미는 살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계급 격차와 그로 인한 계급 갈등이다. 영상은 “구민이 주인인 정의로운 금정”이라는 홍보 글을 내걸고 있지만, 현실은 단연코 정의롭지 않다. 외적으로는 개인의 윤리 정신의 결여가 정의를 해체한 듯하지만, 정의의 몰락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다. 그런 연유로 서민에게 “내 집 마련의 꿈”은 멀다. 신자유주의의 최대 함정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갖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내 집 마련의 꿈은 고전이 되고 만다. 방법을 알 수 없으므로 빈 페이지가 된다. 그럼에도 서민들에게는 게시판에 붙은 홍보물이 베스트셀러가 된다. 최정란의 디카시는 사물이 갖는 표면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사물 뒤에 숨은 의미를 구체화함으로써 사회적 문제의 메시지를 담는다. 시인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인지하고 언어의 한계와 사유의 한계를 밝히려 하는데, 이런 시도는 곧 ‘시 쓰기’의 형태로 드러난다.
열성의 마당맥질 후
노동이 예술로
장인의 혼을 담은
예술가의 시간이다.
- 백민호
이 작품에서 노동은 노동이며 예술은 유희(여가)라고 등가시켜도 무방하다. 노동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재화를 획득하고 윤리적이고 상호적인 자아를 실현하는 행위이다. 예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특수 영역이다. 예술은 인간 본연의 유희 영역이다. 인간은 놀이할 때, 더욱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문화를 만든다. 노동이 놀이의 동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놀이가 노동의 원동력이 된다. 호위징아는 “진지한 노동이 인간의 창조적 발상을 가로막고 진부한 패턴으로 들어가게 한다”라고 말한다. 백민호 디카시 마니아는 노동의 시간을 예술가의 시간과 등가시킨다. 창작자의 놀이 방식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것은 사물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순간, 즉 사물을 다양한 의미로 형상화하는 순간에 동반되는 유희이다.
디카시의 매력은 층위적이다. 무엇보다 디카시는 원소스 멀티유스적이다. 예술성을 담보한 문학 장르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창작하고 향유할 수 있는 생활 문학이기도 하다. 지역의 볼거리 먹거리를 디카시로 담아낼 수 있는 훈륭한 문화 콘텐츠이다.
디카시는 전 국민이 디카시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한국을 넘어, 유라시아를 넘어, 세계 곳곳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 디카시로 문화 놀이를 하는 그날까지 문예 운동을 펼쳐나갈 것이다.
최광임
2002년 《시문학》 등단
시집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등, 디카시 해설집 『세상에 하나뿐인 디카시』 등
계간 《시와경계》 편집인, 계간 《디카시》 주간,
한국디카시인협회 부회장. 두원공과대학교 겸임교수. 대전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