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씻으며
박덕규
귀를 씻는 일, 귀를 씻는다는 것을 의식하는 일, 귀를 제대로 씻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귀를 씻는 일이 잦아졌다. 무엇이건, 신체 어떤 부위건 제대로 잘 씻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유독 귀를, 귀만을 잘 씻으려 하는 내 최근 습관은 좀 남다르다 할 수 있다. 오래도록 단아한 외모로 보아온 친구의 귀를 옆에서 우연히 보게 됐다. 나이 먹은 탓이겠지만, 그 귀는 깨끗하지 않았다. ‘아, 내 귀도 누가 보면 저렇겠지!’ 하는 자각이 금세 일었다. 그 다음, ‘막돼먹은 말’을 듣고 와서 귀를 야단스럽게 씻어낸 옛사람들 얘기가 떠올랐다. 귀를 씻어야겠다, 귀를 씻자! 나는 그날 이후 귀를, 씻기 시작했다.
남들에게 적어도 ‘안 씻은 귀’로는 보이지 않게 하는 게 귀를 씻는 내 첫 목표였다. 그런데 나는 ‘귀 씻기’를 하면서 점점 ‘아, 씻어내자, 씻어버리자!’ 하며 독백 비슷한 걸 하곤 했다. 그 무렵, 듣지 않는 게 훨씬 좋았을 그런 말 그런 소리가 내 귀에 와닿은 걸로 치를 떨 때가 있었다.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들을 너무 많이 듣고 살고 있다는 모멸감이 밀려들기도 했다. 나는 어느새 그런 ‘말의 때’까지 다 씻어내려는 의지를 더하고 있었다.
씻는다는 건, 때를 씻어내는 행위다. 귀를 씻는 일은 귀에 묻거나 쌓인 때를 씻어내는 일이다. 그런 때는 쉽게 씻기고 또 그 귀는 일시이지만 아주 깨끗해질 수 있다. 그런데 때를 씻어내면서 ‘말의 때’를 함께 씻어낸다는 건 실제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건 ‘인식적인 의미’로만 가능할 뿐이다. 그렇다고 그걸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이 실제에 영향을, 실제보다 더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귀를 씻으며 그 무렵 들은 ‘하지 않았으면 참으로 좋았을 말들’을 씻어낸다고 인식한다. 그러면 실제로 얼마간, 그 말들을 내뱉은 사람들이 ‘그 말들을 하지 않은 상태의 존재’로 환원되곤 했다. 다음날 나는 ‘그 말들을 하지 않은 원래 상태의 그 사람’을 다시 대할 수 있었다.
문학의 언어가 ‘세상의 말로 오염되지 않은 상태’여야 한다는 건 진리다. 아니, 이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진리는 말하기 쉽다. 말하기 쉽지만 수행하기는 어렵다. 수행하기 어려울 뿐더러 증명할 길조차 막연하다. 따라서 ‘문학의 언어는 세상의 말로 오염되지 않은 상태여야 한다’는 말은 실은 그럴싸한 진리로 보이는 아주 가식적인 명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가능하다. 세상의 말로 오염되지 않은 나만의 언어, 그런 언어를 찾아 쓰려는 인식을 전제한 문학, 바로 그런 문학으로 나아가는 것 말이다.
언어는 문자로 나타난 것(기표記標)과 그것이 의미하는 것(기의記意), 이 두 성분이 작용해 소통의 기능을 수행한다. 일반 사회에서 언중言衆이 언어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면 대개 그 언어 안의 두 성분이 원활하게 작용한 덕이다. 대중은 어떤 언어 표현에 대해서건 그걸 거의 엇비슷한 의미로 서로 파악하면서 소통한다. 그런데 같은 기표를 두고 다수가 각각 다른 기의로 이해하면 서로 간에 오해가 커져서 심각한 사회 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반면 기표와 기의 간의 서로 다름을 도리어 적극적으로 활용해 특별한 결과를 도출하는 언어 표현도 있다. 문학의 언어가 대표적이다.
문학은 언어의 기표 기의 간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데서 바람직한 효과를 얻는 표현물이다. 이때 그 차이는 이미 남이 해온 대로의 것이어서는 그 효과는 크지 않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긴밀하고도 낯선 긴장이야말로 수준 높은 문학의 언어가 지니는 멋진 덕목이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대개의 작가는 자신의 경험이나 인식 수준 또는 어휘력 한계 때문에 그런 덕목을 행하기 어렵다. 기표 기의 간의 차이를 얕은 비유로 적용할 때 나타나는 상투성, 그 차이를 아예 단절상태로 끌고 가는 시적 만용, 그 차이를 창조적으로 활용한 예를 답습하는 모방과 아류 등은 그럴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문학에서 기표 기의 간의 차이를 온전히 자기만의 것으로 활용하기 어려운 처지라면 ‘문학을 안 하는 게 차라리 좋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어쩌면 더욱 어려운 것인지도 모를 뿐더러, 그렇게 되면 나 역시 붓을 꺾어야 한다. 이런 가혹한 처벌을 면하기 위해 급히 ‘습작하던 때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되뇌며 겸손한 자세가 되어 본다. 그 시절, 문학의 새로운 표현, 즉 기표 기의 간 차이의 독특한 울림을 얻기 위해 얼마나 부지런히 ‘기표 연습’을 했던가. 우선은 어휘, 문장, 문체 등과 같은 겉으로 표현하는 말이 단순, 반복, 평범에 머물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실은 중요한 것은 이런 ‘기표 확장’에 그치는 게 아니다. 알다시피 문학에서 언어 표현의 빈곤은 기표의 문제일 수만은 당연히 없다. 기표 확장은 기의와의 관계와 더불어 진정한 가치가 생겨난다. 김춘수는 이러한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서 기의에 개입된 ‘오염된 선입견으로서의 의미’를 문제 삼아, ‘무의미’로써 기표를 자유롭게 하는 시적 세계를 실천했다. 김수영은 기표와 기의를 지나치게 단절하는 시의 타성으로는 현실의 모순에 대응할 수 없다고 보고 언어에서 기의가 전면적으로 기표에 통하는 ‘온몸시학’을 실천했다. 문학의 언어로 치면 이 둘 어느 쪽이든 가짜 현실이 만들어놓는 가짜 언어를 타파하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이즈음의 많은 미디어는 사이비 지식을 제 것인 양 포장해 각종 담론을 생산하고 유포한다. 그것은 속성상 더 많은 대중의 호응을 필요로 하는바, 그 말은 날로 교묘하고 선동적이다. 그 말에 현혹돼 가짜 담론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자신과 뜻이 다른 집단을 어느새 공격하고 조롱하면서 그걸 지성적인 행위로 착각하는 이들이 흔해졌다. 놀랍게도 문학하는 이가 그 행태를 닮아가는 듯하다. 오염된 기의들의 현란한 기표들이 판치는 세상! 더러운 때를 씻기 위해 시작한 내 귀 씻기는 이제 이걸 씻어내는 행위로 바뀌어 있다. 내 귀 씻기가 맹렬해지는 건 그런 말들을 내뱉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멈출 수 없다. 아직 나는 그 사람들을 ‘그 말들을 하지 않은 상태의 존재’로 환원해서라도 다시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덕규 | 1980년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아름다운 사냥』 『골목을 나는 나비』 『날 두고 가라』 등. 이상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등 수상.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거쳐 현재 단국대 초빙·명예교수.