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결혼하면 며느리 남편이지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말이 요즘 많이 회자된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면서도 어느 면에서는 합리적인 말이다. 결혼한 아들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서로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지지해주는 성숙한 어른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요즘 셀프 3종 세트도 있다고 한다. 물, 단무지, 효도가 그것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웃음이 나오면서 솔직히 통쾌했다. 본인이 해야 할 지극히 상식적이면서 간단한 것들도 다른 사람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전에 시어른을 모시고 병원에 가니 딸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요즘은 며느리보다 딸이, 사위보다는 아들이 본인 부모님과 병원에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명절 음식 준비와 상 차리는 것도 일반적으로 딸보다는 며느리가 아직 많이 한다. 며느리도 어느 한 집안의 딸이다. 우리나라만큼 은연중에 시댁의 텃새가 센 곳이 있을까?
아직 미성숙한 탓인지 지나간 시누이들의 소소한 텃세가 기억난다.
결혼 후 2년 동안 대구 남산동 시댁에서 어른들과 함께 지낸 후 첫 아이를 낳은 후 근처 아파트로 분가했다. 감사하게도 시어른들께서 맞벌이 하는 우리 부부대신 아들을 돌봐주겠다고 하셨다. 둘째가 태어난 후 우리는 만촌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난 달서구 쪽에 근무하며 출퇴근을 하던 상황이었고 남편은 타지에서 기업에 다니며 주말부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난 대구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 날 퇴근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타지에 있는 손아래 동갑나기 시누이가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자말자 “우리 엄마를 왜 울리는데~ 선생이면 다가! 애들 아침밥도 안 먹이고 엄마 집에 데려 간다메?”로 시작하는 일방적인 말들이 정제되지 않은 날선 감정과 섞여 수화기를 통해 쏟아졌다. 너무 갑작스럽고 놀라워 말이 안 나온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시댁에서 데려온 애들을 저녁밥을 해먹이고 씻겨 잠자리에 들게 해야 하는데 이어지는 전화 통화내용으로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어른께서 내한테는 “애미는 출근하기 바쁘니까 애들 여기서 밥 먹일게. 눈 뜨면 애들 차에 태워 집으로 그냥 데려온나.“라는 말씀을 하셔놓고 애들 돌보시느라 힘들었던 일들을 피붙이 딸에게 하소연을 하신 것
이다.
시어머니의 성품에 대해 익히 아는 나는 전화 건 시누이 말을 다 듣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사이 애들은 씻지도 않은 채 잠들어 있었다. 잠시 혼란스러웠다. 애들을 돌봐주는 어르신들께 고마우면서도 마음 한편은 늘 부담스러웠다. 시어머니와 통화 후 마음을 단단히 잡아맸다.
농사짓는 일과 어린 아이 돌보는 일 중에서 어느 것 할 것이냐고 물으면 농사짓는 일을 선택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아이 돌보는 것이 힘든 일이니 더 이상 어르신께 신세지지 말자고 생각을 정리했다. 언젠가는 한 번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어른들께 말씀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을 구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의 같은 라인에 거주하는 아줌마 한 분께 내가 집을 비우는 낮 시간 동안 아이들을 돌봐줄 것과 집안 정리 등을 부탁드렸다. 그 때 아이들 나이는 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고 둘째는 어린이집 다닐 때였다.
본인들의 감정이 더해진 시누이들 텃새가 몇 차례 더 있었다. 딸 입장에서 부모님을 생각해서 한 행동들이지만 좀 더 합리적인 소통 방법이 아쉬웠다. 특히 아직 기억에 남는 건 나에게 효도 좀 하라는 거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해야 할 효도를 남동생(오빠) 아내에게 하라고 강요한다는 거 난 이해하기 힘들었다.
시아버님의 노환과 치매가 심해져 어머니께서 힘들어하실 때 아이들 큰아버지네는 경주로 집을 옮겨 이사를 갔다. 가끔씩 오셔서 부모님을 도와드렸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시누이들은 몇 번 왔다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대구에 남아있는 남편과 나는 서로 직장 생활하며 주말에 찾아뵈었다.
주중에도 시시때때로 어머니 호출이 있으면 새벽에도 달려갔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며느리인 나에게 시누이들이 이렇게 텃세를 부렸다면 피를 나눈 남편에게는 어떠했을까! 가끔 형제들과 전화 통화 후 괴로워하던 남편의 모습이 안쓰러웠고 그 뒤에 계시는 그의 부모님과 형제들도 안타까웠다. 남편은 상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혼자 내뱉는 말들을 통해 짐작만 했다. 뭐가 문제일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은 지켜보기로 했다. 지나간 과거지만 모두 부모를 위한 최선의 행동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큰 올케에게 섭섭하게 한 일이 있다. 지금 생각하니 소위 시누이 갑질을 한 것이다. 평소 부모님을 모시고 산거나 다름없는 오빠와 큰 올케에 대한 믿음이 너무 크고 고마워 어느 한 순간 내 스스로 실망이라는 감정을 선택한 것이다. 그 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다 겪으며 함께 한 우리 부모님의 속내를 파악 못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조카들을 돌본 부모님의 공이 우리가 모르는 시집살이를 시켰을 부모님에게 돌아온 건지 당황스러웠다. 나도 한 집안의 며느리지만 며느리는 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딸과는 다른 감동과 믿음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딸 아들 상관없이 효도는 셀프가 우선인 것은 확실하다.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풋과일처럼 떫은맛을 내는 시기가 물론 있다. 다만 익어가는 것은 정작 본인 몫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저 영향을 줄 뿐이다.
옳고 그름을 앞세워 편 가르기 하는 사람보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 소통하는 사람, 힘들 때 잠시나마 기꺼이 한 쪽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성숙한 지성이 필요하다. 기분이 그대로 태도가 되면 당사자도 상대방도 불쾌해지고 해결 방법도 요원해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좀 더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정작 나 자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오늘도 나를 살펴보며 보듬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